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 생물무기금지협정(BWC) 제5차 국제 회의장.
6년에 걸쳐 생물무기 근절을 위한 검증의향서 채택을 두고 지루한 협상을 진행해온 BWC는 최근 미국내 탄저균 테러를 의식한 듯 진지한 분위기 속에 개막되었다.
개막식 기조연설자로 연단에 선 존 볼튼 미 국무부 차관은 이라크, 북한, 시리아, 수단, 리비아 5개국을 탄저균, 천연두, 콜레라와 같은 세균무기 보유국으로 지목하고, 의심국가에 대해 강력한 국제제재와 조사를 명문화한 새로운 협정을 제안하는 기조연설을 함으로써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 연설과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나온 존 볼튼의 발언에 대해 서방언론의 반응은 냉담했다. 하루가 지난 20일 프랑스의 외무부 대변인 프랑소아 리바소는 "미국의 접근법은 우리와 다르다"며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판했다. 이 비판에 유럽과 중국도 공감을 표시하는 기사가 일제히 보도됐다.
5개국이 세균무기를 갖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그간 부시 행정부는 포괄적 검증체제를 강제규범화한 검증의향서 체결을 거부해 왔다는 이중적 태도가 문제된 것이다.
***美, 생물무기 보유국으로 이라크와 북한 지목**
그 대신 미국은 의심되는 특정국에 대해서만 검증과 규제를 강화하는 새 협정을 이번 국제회의에서 주장함으로써 다분히 일방주의 발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 5개국은 미국이 낙인찍은 테러 지원국이며 깡패국가들이다. 그러나 1995년 미 국방부의 ‘반확산 보고서’에서 세균무기 보유 의심국가는 17개국이나 된다.
BWC에 가입조차 안하고 있는 이스라엘도 미국이 지목한 생화학무기 보유국가다. 그런데도 이번 존 볼튼의 연설에서 이 5개국 외에는 언급이 없음을 볼 때 다분히 편파적이며 정치적이라는 의심을 초래했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존 볼튼이 “이라크와 북한이 가장 위험하다”고 말한 대목이다.
이 말을 두고 아프간에서의 전쟁에서 탈레반이 예상보다 일찍 무너지자 미국이 세균무기 위협을 명분으로 관심을 이라크와 북한으로 돌리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전쟁 이후 줄곧 미 국방부 월포위츠 부장관 등 강경파가 이번 전쟁을 이라크로 확대하자고 주장해 온 사실과 연관시켜 보아야 할 대목이다.
또한 1995년부터 미국에 의해 세계 3위의 생화학무기 보유국으로 낙인찍힌 북한에도 언제 그 불똥이 튈지 모른다는 것. 이 점에서 생물무기는 우리에게도 ‘강 건너 불’은 아니다.
그러면 최근 몇 년 동안 이 세균무기를 둘러싸고 한반도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이며, 그 실체는 무엇인가.
***미 정보기관, ‘한반도는 세균전 제1위험지역’***
1998년 9월 전세계 미군 중 가장 먼저 주한미군에게 탄저균 백신이 대량 공급되었다. 또한 같은 해 주한 미 공군기지에는 세균무기 탐지부대인 화생방방호중대 BIDS가 창설된다.
이 갑작스러운 조치는 한국 국방부를 매우 당혹스럽게 했다. 합동참모본부는 1997년 말 조직개편에서 정식직제인 화생방과를 아예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한미간의 정보판단에 차이가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미국의 북한 생화학무기에 대한 인식은 1998년 한미연합사 비밀문서, ‘한반도 정보판단서 98’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에서는 북한의 화학무기 비축량이 최대 5천톤으로 설정되었으며, 탄저균 등 세균무기는 유사시 1천톤 생산능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 문서에서는 전쟁 발발 초기에 북한 야포의 30%, 미사일의 50% 이상이 화학탄을 장착하여 발사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 정보문서를 토대로 그해 한미연합사에서 워 게임(War Game)을 실시한 바에 의하면 우리 병력의 18%, 전차의 10%, 야포의 5% 이상이 개전 초 북한 화학무기에 의해 타격을 입을 것으로 산출되었다(작전계획 5027-98, JICM 워 게임 분석).
