기금마련전을 통하여 지하형의 난초그림을 대하면서 나는 그의 그림 속에 일어나고 있는 난초그림의 내용과 형식 모두의 변화를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다.
지하형은 80년대 들어서면 저항시인, 민주투사에서 사상가로서 적극 자기를 실현하기 시작했다. 군부독재가 한창일 때 민주투사 김지하가 그 싸움의 현장을 외면하고 한가하게 동학(東學)을 얘기한다는 비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것은 세상사람들이 김지하에게 기대하는 것과 김지하가 세상에 기대하는 것 사이에 일어난 간격이었다. 그리고 그 간격은 다분히 현실이 아니라 이 땅의 장래, 아니 미구에 닥칠 문명적 혼돈과 갈등 그리고 서구 자본주의의 교활하고 비정한 인간성 파괴에 대항할 우리의 정신적 무장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밥 이야기’ ‘남녘 땅 뱃노래’ 같은 저술로 나타났고 또 ‘애린’ 같은 시로 표현되기도 했다.
지하형은 일찍부터 생명(生命)의 사상으로 우리의 삶과 도덕을 재무장할 것을 요구했고 한살림운동으로 실천할 것을 강력히 외쳤다. 그 시절 지하형이 내게 이 생명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했을 때 나는 내게도 준비하고 있는 다른 운동이 있다며 외면하듯 거절한 것을 지금도 후배로서 마음의 빚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때 나는 지하형이 세월을 너무 앞질러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의 주장이 명백히 옳고 궁극적으로 시간은 그의 선지적(先知的) 화두의 의미를 알게 하겠지만 철저히 대지에 뿌리박고 살고자 하는 리얼리스트로서는 동승할 수 없는 내 마음의 일단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를 구했다.
그러나 같은 미학도(美學徒)로서 그의 난초그림이 갖고 있는 미학에 대한 믿음만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지하형이 율려(律呂)를 이야기하고, 여정(麗正)을 말하며 우주적 질서의 재인식과 인간적 가치관의 재확립을 강조하는 것이 그의 난초그림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다.
지하형의 난초그림은 화법(畫法)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그의 난초그림은 ‘사군자화보(四君子畫譜)’ 같은 난보(蘭譜)를 임모(臨摹)하는 것이 아니라 흉중(胸中)의 난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난초가 난의 고귀함이나 아름다움이 아니라 잡초 같은 단엽난(短葉蘭)으로 민중의 풋풋한 삶을 반영해낸 정신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하 난은 스승의 그것과 달리 처음부터 장엽난(長葉蘭)을 추구하였다. 그는 한 가닥 또는 두 가닥의 긴 난초잎이 혹은 뻗어 올라가고 혹은 율동적으로 휘날리는 모습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정신적 가치를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것은 유려한 아름다움일 수도 있고, 외로움·그리움·희망·의지 같은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고, 균형·질서·조화 또는 불균형·무질서·혼돈에 대한 성찰인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하의 난은 형상적 상징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이번 출품작 중에는 ‘기우뚱한 균형’이라는 난초그림이 있다. 여기서 '기우뚱한 균형'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나는 그 속뜻을 남김없이 다 알고 있다.
작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지하형이 내게 전화를 걸어 당신의 강좌에 와서 한국미술의 특징 중 특히 여성성, 자연성과 부드러움에 대해 이야기 좀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가 명지대 석좌교수로 한 강좌를 맡고 있는데 '미(美)의 율려(律呂)'를 논리적·사변적·연역적으로 말해온 것을 실증적이고 귀납적으로 증언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흔쾌히 응하면서 우리나라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슬라이드를 통하여 강의하였다. 그 강의의 마지막 슬라이드는 백자달항아리였고 그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은 '기우뚱한 균형'에 있다고 강조한 것이 내 강의의 결론이었다.
그때 지하형과 나는 어린애들이 ‘기브 미 파이브(Give me five)’ 하는 것처럼 손바닥을 마주쳤다. '기우뚱한 균형' 그것은 지하형이 항시 주장해온 '미(美)의 율려(律呂)'인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