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위기에 처했다. 국가안위를 책임진 최고 정보기관의 간부들이 벤처기업 사기사건에 줄줄이 연루돼 옷을 벗는 치욕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김은성 전차장이 진승현.이용호게이트에 연루됐고, 김형윤 전경제단장은 정현준게이트에, 그의 부하인 정성홍 전경제과장은 진승현게이트에 연루, 이른바 ‘3대 게이트’ 모두에 국정원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정원이 물의를 일으킨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그 동안은 정치사찰이나 언론 개입, 도.감청 등과 같은 정치적 이슈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번처럼 국정원 고위급 간부들이 줄줄이 직접 ‘돈’에 얽혀든 경우는 전무후무하다.
그렇다면 국정원이 언제부터, 왜 이렇게 경제적 실리를 취하기 위해 ‘금융비리 게이트’에 연루된 것일까. 국가 최고정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관에서 무엇 때문에 이런 추문을 사전에 방지하지 못했던 것일까.
분석가들은 그 이유를 이번 사건에 연루된 몇몇 간부들의 개인적 잘못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훨씬 구조적인 배경을 짚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정원의 대북 기능 약화, 경제 기능 강화**
첫째 국정원의 위상과 기본기능에 혼란이 빚어졌다는 점이다.
분단 현실에서 국정원의 기본 기능은 대북 정보관리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안보에 있다. 그러나 햇볕정책으로 인해 대북 기능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저하되었다.
작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수행원 명단에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이 ‘특보’ 자격으로 포함된 데 의아해 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국정원장이란 고유 직함을 포기한 채 특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이상하고, ‘간첩 잡는’ 정보기관 총책임자가 김정일 국방위원장 옆에서 허리를 깊이 숙이는 모습도 자연스럽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김용순 북한 노동당 비서가 남한을 방문했을 때 임원장은 제주도로 어디로 그를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국정원은 현정부 들어 “간첩잡기를 포기했다”는 비난이 분출하자 작년 8월까지 민혁당 간첩사건 관련자 5명을 포함 모두 37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80년대 후반 연평균 11.4명, 90년대 김영삼 정권의 연평균 15.4명에 비해 저조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정원이 밝힌 숫자는 국정원과 기무사 등 전체 정보기관에서 검거한 간첩을 모두 합한 것이고, 연도별로도 98년 20명, 99년 15명, 2000년 2명으로 해가 갈수록 검거숫자가 줄어들었다는 데 유의해야 한다.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는 간첩 검거가 무의미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 역시 임동원 전국정원장이 정보기관 총책임자의 위치 보다 남북관계 창구 역할에 치중해 온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 국정원의 위상과 역할에 혼란을 초래한 것은 IMF 사태였다.
IMF가 터지자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이를 사전에 예측하지 못했다는 자체 반성을 토대로 국제경제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국정원내 경제팀의 위상과 기능을 강화시켰다.
실제 국가안전기획부를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국정원은 ‘탈정치’와 ‘국제경제정보의 창구’를 자임했다. 이종찬 초대 국정원장은 국제화의 상징으로 국정원내에 광개토대왕비를 실물 크기로 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위상 변화, 즉 대북 기능의 상대적 약화와 경제 기능의 강화가 단기간에 급속히 진행되면서 국정원 조직 전체의 위상과 기능에 혼선이 빚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 고위 간부들과 벤처사기꾼과의 뒷거래가 이루어졌다.
***정치인 원장 임명으로 ‘어정쩡한 탈정치’**
둘째 국정원 최고책임자에 정치인이 임명됨으로써 국정원 기능과 역할상의 혼란이 더욱 증폭되었다는 점이다.
국정원으로 이름이 바뀌기 전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국회내 안기부 분실문제로 정치적 중립에 중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른바 국회 529호실 사건이다.
1998년 12월 30일 한나라당 이신범 의원은 국회 529호실이 안기부 국회분실로 사용되고 있다고 폭로했고, 이어 야당의원들은 이방을 급습해 정치사찰 의혹을 제기할 수 있는 문건들을 폭로했다.
문건은 여야 의원 동향과 내각제에 대한 여야의 동태, 신당 창당 가능성을 거론하는 등 정치권 동향을 두루 담고 있어 정보기관이 여전히 정치권을 사찰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에 충분한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전화용 도청기가 발견된 것은 치명적이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안기부를 국정원으로 바꾸고, ‘탈정치’와 ‘국제경제정보의 중심’을 선언하는 변신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종찬의 국정원’은 다시 언론문건 사건이라는 중대한 사건에 봉착하고 만다. 이원장이 퇴임 후 여의도사무실에 보관 중이던 서류 가운데 중앙일보 문일현 기자가 작성한 ‘성공적 개혁 추진을 위한 외부환경 정비방안’이라는 이른바 ‘언론대책문건’이 공개된 것이다.
