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이 현대에도 생활력이 있을까?
현대와 같은 잡탕 난리 속에서 난같이 전아한 수양이 생명력이 있을까?
대답은 거의 부정적이다.
그러나 나는 시도해보고자 한다.
현대문화의 과제가 바로 카오스에 침잠하면서도 동시에 카오스에서 빠져나오는 그 나름의 질서찾기이기 때문이다.
난이 그렇다.
세 가지 점을 들고 싶다.
첫째는 바람에 흩날리는 표연란(飄然蘭)의 새 가능성이다. 표연 자체가 이미 카오스인데 그렇게 혼돈하면서도 그 속에서 시달리며 새 질서를 찾기 때문이다.
둘째는 엉성하고 흩어진 기운, 즉 소산란(疎散蘭)이다. 소산 자체가 혼돈으로부터의 새 질서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태고무법을 지키는 몽양란(蒙養蘭)이다. 몽양은 일체 화의(畵意)를 거부하면서 한 획(一劃)에 쳐야 한다. 이 또한 그 나름의 새 질서다.
아니 질서란 말을 쓰지 않아도 좋다. 다만 나는 사란(寫蘭)에서 이 세 가지를 그저 좋아해서 그렇게 쳤다. 그러나 내가 조용하고 그윽한 정란(正蘭)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에 있어 사란은 혼돈란(渾沌蘭)과 정란 사이를 왕래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무슨 한 순간의 빛이 있어 난다운 난이 나올 때가 있다. 이 순간 때문에 난을 친다.
아마도 이것이 요즘 문자로 하자면 '카오스모스'가 아닐까?
단기 4334년(서기 2001) 11월 15일 일산에서
노헌(勞軒) 김지하 시(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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