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의 당 총재직 사퇴 이후 민주당 쇄신 방안의 구체적 면모들이 드러나면서 정가에서는 “정치발전을 위해 이제는 이회창 총재의 리더십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한 때”라는 지적이 대두되고 있다.
민주당이 스스로의 생존전략 차원에서라도 당내 민주화를 가속화하고 있는데 반해, 한나라당은 이 총재 독주체제를 더욱 굳혀만 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정치의 질적 발전이란 측면을 고려할 때 지금 시기 문제제기의 대상은 바로 한나라당의 지도체제와 이회창 총재의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3일 '민주당 발전과 쇄신을 위한 특별대책위(특대위)'는 "당 총재제도를 폐지하고 최고위원회의를 합의제 의결기구로 하는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고 공식발표했다. 또한 "원내총무 뿐아니라 앞으론 정책위의장도 원내총회에서 선출하고 두 사람 모두 당연직 최고위원이 되도록 하자는 의견이 많았다"는 설명도 곁들여졌다.
이뿐이 아니다. 지금까지 민주당 특대위가 검토중인 방안들은 대선후보 예비경선제, 국회의원의 상향식 공천제 등 획기적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앞으로 복잡한 당내 논의구도를 거치면서 얼마만큼 구체화될 것인지 아직은 미지수지만, 실제 이런 방안들이 채택된다면 ‘1인 보스 중심의 지역 붕당구도’로 요약되는 한국 정당정치의 근본 문제점을 상당부분 깨뜨리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한 이러한 방안들이 확정되어 내년 민주당 전당대회와 후보경선이 일종의 전국적 정치이벤트로 치러지게 될 경우, 현재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민주당 지지도를 끌어 올리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민주당의 특대위나 쇄신연대 등이 후보경선과 관련 획기적인 방안들을 추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회창 총재 향한 ‘해바라기 조짐’ 도처에서 발견**
반면 한나라당의 움직임은 상대적으로 너무 조용하다.
오히려 10.25 재보선에서의 압승, 그 이후 민주당의 쇄신파동을 거치면서 이회창 총재의 집권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고, 그에 따라 이 총재의 당 장악력이 더욱더 확고부동해지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심지어 이 총재 스스로도 지난달 19일 “요즘 우리 당에서 제일 경계해야 할 일은 국민들이 보기에 모든 게 다 된 것처럼 겸손하지 못한 자세로 보이는 것”이라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총재의 이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주변에선 “총재실이 청와대냐”는 지적이 터져 나올 정도로 지나치게 강해진 이 총재 독주체제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지난달 26일 한나라당사에서는 비명과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교원정년 연장 반대를 주장하며 당사에서 농성중이던 전교조와 대학노조 간부들을 경찰이 강제 연행하면서 터져 나온 비명이었다. 한나라당은 업무 방해를 이유로 이들 농성단에게 퇴거명령을 내렸고, 이에 불응하자 경찰을 동원한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 조차 다음날 언론에는 사회면 작은 기사로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이를 두고 노동계와 시민단체 등에서는 이미 집권당이 된 듯한 한나라당의 ‘오만함’에 대한 비난이 고조되었고, 이를 비판하지 못하는 언론의 ‘해바라기성’에 대한 질타도 터져 나왔다.
이뿐이 아니다. 지난달 21일 러시아와 핀란드를 방문하기 위해 출국한 이 총재를 수행한 언론사 취재장비에는 사진 위성전송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다. 야당 총재의 해외 방문 취재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순방 기간 내내 이재춘 주러대사가 ‘그림자 수행’을 펼쳐 구설수에 올랐고, 대사관의 참사관급 외교관들이 한나라당 수행 의원들의 단란주점 술자리까지 동행해 빈축을 샀다. 이 모두 “유력한 차기 대통령감에 대한 충성경쟁으로 보였다”는 것이 현지를 취재한 기자들의 소감이었다.
이처럼 이 총재가 ‘차기에 가까이 가고 있음’이 여러 측면에서 확인될수록 한나라당 내에서는 총재 1인 중심 지도체제가 확고해지고 있다.
***이 총재 독주에 대한 문제제기 줄곳 제기**
한나라당의 이 총재 독주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미 오래전부터다. 특히 지난 총선에서 김윤환, 신상우 전 의원 등 구 민정계와 민주계 중진들을 대거 공천 탈락시키면서 한나라당을 1인 지배체제로 공고화시켰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후 김덕룡 의원, 이부영 부총재 등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문제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 총재가 거대 야당 총재이자 확고부동한 차기 주자의 위치를 굳혀가고, 상대적으로 민주당과 여권이 분란에 휩싸이면서 이 총재 독주에 대한 비판은 점점 힘을 잃어가게 되었다.
실례로 이부영 부총재는 지난달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1인 지배체제에 대한 문제제기가 정권교체를 방해하는 것으로 곡해되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제기 조차 쉽지 않아진 상황’을 꼬집은 것이다.
