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지하형의 난초그림, 그러니까 그의 초기 난초그림은 참으로 청순하고 아름다움으로 넘쳐흘렀다. 내게 그려준 것도 그렇고, 내 친구들에게 그려준 것, 그 무렵 내가 본 지하형의 난초그림은 필법(筆法)이 대단히 교(巧)하고, 날렵하고, 멋스럽고, 여운이 짙다. 때로는 날카로운 느낌이 일고, 때로는 요염하기도 하다.
그 한 예로 ‘자네 날더러 춤추라면 꼭 이렇게 추지’라는 작품을 보면 필법도 필법이지만 공간 운영에 얼마나 리듬이 많이 들어가 있는지 단박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지하형이 원주에서 해남으로 옮겨 요양하고 있던 시절 그의 구작들을 몇 점 전시하였다. 그 작품들을 보면 난초도 난초이지만 화제(?題)부터 오늘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골짜기의 난초는 천리 밖으로 향기를 보내네(山蘭送香千里外)’처럼 '묵장필휴(墨場必携)'에 나옴직한 구절도 있고 ‘흐르는 강물같이’처럼 그의 서정시 중 한 구절 같은 것도 있고 또 ‘난이 바람의 항구임은 머물지 않고 스쳐지나기 때문’이라는 명상적인 화제도 있다.
이처럼 지하형의 난초그림은 그 출발부터 사색(思索)과 시정(詩情) 그리고 난초그림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지하 난의 중요한 특징이자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하형은 지인들에게 보내는 난초그림에 거의 반드시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문구 또는 그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구로 대개는 한문 한 구절을 화제로 쓰고 "아무개를 위하여"라고 쌍낙관 하였다. 내가 받은 묵란에는 ‘하로동선(夏爐冬扇) 위(爲) 유홍준제(兪弘濬弟)’라고 했다.
나는 지하형이 왜 이 구절을 나에게 던져주었는지 아직도 모른다. 여름 부채와 겨울 화로가 아니라 여름 화로에 겨울 부채라니! 나 같은 놈은 어느새 쓸모없는 후배가 되어가니 열심히 일하라는 뜻인지 아니면 여름 화로와 겨울 부채도 때가 되면 다 제 몫을 하는 법이니 그렇게 자숙하며 때를 위하여 준비하라는 뜻인지. 아무튼 나는 그 구절이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기분 나빠 오랫동안 깊숙이 치워두기도 했다.
지하형의 난초그림은 그런 식으로 은연중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난초그림이 공식적으로 처음 전시장에 걸린 것은 1986년 서울 인사동 그림마당 민 개관기념전 때였다. 그때 출품된 작품이 ‘자네 날더러 춤추라면…’이었다.
이 전시회에 지하형은 난초그림 이외에 호랑이그림과 일종의 풍자화도 한 폭씩 출품했었다. 그 호랑이그림은 ‘병인년(1986) 호랑이 공갈무도(恐喝舞圖)’이고 풍자화는 ‘웜메, 대창에 잎사구가…’이었다.
이 두 작품은 사실 난초그림보다도 훨씬 시인 김지하다운 작품이었다. ‘병인년 호랑이 공갈무도’는 호랑이 한 마리가 앞발을 들고 음흉스런 표정을 지으며 인자한 척 덩실덩실 춤을 추는 그림이었다. 당시 정부가 88올림픽 마스코트로 호돌이를 선정한 것, 그리고 올림픽을 빙자하여 독재를 강화하고 있는 것을 풍자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인물풍자화 ‘웜메, 대창에 잎사구가…’는 한 인물이 대창[竹槍]을 보고 놀라 자빠지는 그림이었다. 그 그림의 화제는 ‘웜메, 대창에 잎사구가 확 피어부렀어야!’로 되어 있었다. 대창을 얼마나 오랫동안 쓰지 않고 땅에 세워놓았길래 새순이 돋아났냐는 것이다.
이 두 작품은 그림 그 자체로도 재미있는 풍자화였지만 한편으로는 김지하의 그림솜씨 바탕이 웬만한 화가 못지 않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감동과 놀라움 그리고 안심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난초그림만으로는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필력이 있는지 없는지 판별이 잘 가지 않는다. 그러나 지하형의 이 풍자화는 그의 난초그림 밑바닥에 든든한 필력이 있음을 남김없이 보여준 것이다.
지하형이 그림도 잘 그린다는 사실은 이미 알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담시 ‘앵적가(櫻賊歌)’를 발표할 때 그 삽화를 자신이 그려 ‘다리’지에 실은 적이 있고, 또 그의 이야기 모음집 ‘밥’과 대설(大說) ‘남(南)’의 표지를 자신의 그림으로 꾸민 바도 있다. 지하형의 난초는 그런 필력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80년대 후반, 지하형의 난초그림은 당시 재야단체마다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가기 위하여 너나없이 한 차례씩 치렀던 '기금마련전'에 최고의 인기 품목으로 등장했다. 내가 직접 관여했던 기금마련전만 해도 전노협을 위한, 전교조를 위한, 노동인권회관 건립을 위한, 진보정치를 위한, 역사문제연구소를 위한, 환경운동연합을 위한 기금마련전 등등…. 그럴 때면 지하형과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난초그림은 보통 5∼10점이 출품되었고 그것은 후원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그때 사람들이 지하형의 난초그림을 그렇게 선호한 것은 그의 지명도도 한몫하였겠지만 그의 난초그림에 무언가 범상치 않은 신기(神氣)가 감돌며 아름다운 리듬이 있는 것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나도 그때 그림을 한 폭 사주어야 할 입장이라 지하형의 난초그림을 한 폭 구입하였다. 그 그림은 담묵(淡墨)의 가녀린 좌란(左蘭)에 농묵의 달필로 화제를 썼는데 ‘바람이 학의 둥지를 흔들어 생기는 그림자(風搖巢鶴影)’라고 했다. 이 그림은 지난 10년간 줄곧 나의 서재에 항시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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