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대선은 끝내 한나라당과 민주당간의 전망 없는 양자 대결구도로 갈 것인가. 세 가지 변수가 있다.
‘민주당은 승산 없는 게임을 할 것인가’, ‘여야 개혁세력은 자신의 독자적 선택 없이 양자대결구도에 끌려갈 것인가’, ‘YS-DJ-JP는 이렇게 힘없이 쓰러질 것인가’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변수는 독립적이면서도 상호연관성을 강하게 갖는다.
이 세 가지 변수가 모여 하나의 결절점을 만들 경우, 反昌, 3김 연합의 중도통합세력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매우 위력적인 구도다.
3김이 ‘사즉생’(死卽生)의 자세로 모인다면, 그리하여 자신들을 밟고서라도 새로운 정치세력이 反昌 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허용한다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물론 이 구도의 변형된 형태도 가능하다. 새 정치세력의 진출 없는 3김 간의 정략적 연합이나 3김 연합 없는 새 정치세력의 돌연한 출현 등등이다.
어떤 시도이건 현재 강력한 대선후보 2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이인제 민주당 최고위원의 반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대통령은 이미 내 손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두 사람이 구도의 변화를 지지할 리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회창 총재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선거중립을 강요하고 나오는 것이나 이인제 최고위원이 최고위원 일괄사퇴에 대해 느닷없는 ‘음모론’를 제기하면서 DJ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런 류의 공방은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 왔던 것이고 따라서 다소 일찍 시작된다 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문제의 초점은 단연 개혁세력의 움직임으로 모아진다. 예상치 않았던 강도와 심도로 전개되고 있는 민주당 개혁파, 쇄신파들의 움직임이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지, 또 그 파장은 어디까지 미칠 것인지가 현 국면의 초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개혁세력의 행동이 민주당 내의 분란으로 그치지 않고 정략에 젖은 중앙정치권 전체에 대한 전면적인 쇄신으로 확산되어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보선 승리 후 짐짓 딴청을 부리고 있는 이회창 총재는 정치권 쇄신론의 물결이 곧 자신에게 밀어 닥치게 될 것을 알고 있을까.
***여야 개혁세력의 진로가 문제의 초점**
10여년에 걸친 실험이 끝나가고 있다. 군부독재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보수야당과 연대했던 재야 민주화운동이 여러 차례에 걸쳐 정치적 진출을 시도했던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때로는 민중당과 같은 독자세력화로, 때로는 민연추나 꼬마민주당 그리고 평민연과 같은 기존 정당과의 연대를 통해 시도됐다.
민중당의 실험은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 의원 등의 개별적인 신한국당 입당으로 끝났다. 그리고 지금 이들이 민주화와 개혁의 길로부터 얼마나 멀리 가 있는지 알만한 사람은 알 것이다.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는 또 다른 재야운동 출신 인사들의 고민과 어려움 또한 간단치 않다. 이부영, 김원웅, 서상섭, 안영근 의원 등이 사사건건 이회창 총재와 대립하고 당내 극우파들과 대결하는 것은 설사 그 이면에 이런 저런 정략적 계산이 있다손 치더라도 정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민주당내 재야 출신 인사들은 지금 어떠한가.
이들 이른바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의 입장에 서 있었던 사람들의 정치적 진출 또한 민중당 못지 않게 조직적으로 시도되었다.
몇 차례의 ‘집단적 동참’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제도정치권 진입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에 더 이상 인색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DJ가 대통령이 되고 동교동계가 ‘수평적 정권교체’까지 이룬 지금 재야 출신 정치인들의 미래지향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정치적 ‘은혜’, 누가 누구에게 베풀었나**
집권 동교동계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들이 배은망덕하게 운운....’하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므로 민주당내 재야출신 인사들의 현재와 미래는 그들의 문제임과 동시에 우리 모두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가 누구의 덕을 입었다’는 식의 언급이 나오는 그 순간부터 그 정치는 품격을 잃게 되지만 굳이 따지자면 DJ와 동교동계가 40년 한을 푸는 데는 두 세력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덕을 입었다는 점만은 분명히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재야 민주화세력과 JP세력이 바로 그 것이다.