사실 지난 92년, 97년 대선 당시에도 여권이 분열하고 변화했지, 야당은 김대중 당시 후보를 중심으로 강력한 1인체제를 구축한 바 있다. 따라서 권력교체기 여권은 뭔가 변화를 추구하게 되지만, 야권은 오히려 기존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하는 것이 일종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분석가들은 “그것은 3김정치라는 우리 정당정치의 역사적 특질을 반영한 것일 뿐,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며 과거와 똑같은 전철을 밟는 한나라당을 비판하고 있다.
정권교체가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절대명제로 치부되는 풍토 역시 문제다.
김덕룡 의원은 지난달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지역주의 정당, 1인지배정당이란 면에서 지금 한나라당으로의 정권교체는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박종웅 의원은 “지금 이 총재가 제왕적 총재를 하고 있으니, 대통령이 되면 천황적 대통령이 될 것”이란 말까지 했다.
***당권·대권 분리등 제도개혁 핵심쟁점으로**
이러한 정가 안팎의 지적을 종합할 때 이제 내년 대통령선거가 한국정치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한나라당에서도 뭔가 변화가 일어나야 할 것이라는 주문이 많다.
익명을 요구한 한나라당의 핵심 관계자도 “지금까지는 우리가 너무 신중했지만 이제 그럴 때가 지났다”며, “총재가 말하는 새정치가 뭔지 보여 줘야 할 것”이라고 공감을 표시했다.
지금까지 드러난 변화의 가능성은 두 방향으로 요약된다. 첫째는 당권·대권 분리, 집단지도체제 도입, 공천제도 개혁 등의 제도적 권력분산 방안이며, 둘째는 신규 인사 영입을 통한 당의 세력교체 추진이다.
당권 대권 분리와 집단지도체제 도입은 당내 밀레니엄위원회에서 1차 합의가 이뤄진 사안이며, 지난 21일 국가혁신위 정치발전분과에선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견제 방안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최병렬 부총재와 김덕룡 의원은 지난달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강조한 바 있다. 또한 박근혜 부총재도 2일 기자간담회에서 “김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는 민주적인 정당운영을 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야당도 공천문제, 1인보스체제, 당내 의견수렴 등에 대해 자발적으로 개혁하고 변화해야 한다”며 당권·대권 분리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회창 총재는 21일 “대통령제에서도 총리와이 권한분담으로 국정을 운영하면 (대통령이) 정당총재를 겸해 국회내 권력이 비대화되는 양상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일단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시대적 변화 추세와 당내 권력분산론자들의 동향을 감안할 때 앞으로 한나라당 전당대회까지 이 문제는 당내 핵심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30-40대 신진 전문가 영입작업 추진중**
다른 한편 신규 인사 영입작업도 은밀히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3일 “당에 구시대 인물(old guys)이 너무 많은데, 그 동안은 점잖게 단합 위주로 나갔지만 이젠 30-40대 각계의 전문가들도 다수 영입해서 총재 주변에 세우는 등 뭔가 달라진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당내 세력교체 계획의 일단을 피력하기도 했다.
“김문수, 이성헌, 김영춘, 원희룡 의원 등 젊은 이미지의 의원들과 지구당 위원장, 당내 참모급 등 우선 당내에서부터 30-40대의 역할을 강화하고, 외부에서 누가 봐도 ‘프로가 가더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각계의 전문가들을 영입할 계획”이라는 것이다. 그는 실제 영입작업이 상당 부분 진행 중이며 조만간 가시화될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당권·대권 분리 등 제도개혁, 신규 인사 영입 등 당내 세력교체가 조심스럽게 추진되는 조짐은 보인다. 하지만 아직 어느 것 하나 결론이 내려지거나 가시화된 것은 없다. 이 총재 자신의 권력독점 욕구, 그리고 당내 복잡다기한 세력분포는 이러한 변화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변화가 가속화할수록 한나라당의 변화 역시 강요되는 측면이 있다. 이 총재도 지난달 22일 러시아에서 “이제는 새 정치, 새로운 리더십이 변혁을 주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젠 이 총재가 말한 새로운 리더십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할 때인 것이다.
3일 김기배 사무총장은 “내년 5월 31일로 예정된 전당대회를 앞당겨 개최할 가능성이 있다”며 조기 전당대회설에 불을 붙였다. 내세운 명분은 월드컵과 지방선거와의 시기 중복이다.
그러나 이미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민주당 전당대회가 내년 3월 치러진다면, 일주일 정도 간격으로 맞불작전을 펼 것”이라는 전략이 짜여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민주당이 몰고 올 새바람을 가만히 앉아 맞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한나라당 전당대회도 많은 시간이 남은 게 아니다. 민주당에서 시작된 당쇄신 바람이 한나라당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