이 역시 ‘정치인 이종찬원장’의 과잉 정치관심이 빚어낸 사건이었다.
이원장 후임인 천용택 전원장 역시 정치인 출신이다. 천 전원장은 취임하자마자 정치정보 수집부서를 확대 개편함으로써 권위주의 시절로 회귀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언론단 신설도 국내정치 간섭의도라는 의혹의 대상이 됐다. 그로부터 국정원의 정치권과 언론 등 각계에 대한 정보수집활동이 활발해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탈정치’를 표방했지만 정치인이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어정쩡한 탈정치’가 되어버린 상황, 이 또한 국정원 전체 위상과 역할에 혼란을 빚었다고 볼 수 있다. 대북기능 약화, 경제기능 강화, 그리고 어정쩡한 탈정치, 이것이 현 정부 국정원의 모습인 것이다.
***특정지역 편중인사로 상호견제장치 작동정지**
셋째 특정지역 출신 인사들이 요직을 독점하게 되면서 상호 견제와 감시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번에 연루된 김은성 전 제2차장, 김형윤 전경제단장, 정성홍 전경제과장 모두 호남 출신이다. 게다가 김 전단장과 정 전과장은 국정원내 특정 지역 출신들로 사조직을 만들어 산행을 갖기도 했다. 국정원 직원들조차 “사조직이 있다는 사실은 물론 바로 옆의 직원이 여기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고 개탄했다.
이런 편중인사의 결과 사석에서는 ‘형님 동생’으로 통하는 특수 정서가 공적 관계를 무너뜨리고, ‘끼리끼리 봐주고 나눠먹기’ 풍토가 자연스럽게 조성되어 상호견제와 감시라는 공조직의 기본 원칙을 무너뜨려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일 지휘라인에 있는 세 사람 모두가 비리 게이트에 줄줄이 연루되는 비극적 사태가 빚어졌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론 이상과 같은 국정원 조직 전체 위상과 역할의 혼란, 정치인 국정원장 임명, 특정 지역 편중인사가 결합되면서 내부 보고체계와 시스템이 왜곡되었다는 점이다.
***자체감찰제도, 보고체제 등 시스템 전반 마비**
검찰에서 동방금고 이경자 부회장이 김형윤 전경제단장에게 5천5백만원을 주었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은 이미 지난해 12월이었다. 김 전단장은 그때 출국금지조치를 당하고 피의자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임동원 전원장은 이와 관련 기강문란으로 경고조치를 하는 선에서 그쳤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단장이 경제단장직에서 물러난 것은 신건 원장 취임 직후인 지난 6월이다. 문제가 터진지 7개월이 지나 신임 원장이 취임하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당시 비리 의혹에 대한 검찰 내사가 진행되었지만 국정원장에게 제대로 보고되지도 않았으며, 임 전원장이 대북문제에 전념하는 와중에 국내문제는 특정 파벌이 좌지우지했다는 분석이 국정원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더 나아가 김은성 전차장을 정점으로 하는 특정 파벌이 여권 핵심 실세에게 정보를 직보하거나 민주당 내부문제에 관여하기도 했으며, 따라서 신건 원장 취임 이후 국정원 업무 전반을 챙기기 시작하면서 김 전차장과 미묘한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는 주장도 정치권 안팎에서 거론되는 실정이다.
어쨌든 작년 12월 김형윤 전단장 비리 의혹이 알려진 이후 그가 인사조치된 것은 금년 6월이었고, 결국 구속된 것은 10월 11일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국정원 내부의 자체 감찰제도, 보고체제 등 시스템 전반에 중대한 이상이 발생했다는 것은 분명해 진다.
지난 16일 신건 국정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김은성 제2차장 사퇴에 따른 후임 인선 문제를 보고하면서 “일부 국정원 직원들의 기강해이 및 내부 갈등설에 대해서도 보고했다”고 전해졌다. 또한 조만간 국정원에 대한 인적 쇄신과 기강확립 등 위상 재정립을 위한 가시적인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예고되었다.
이는 청와대에서도 그간 국정원 내부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명백한 사례인 것이다.
이와 같이 국가 안위를 책임져야 할 국가정보원은 지금 조직 전체의 위상과 역할이 흔들리고, 정치인 원장과 정치적 파벌 등에 휘둘리며, 특정 지역 편중인사까지 겹쳐 심각한 시스템 이상을 보이고 있다.
고위 간부들이 ‘돈’을 쫒아 비리 게이트에 줄줄이 연루되는 치욕적 사태는 그 필연적 결과인 것이다.
연내에 단행될 것이라는 국정원 위상 재정립 조치가 어떻게 나타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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