이것은 북한이 화학무기를 사용하면 우리의 4개 방어축선 중 하나가 붕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방어전략이 크게 교란되는 것이다.
화학무기가 북한의 재래식 무기를 중심으로 투발되는데 반해 탄저균 등 세균무기는 북한의 10만 특수부대와 고정간첩에 의한 후방교란용으로 주목되었다.
‘정보판단서’에서는 북한의 탄저균 10kg이면 10일 이내 서울인구 절반이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상했으며, 천연두균은 10g이면 2~3일 이내 서울인구 절반이 감염될 것으로 판단했다.
이러한 미국 측의 정보판단에 영향을 받아 국방부는 1999년에 부랴부랴 화생방 방호사령부를 창설하고 제독장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없애버렸던 화생방과도 다시 창설했다.
그러나 70만 병력에 탄저균 백신을 접종하는 데는 매년 6천억원의 예산이 소요되어 포기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듯 한국에서 최우선적으로 세균전을 준비해 온 미국에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 있다.
***자국의 산업보호 위한 미국의 이중적인 對北정책**
첫째, 클린턴 정부 말기에 대북정책 재검토 결과 발간한 ‘페리보고서’에서 북미관계 개선의 선결조건으로 북한의 생화학무기를 거론하지 않고 핵과 미사일문제만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간 미국도 포괄적 검증체제를 명문화한 생물무기금지협정에는 난색을 표명해 온 사실과 연관지어 보아야 한다.
만일 이런 종류의 협정이 이행되면 미국 내 군사시설과 유전자 공학 관련 연구소도 국제사찰에 노출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의 유전자공학은 향후 10년 내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다. 이 산업기밀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미국내 시설이 공개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 상업적 이익 때문에 미국은 생물무기금지협정을 ‘이빨 빠진 신사협정’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더불어 국제관계의 핵심사안으로 생화학무기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둘째, 미국이 전세계에서 세균전 위협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한반도를 설정해 놓는 동안 미국 본토에서 탄저균 테러가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겪이다. 이번 미국에서의 탄저균 테러도 자국 내에서 배양된 실험실 수준의 세균 포자였음이 이미 드러난 바 있다.
따라서 이라크, 북한의 세균위협보다 더 시급한 것은 자국내 탄저균 테러라는 점에 더 일찍 착안했어야 한다. 그러나 전혀 그러하지 아니하였다.
사실 이제는 세계 어느 국가, 어느 지역이 특별히 세균테러 위협이 높다는 발상은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굳이 가장 위험한 지역을 꼽으라면 미국 본토다.
현대 유전공학의 발전은 가장 찬란한 빛과 가장 깊은 어둠을 동시에 제공한다. 그 빛은 인류의 건강과 풍요다.
반면 그 어두운 그림자는 유전자 조합에 의한 신종 탄저균, 콜레라균, 천연두균이며, 2015년경부터 현실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유전자 폭탄, 식물테러, 유전자 조작에 의해 전사(戰士)로 훈련된 개, 고양이가 될 것이다. 이미 미 CIA가 유전자조작 동물을 첩보전에 투입하고 있다는 외신보도도 있다.
컴퓨터 발달에 따라 해킹이나 바이러스 문제가 대두되었듯이 앞으로 이 문제의 위협은 심각해진다.
그 위험이 가장 높은 곳은 유전자공학의 기술이 가장 발달되고 일반화된 미국 본토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점에서 이번 존 볼튼의 발언은 여러 가지로 그 진실성이 의심스럽다. 현실성도 부족하다.
미국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북한 탄저균 위협의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고, 다자간의 협의를 통해 원만히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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