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난초를 동시에 포착하는 것이 표연란이다."-지하
지하(芝河)형이 마침내 그 유명한 난초그림으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주위의 후배들이 올해로 회갑을 맞은 것을 한편으로는 축하하고 한편으로는 회고하는 자리로 마련한 것이다.
나 역시 지하형의 수많은 후배 중 한 사람으로 이 전시회에 관여하게 되었고 또 미술평론을 업으로 삼아온 나로서는 그의 난초그림에 대한 평문을 이렇게 기고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지하형의 난초그림에 대하여 언젠가 꼭 한 번은 글을 써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을 갖고 있었다. 지하형의 난초그림이 어언 20여 년의 연륜을 갖고 있는데 지난 20년간 그의 난초그림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지하 난에 대한 비평적 증언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지하형이 난초그림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1980년 무렵 원주 시절부터이다. 오랜 기간 옥고를 치르고 지친 심신을 요양하기 위하여 원주에 칩거하고 있던 시절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 선생으로부터 난초 치는 법을 배우면서 시작했다.
지하형이 그때 왜 난초를 그려볼 마음을 먹었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단 한 번도 물어본 일이 없다. 아니 당신의 난초그림에 대해서 화가와 평론가로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나는 오직 나타난 결과로서 그의 난초그림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짐작컨대 지하형이 당시 난초그림을 그린 것은 수도(修道)하는 마음이 제일 컸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때는 전두환 군사독재가 살아 있는 지성의 숨통을 죄고 있던 때였다. 세상은 지하형의 개인적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그의 용기있는 저항이 다시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시 지하형이 얼마나 육체적·정신적으로 병약한 상태에 있었는지 어렴풋이는 짐작해도 그 고통의 크기를 다는 모를 것이다. 거의 죽음의 고비를 넘긴 탈진 상태였고, 떠도는 말로는 지하형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는 걱정이 지인(知人)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 강퍅한 시절에 지하형에게 세상의 걱정을 잊고 심신을 조섭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약이 묵란이었던 것이다. 난을 치는 동안만은 그림의 삼매(三昧)에 빠져 자신을 잊고, 자신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묵란을 시작한 지하형은 1982년부터 자신이 그린 난초그림을 그리운 벗·후배·지인들에게 선물하기 시작했다. 실천문학사·창작과비평사의 편집실에도 보냈고, 민주인사라고 불리던 동지들, 문인 선후배, '딴따라' 후배들, 그 주위의 수많은 지인들은 지하형이 보내준 난초그림을 모두들 곱게 액자에 넣어 집안에 또는 사무실에 걸어놓곤 했다.
나도 1983년 겨울,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의 복권문제를 상의하기 위하여 원주로 지하형을 만나러 갔을 때 6분의 1절지 크기의 화선지에 그린 청초한 난초그림 하나를 받았다. 당시 지하형은 내가 원주로 방문하겠다고 한 전갈을 받고 미리 그려두었다며 서울로 올라가면 전해주라고 지하형의 미학과 후배와 민청학련의 내 친구들에게 보내는 난초그림도 몇 점 같이 봉투에 넣어주었다.
지하형이 그렇게 마음쓰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당신의 벗들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믿음과 그리움이 얼마나 강한가를 절감할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지하형이 난초 그리는 마음을 청나라 정판교(鄭板橋)의 그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판교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무릇 내가 난초를 그리고 대나무를 그리고 돌을 그리는 것은 세상의 수고로운 사람을 위로하고자 함이지, 세상의 안락한 사람에게 보이고자 함이 아니다.
凡吾畫蘭畫竹畫石 用以慰天下之勞人 非以供天下之安享人也.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