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는 이회창 당선을 원했다"

<정치 어제와 오늘> ’97 대선 YS-이회창 화해시도 전말

YS와 이회창.
문민정부 시절 이회창을 발탁한 건 YS다. 이총재는 YS의 통치스타일을 비판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YS의 부름에 응해 대통령후보가 되었다. 선거전에서 당시 이회창 후보는 여당이면서도 대통령을 비판하는 차별화전략을 폈다. 결과는 패배.

그 이후 두 사람간의 관계는 항상 정가의 관심거리다. 다가올 대선에서도 YS가 반이회창 신당 창당에 나설 것인지, 아니면 결국 반DJ라는 공통 분모에 묶여 YS가 이회창을 돕게 될 것인지 여부는 대선 승패의 향방을 가늠할 정도의 중요 변수이다.

일단 YS-JP 신당 창당설이 나왔다. 이에 대해 이회창총재는 지난 17일 “현정권의 재집권을 돕기 위한 신당이냐”고 비판했다. “야당인 한나라당을 압박하고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기 위한 신당이라면 누구를 이롭게 하기 위한 신당이냐”는 말이다.

이에 대해 YS도 즉각 반응했다. "내가 직접 신당을 만드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며 일단 신당 창당설을 부인했고, 대변인 격인 박종웅 의원을 통해 “김대중씨의 대통령 당선을 도운 건 바로 이회창 총재”라고 비난했다.

양쪽 다 서로 상대방을 향해 ‘DJ를 도왔다’, ‘돕고 있다’고 비판하는 형국이다.

왜 YS가 지난번 대선 얘기를 들춰 가며 이 총재에 응수했을까. 김대중 대통령을 돕는다는 건 YS를 가장 자극하는 말, 그런데 이 총재가 바로 그 말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엔 몇몇 사람만 아는 비밀이 감춰져 있다. 지난 대선때 얘기다. 그 사연으로 거슬러 가보자.

***97 대선 이회창후보의 차별화전략**

1997년 대통령 선거. 이회창씨는 김영삼 대통령의 지원에 힘입어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그 시간부터 대통령과 차별화 했고 IMF사태와 함께 돌아섰다. 대통령을 매도하는 여당 후보였다. 그러나 고전의 연속.

선거 예비전 단계 때, 이 후보는 50%를 넘는 지지율로 김대중 후보를 압도한 확고한 선두주자였다. 그랬던 이회창씨가 지명대회에서 정식 후보로 지명된 직후 DJ 캠프에서 이 후보 두 아들의 병역문제를 제기, 공세를 시작하면서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50%를 넘었던 지지율이 8% 까지 내리 앉았다. 급기야 지명대회 차점자였던 이인제 측에선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진 상황이라면 후보 사퇴를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그러다 실현 안 되자 탈당, 반란출마의 길을 갔다.

선거가 공고되고, 선거 본선이 시작되면서 떨어졌던 지지율을 상당 부분 회복하긴 했으나 투표 10일전까지도 여전히 불안한 2위. 특히 제3의 후보였던 이인제 후보가 결정적인 걸림돌, 이대로는 패배한다는 우려가 높았다. 무엇인가 역전의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이때 여러 채널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도움을 받으라는 권고들을 보내왔다.

이회창 후보 진영에선 ‘청와대가 도움이 안 된다’ 혹은 ‘도와주지 않을 것’ 등 이런저런 얘기가 많았지만 최소한 김 대통령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득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설득력이 있었다. 결국 이회창 후보도 화해를 선택키로 했다.

이래서 투표 8일 전 이 후보는 YS 측근 A씨를 롯데호텔에서 만났다. A씨는 정치에도, 정부에도 간여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어서 첫 대면. 그러나 상황이 절박하고 긴박한 문제였기 때문에 정말이지 털어놓고 얘기를 나눴다. A씨는 이 후보의 대통령에 대한 인식을 물었다. 그리고 이 후보가 대통령의 도움을 원한다는 것을 확인하곤 성의를 다해 조언했다.

우선 김 대통령은 이 후보의 승리를 바란다는 말을 했다. “일부사람들, 특히 이 후보 주변에서 대통령이 이인제의 출마를 부추겼다느니, 이인제를 후보로 내세워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돕는 밀약이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건 터무니없는 모해고 상대진영의 함정에 빠지는 어리석은 내부분열”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YS는 이회창 후보의 승리를 바란다”**

이인제씨가 반란출마 한다는 보고를 받고 대통령은 이를 만류하기 위해 청와대로 불렀으나 그가 피해버렸다. 대통령은 여러 사람에게 이인제더러 출마하지 말라고 이르라는 얘기도 했다는 사실도 털어놨다. A씨는 그가 수십 년 지켜 본 YS 정치를 얘기하고 “그 어른은 당당한 정치를 하지, 결코 겉과 속이 다른 뒷거래 정치를 하는 걸 본 일이 없다”는 말도 했다.

