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내홍사태에 ‘음모론’이 등장했다. 이인제 최고위원은 본인이 직접 ‘음모’란 말을 한 적은 없다고 하지만, 출처는 그 쪽이다. 최고위원 전원 사퇴로 이어진 과정에 모종의 ‘음모’가 있다는 것이다.
당 쇄신파동에 대한 수습책으로 1월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와 최고위원 경선을 실시하고, 대선후보는 7-8월 경에 실시하자는 안이 등장하자 그간 3-4월 후보경선을 주장해 온 이 최고위원 진영이 반발하는 모양새이다.
이 ‘음모론’을 계기로 한화갑, 노무현, 김근태 최고위원 등 다른 대선주자군들은 일제히 이 최고위원에 대한 공격에 나서고 있다. 내분수습을 위한 7일 최고위원회의에 불참하겠다면서 후보 조기 가시화만을 요구하는 것은 ‘자신만을 위해 분란에 빠진 당 수습을 방치하고, 대통령을 궁지에 모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그러자 이 최고위원도 측근들에게 ‘음모론’이 확산되지 않도록 신중한 처신을 당부하고, 청와대와의 갈등설에 대해서도 “최고위원직을 사퇴했으므로 (회의에) 갈 수 없다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며 진화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미 한번 터져 나온 ‘음모론’으로 인해 민주당 쇄신파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양상이다. 이인제 최고위원과 여타 후보군 사이에 후보 조기가시화를 통한 ‘후보중심론’이냐 당 우선 정비를 통한 ‘당중심론’이냐는 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이인제-동교동 구파 연대 깨지나?**
이러한 국면전환까지 초래한 ‘음모’란 과연 무엇일까.
이인제 최고위원은 동교동 구파와의 제휴를 통해 당내 지지도 1위를 고수해 왔다. 이번 당 쇄신파동이 권노갑, 박지원 등 동교동 구파를 겨냥하자 “대통령 중심으로 당이 단합해야 한다”며 사태진화를 위해 애써 왔다.
그러다 갑자기 ‘최고위원 사퇴, 청와대 회의 불참’이란 초강수를 두고 나온 것이다. 마치 대통령을 직접 상대로 승부수라도 던지는 듯한 형국이다.
믿었던 동교동 구파의 태도가 변한 것인가.
아직 그렇게 단정할 조짐은 없다. 다만 당 쇄신 파동의 수습과정을 한화갑 최고위원 등 동교동 신파가 주도해 가고, 이런 움직임에 대해 한광옥 대표 등 동교동 구파가 적극 저지하지 않는 데 대한 불만과 의구심이 이런 ‘돌출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한다면 앞으로 이인제 최고위원이 어떤 행보를 취할 것이냐는 동교동 구파의 자세에 달려 있다고 보인다.
그간 차기후보로 이 최고위원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던 동교동 구파세력은 쇄신파의 공세에 이어 이 최고위원의 반발까지 이중의 공세에 직면했다. 이제 태도를 명확히 밝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음모론’을 둘러싼 민주당내 국면전환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교동 신구파 간의 갈등, 동교동 신구파가 각각 그리고 있는 미래에 대한 전망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교동 신.구파 갈등이 문제의 본질**
민주당 한화갑 최고위원은 최근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동교동계가 아닙니다. 그들의 모임에 나는 참여를 못합니다.”
이뿐이 아니다. 한 최고위원은 얼마전부터 언론인들과 만나 거침없이 동교동 구파와 이들과 가까운 청와대 실세들을 비난했다. 나아가 이들이 대권주자로 밀고 있는 이인제 최고위원에 대한 불쾌함도 감추지 않았다.
한 최고위원을 핵으로 한 동교동 신파의 한 관계자는 차기 문제와 관련해 “권노갑씨가 이인제씨를 밀어 정권을 창출한다고 해서 권씨가 ‘과거청산’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착각”이라며 권씨와 이인제씨의 연대를 비웃었다.
그런가 하면 구파의 한 핵심인사는 “호남후보는 이미 배제된 상황”이라며 “정권을 야당에 넘겨주려면 무슨 짓을 못하겠느냐”고 한 최고위원의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었다.
동교동 신.구파의 분열과 대립은 두말할 것도 없이 ‘차기’ 때문이다.