DJP 후보단일화가 아니었다면, 또 재야의 비판적지지 세력의 DJ에 대한 ‘열광적 지지’가 없었다면 과연 DJ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겠으며 동교동계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겠는가.
‘은혜’ 얘기가 나온 김에 격은 좀 떨어지지만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고 넘어 가겠다.
의외로 많은 호남사람들이 이인제 민주당 최고위원으로부터 ‘은혜’를 받았다고 느끼는 듯하다. 그래서 이인제 최고위원에 대한 호남지역의 높은 지지도가 4년전 이인제 최고위원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의 성격이 짙다는 것인데, 만약 사실이 정말로 그러하다면 이인제 최고위원은 후보는 커녕 정치인의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의도된 은혜’의 보다 직설적인 표현으로 우리는 ‘공작’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은가. 이인제의 ‘은혜’에 대해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한번쯤 이런 문제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 보길 바란다. 왜 영남권에서 ‘이인제 학습효과’가 위력을 떨치고 있는 지도 함께 말이다.
***현상유지냐 현상타파냐의 갈림길**
민주당내 개혁세력은 한나라당내 개혁세력보다 훨씬 어려운 처지에 직면해 있다.
한나라당내 개혁세력이야 이회창 총재와의 인간적 유대가 깊은 것도 아니고 그로부터 정치입문의 ‘은혜’를 받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른바 ‘인간적 의리’와 ‘정치적 대의명분’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들의 고민은 간명하다. ‘이회창 대세론’을 현실로 인정하고 그 우산 아래에서 자신들의 정치생명을 연장해 갈 것인가, 아니면 이회창 대세론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대의명분에 몸을 던질 것인가’를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이 선택은 그리 어려운 것도 복잡한 것도 아니다. 논리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어떤 선택이 필요한지는 자명하다. 과연 실제 행동으로 옮기느냐의 여부만 남은 것이다.
반면 민주당내 개혁세력에게는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간적 의리라는 또 다른 변수가 따라 붙는다. 거기에다가 자신들의 대의명분이 反DJ로 편향되는 것은 피하고 싶다는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정치구도상의 복잡성이 뒤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들 역시 문제를 간명하게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문제의 본질은 결국 어떤 길이 역사적 대의에 충실한 길인가 하는 것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점에서 민주당 개혁세력의 선택 또한 ‘현실 추수냐 현실 타파냐’라는 선택의 문제로 압축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선택’이 논리적 선택이 아니라 역사적 선택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당사자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국민여론은 변화를 원한다**
이처럼 현재의 정치권 구도는 현상유지 세력과 현상타파 세력 간의 대결구도로 간명히 정리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이 글의 첫머리에 던졌던 질문을 다시 한번 해 보자. ‘내년 대선은 끝내 한나라당과 민주당간의 전망 없는 양자 대결구도로 갈 것인가.’
현정치권에 대한 극도의 불신, 절반 이상의 국민이 지지하는 정당, 지지하는 대권후보가 없다는 국민여론의 현실을 보자.
복잡한 논리조작을 피해 간명하게 얘기하자. 국민의 절대 다수가 부정하는 정치질서가 계속 유지되어야 할 것인가. 어떻게든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
이런 단순한 이유로 현 정치권의 답답한 구조를 타파하는 정치행동이 가시화될 가능성이 크다. 의도된 정치행동이건,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현상타파에 도움이 되는 정치행동이건 말이다.
그렇다고 의도하지 않은 정치행동들의 우연한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의도하지 않은 정치행동이 의도된 정치행동보다 더 결정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도된 정치행동이 있을 때 뿐이라는 것을 우리의 역사 경험은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야 개혁세력들의 향후 선택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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