다음 A는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DJ에게 뒤지는 것은 부산.경남의 지지율이 기대치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문제는 부산.경남의 지지율이다. 일부 사람들은 IMF 구제금융까지 겹쳐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으로 내리 앉았기 때문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안다. 물론 부산.경남에서도 대통령을 비난하는 얘기를 듣는다. 대통령 욕하는 사람 많이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는 욕도 하고 원망도 하지만 다른 지방 사람이 대통령을 욕하면 그건 싫어한다. 그게 부산.경남의 정서다. YS에 대한 사랑, 긍지는 깊다”고 역설했다.

A의 말은 계속된다. “부산.경남의 지지율이 대구.경북에 비해 낮은 것은 바로 당신 진영에서 대통령을 비하하고 욕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 대구대회 때 박세직 지구당에서 대통령 인형상을 만들어 대통령을 모욕한 ‘인형사건’은 부산.경남의 자존심과 긍지에 상처를 주었다. 당신 진영에서 대통령을 매도하고 뒤에서 다른 공작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니까 YS 지지자 중에서 ‘대통령은 이인제를 지지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 나고 있다. 바로 그게 문제”라는 얘기였다.

그는 이 후보에게 대통령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권고했다. 그는 대통령의 도움이 얼마나 큰 힘이 될 것인지, 대통령이 이인제를 돕지 않는다는 걸 확인시키는 일이 부산.경남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세세하게 얘기했다.

“저는 평생을 장사꾼으로 살아 정치를 모릅니다. 그렇지만 정치나 장사나 근본은 같은 것, 정치도 표 장사 아니겠습니까. 그 어른은 40년을 표 장사를 해 오신 분입니다. 표 장사로 성공한 어른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마십시오. 그 분의 마음을 움직이면 이 정도 표 차는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것이 A씨가 한 마지막 다짐 말이었다.

이회창 후보는 진지하게 얘기를 들었고 공감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의 얘기를 메모까지 해 가며 들었다는 것. 그래서 A씨는 청와대로 들어가 이회창 후보와 면담한 내용을 보고했다. 대통령은 처음엔 다소 의아스런 표정이었지만 면담 내용을 소상하게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이 후보를 도와야 한다는 A의 권고를 받아들인 것. 그 무렵 대통령은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 날 밤은 포도주를 혼자서 마시곤 편한 잠을 잤다고 했다.

***화해 시도 실패, 도리어 YS 비난 광고**

그런데 결과는 도리어 거꾸로 가고 말았다. A와 면담한 이틀 뒤 이회창 후보는 선거유세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향해 ‘당을 떠나라’고 외쳤다. 당에서 축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을 비난하고 당과 청와대가 절연하는 신문광고를 내보냈다. YS, DJ를 함께 싸잡아 비난하는 게 광고내용이었다. 득표를 위한 마지막 선거광고가 YS 비난광고였다. 무려 3일 연속 신문광고를 내보냈다.

그리고 투표. 결과는 패배였다. YS 고향 거제에선 이인제 후보에게 1위 득표를 내주었다. 부산.경남에선 일주일전 여론조사에서 나온 표의 흐름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게 이회창 후보의 패인이었다.

선거가 끝난 뒤 YS는 A에게 말했다. “그 때 나한테 도와달라는 얘기 안 해도 된다. 막판에 내 욕만 안 했어도 당선했다. 가만히 있었어도 되는 걸 공연히 까불어 떨어졌다”고 말했다.

여기까지가 지난 대선 막판 YS와 이회창 사이에 오갔던 화해 시도의 전말이다. 바로 이 대목이 ‘과연 누가 DJ를 이롭게 하는가’라는 YS와 이회창 사이 쟁점의 배경이 된다.

YS-JP 구상을 향해 이총재는 “YS가 DJ를 돕는다면 국민이 용납 안 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YS는 “이회창씨야말로 지난 대선 때 김대중씨를 대통령에 당선되게 만든 일등공신”이라고 되받았다. 바로 지난 대선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아직 YS-이회창간의 ‘앙금’으로 남았다. 이 앙금을 푸는 건 이 총재가 결자해지(結者解之)해야 할 과제, 그런데 이 총재는 이걸 안 했다. 할 기회가 있었는데 안 했다. 그래서 둘 사이의 벽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총재는 이걸 잊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