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이인제 최고위원의 이른바 ‘음모론’ 파문이 일단락되었다.
처음 시작은 거셌다. 정무수석에게 “대통령을 똑바로 모시라”고 일갈했는가 하면 김대중 대통령이 소집한 최고위원회의에 “하늘이 두 쪽 나도 안 가겠다”고 역린(逆鱗)을 서슴지 않았다.
측근들은 한참을 더 나가서 “이제부터 청와대와 따로 간다”, “국민 상대로 정치를 하겠다”는 말도 곁들였다. 여당 대선후보가 되기 위해 청와대 눈치를 봤지만 이제부터 DJ와의 차별화를 통해 후보를 쟁취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이최고위원의 대담한 행보는 그러나 사흘을 넘기지 못했다. “음모론을 내가 말한 적 없다”고 슬그머니 몸을 빼더니 하늘이 무너져도 가지 않겠다던 청와대 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그의 이런 행보는 우리 눈에 익숙하다. 바로 11년전 3당합당 이후 노태우 대통령을 윽박지르며 ‘정권을 쟁취한’ YS의 행동을 빼어 닮은 탓이다.
이최고위원이 청와대를 공격하면서 YS식의 권력투쟁에 돌입했다는 평가가 한때 있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인제 최고위원의 정치입문은 YS를 통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YS를 ‘정치적 아버지’라 부른다. 이최고위원은 정말 YS식 정권 쟁취에 나서는 것일까. 현재까지 둘의 행보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타이밍과 여론편승을 통한 YS의 정권쟁취**
YS는 90년 1월 22일 민정-민주-공화 3당 합당 이후 그에게 가해지는 민정-공화계의 협공을 때로는 엄포로 때로는 행동으로 저항하며 집권당의 대통령후보를 차지했고, 결국 대통령선거에서도 이겼다.
그는 “정권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쟁취했다”고 기고만장해 했다. YS는 집권자를 향한 ‘헤딩’의 명수였고, 그만의 장기인 타이밍과 여론편승의 귀재였다.
3당합당 직후 소련을 방문한 YS는 박철언 당시 정무장관이 “나는 YS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는 것”이라고 격을 맞추고,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의 면담에 대해 노대통령에게 험악한 보고를 했다는 이유로 박장관의 사퇴를 요구해 관철시켰다.
그때 청와대 담판을 위해 그가 갖고 들어간 노란봉투에는 안기부의 YS에 대한 동향보고서가 들어 있었고, 그는 이를 토대로 노대통령에게 “당신들이 여당 대표까지 도청, 감시하느냐”고 따져 노대통령이 “안기부는 대통령도 도청한다”고 해명하며 진땀을 뺐다는 것은 YS의 입에서 뒤에 흘러 나왔다.
박장관을 거세한 직후 YS는 청와대 주례회동을 끝낸 뒤 “노대통령과 공작정치를 근절하는 데 합의했다”고 당당하게 발표했다.
3당합당 직후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한 ‘내각제 합의각서’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해 온 그는 90년 10월 내각제 문건이 공개되자 “국민과 야당이 반대하니 추진 못 하겠다”고 버텨 내각제를 무산시켰다.
또 노태우 대통령이 이동통신사업을 사돈인 선경그룹에 허가하려 하자 지방유세에서 “나도 가족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대들어 유보시키기도 했다.
때로는 무모하기까지 했다. 92년 3월 14대 총선에서 패하자 대뜸 “대선후보가 가시화되지 않아 졌다”며 책임을 청와대에 떠 넘겼다. 그러면서 부산을 휩쓴 민주계의 선전을 자랑하며 “부산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는 객기를 부리기까지 했다.
92년 9월 노대통령으로부터 민자당 총재직을 인수한 그는 기자회견에서 “대담하게 개각하겠다”며 당시 정원식 총리를 포함해 대폭 개각을 예고하는 만용을 부렸다. 대통령 고유 권한이라 할 인사권까지 건드린 것이다. 게다가 당시 정총리는 평양 고위급회담에 참석중이어서 남북회담 대표를 흔들었다는 따가운 비판을 받았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박태준 최고위원과 이종찬씨등 민정계의 치밀한 역공에 대해 ‘마산 귀향’과 ‘당무 거부’로 맞서 번번히 물리친 것 역시 기억에도 생생하다.
***이인제, ‘YS식 정권쟁취’ 가능할까**
이인제 최고위원은 일단 이번 파문 와중에서 나름대로 당권과 대선주자를 쟁취하겠다는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려 했으나 명분을 살리지 못하는 바람에 중도에 주저앉고 말았다는 게 중론이다.
우선 청와대를 공격하기 시작하고 음모론을 제기한 것까지는 그다운 행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재보선 참패에 따른 최고위원 일괄 사퇴는 국민정서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다. 정동영 최고위원이 무조건 사퇴를 주장하자 당내 소장파들의 호응을 얻은 것이 이를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위원 일괄 사퇴가 ‘국민 지지도 당내 1위인 이인제를 낙마시키려는 음모’라는 주장은 근거를 찾기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민심 이반에 책임지라는데 사표를 내면서 ‘음모’ 운운한 것은 국민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물론 음모론 다음에 “하늘이 두 쪽 나도 청와대 회의에 안 가겠다”고 함으로써 그가 이제부터 청와대와의 파워게임에 들어갔다는 인상을 줬다. 여권 안에서는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이인제가 이제부터 할 말을 하겠구나”라는 기대를 모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언행은 결국 객기로 끝나고 말았고 국민을 감동시키는데 실패했다. 국민적 공감대를 사는 이슈 부각에 실패한데다 3일 만에 청와대 회의에 참석키로 함으로써 스스로 존재를 축소시킨 것이다.
이최고위원의 실수는 여당 안에서 ‘퇴출 대상 1호’로 꼽는 권노갑씨의 등에 업혀 당내 입지를 다지고 대선후보를 차지하겠다는 기초적 전략 미스에서 출발한 측면도 있다.
소수파로서 어쩔 수 없기는 해도 각종 비리와 부정 의혹의 중심에 위치한 권씨를 후원인으로 함으로써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여권내 ‘인적 청산’에 반대하고 권씨를 옹호하는 퇴행적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YS가 같은 소수파였지만 ‘국민’이라는 방대한 여론을 상대로 호기를 부려 성공한 것과는 달리 이최고위원은 여론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아슬아슬한 행보를 해야 하는 운명을 자초했다.
게다가 그 역시 대세에 밀려 인적 쇄신에 찬성하는 입장으로 돌아섬으로써 ‘게도 잃고 구럭도 잃는’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최고위원의 최대 실수는 김대통령에 대한 로얄티를 의심받고 권노갑씨등 동교동 구파로부터 ‘믿기 어려운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는 점이다.
여권 안에서는 이최고위원의 개인적 득표력을 인정하지만 그가 후계자가 됐을 때 과연 ‘김대중이즘’을 계승하고 퇴임 후의 DJ를 보호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양론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청와대를 향한 ‘헤딩’으로, 그리고 후원자인 권씨에 대한 입장 돌변으로 “과연 그를 믿을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적 시각이 늘어난 것은 그에게 앞으로 큰 부담으로 남게 됐다.
그의 ‘정치적 아버지’인 YS가 ‘큰 게임’에 익숙했던 반면 이최고위원은 지나치게 미세한 변화에 신경질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대세를 요리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릇의 차이가 정치력의 차이로 나타난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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