권노갑씨 등 동교동 구파는 당내에서 대중인기도가 가장 높은 이 최고위원을 밀어 정권을 창출해야겠다는 것이다. 당내 기반이 협소한 이씨를 밀어 당선시키면 동교동계가 당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동교동 신파의 경우 선(先) 인적 쇄신, 후(後) 후보선출 전당대회를 주장하는 것은 우선 동교동 구파와 이인제 최고위원을 격리시키자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DJ의 의중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당대회를 개최해 특정인을 뽑으면 동교동 구파의 이미지 때문에 결국 본선에서 필패할 수 있다는 것도 이들의 주장이다.
***정권교체 이후 신상문제도 판단기준의 하나**
동교동 신.구파의 대선전략은 출발점부터 다르다. 겉으로 모두 정권재창출을 내세우지만 신파의 경우는 ‘야당할 각오로’ 대시하고 있는 반면 구파는 ‘후보가 누가 됐건’ 정권을 잡는 후보가 최상이라는 주의다.
여기에는 정권교체 이후 신상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판단이 기준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이를테면 구파의 경우 격렬하게 야당과 전쟁을 벌여온 세력이 주축이다. 그만큼 정권교체에 따른 위험부담도 크다.
반면 신파는 ‘최선을 다하되 안 되면 야당을 해도 그만’이라는 열린 자세가 엿보인다. 민주당 모 중진이 ‘야당집권, 피바람’을 예고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아울러 동교동 신파는 이인제씨가 대권후보가 된다는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정체성과 노선을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당선된다 해도 곧바로 DJ정권과의 결별은 물론 청산작업에 들어갈 것이므로 국민의 정부는 물론 민주당이 존속할지도 미지수라는 판단을 하고 있다.
오히려 호남후보이긴 하지만 한 최고위원이 출마해 낙선되더라도 민주당의 정체성은 유지되고 호남의 대변자로서 위상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신.구파의 관계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고, 서로 죽기 살기식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신안건설 박순석 회장의 전격 구속과 관련해 동교동 구파의 작품이니, 한 최고위원 고사작업이니 하는 설이 나돈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최고위원이 얼마전 공식회의에 앞서 자신에 대한 ‘도청.감청의혹’을 제기한 것은 공개적인 반격이기도 하다. ‘이성적’이란 평을 듣는 그가 기자들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도.감청 의혹을 제기할 경우 정권 자체가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는 정치자금과 관련해 “나는 한푼도 걷어 쓰지 않습니다”고 누군가와 차별화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김대통령의 선택에 모든 것 달려**
이렇듯 동교동 신.구파는 최근까지 명확히 대비되는 자세를 보여 왔다. ‘전쟁중’이란 표현이 무색할 정도다.
현 정권에서 차지한 위치와 역할이 다르다. 그에 따라 차기 정권이 야당에 넘어갈 경우 지게 될 정치적 부담 또한 다르다. 그래서 ‘차기 대통령’과 ‘차기 당권’을 바라보는 전략도 다르다.
신파는 한화갑 최고위원이 직접 대선에 나가서 떨어지더라도 당과 대통령의 퇴임 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구파는 한 최고위원의 출마는 필패이므로 그래도 승산이 있을만한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구파는 이인제 최고위원을 유력한 카드로 보아온 듯 하다. 그러나 최근 그 판단에 이상이 생길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음모론’까지 등장했다.
그렇다면 김대통령은 누구 편인가. 차기 후보에 관해 일절 언급이 없기 때문에 속단할 수는 없지만 정서적으로는 신파를, 현실적으로는 구파의 행태에 무게를 주는 양상이다.
김대통령의 의중이 영남 후보를 앞세운 호남정권 재창출이기 때문에 이인제씨도 배제될 수 있지만 영남후보가 떠오르지 않는 상황을 감안하면 권씨가 몰고 가는대로 이인제씨가 다수를 점할 수도 있는 환경이다.
다만 한씨가 김대통령의 정서를 대변하고 정체성을 지키는 노력을 얼마나 기울이느냐에 따라 상황은 유동적이다.
향후 김대통령은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그에 따라 동교동 신.구파는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가. 여기에 민주당의 앞날이 달려 있다. 이인제 최고위원의 행보 역시 여기서 결정될 것이다.
그 선택의 시기가 이번이 될 것인지, 아니면 일시 봉합되었다 추후로 미뤄질 것인지도 변수다.
김대통령과 동교동 구파는 가급적 그 시기를 미루려 하지만, 이번 ‘음모론’ 파동에서 보듯 이 최고위원 역시 무한정 기다릴 수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선택의 방향과 시기 둘 다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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