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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불씨 지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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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세상을 바꾸는 불씨 지피겠다”

‘가장 튀는 의원’ 한나라당 김원웅 집중분석

탈세 언론사주 비호 반대, 임동원 통일장관 해임 반대, 대북 쌀지원 찬성, 사립학교법 개정 찬성, 국보법 폐지 찬성, 헌법 영토조항 개정 찬성, 달라이 라마 방한 찬성,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

이상은 그간 우리 사회에서 굵직한 쟁점이 되어 온 사안들에 대한 한나라당 김원웅의원의 공식 입장이다. 소속당인 한나라당 입장과는 배치되는 것들이고, 상당수는 민주당 당론과 일치한다. 또 일부는 이 사람이 국회의원이 아니라 시민단체 대표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이뿐이 아니다. 국민학교라는 이름은 황국신민(皇國臣民)에서 국(國)자와 민(民)자를 따 온 이름이라며 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자는 교육법 개정에 앞장섰다.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9월 17일)로 변경하자고 요구했고, 이완용의 후손이 재산을 찾는 소송을 벌이자 ‘민족반역자재산몰수법’을 추진했으며, 간도땅을 되찾자는 ‘영토반환청구권’을 국회에 제기했다.

최근엔 미국의 아프간 공격에 대해 미국의 시각이 아닌 우리 시각으로 보자며 소속 당 총재에게 대들었고, 자신을 비판하는 동료의원들에게 ‘당신들 조국이 미국이냐’ ‘사대주의적 세력들이 민족주의자를 쫒아내려 하는 거냐’고 되물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나라당 김원웅 의원. 한마디로 ‘튀는 의원’이다. 아마도 여야를 통틀어 가장 ‘튀는 의원’, 그것도 진보 쪽으로 튀는 의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전력이 민주화운동 출신이거나 시민단체 활동가였던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정반대. 대학시절 한일회담 반대데모로 투옥된 경력이 있긴 하다. 그러나 1972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면서 곧바로 공화당 공채시험을 통해 공화당 당료생활을 시작했다. 민정당으로 이어져 90년 3당합당 직후까지 그는 20년 가까이 군사정권 집권여당의 당직자였다.

***"원죄가 있어 지금 더 원칙에 충실"**

그가 살아온 생과 요즘 그의 행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지난 18일 오전 의원회관에서 마주 앉자 마자 던진 첫 번째 질문도 바로 이것이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그건 나의 원죄다. 원죄가 있기 때문에 지금 더 원칙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리곤 “변명 같지만 여당 내에서 다른 당료들보다 가장 진보적이었고, 그래서 주로 청년국장 같은 보직을 맡았다. 과거 함께 당료생활 하던 정치인들 지금 많은데, 그 사람들은 나보고 ‘옛날부터 그랬다’고들 말한다. 다만 국회의원이 아니라 당직자였기 때문에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이념서적만 갖고 있어도 구속되던 85년에 이념서적 개방을 추진하자는 보고서를 만들어 당내에서 건의하던 차에 한국일보 모기자가 책상서랍을 뒤져 그 보고서를 유출, 보도하는 바람에 징계위에 회부, 파면 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고 했다. 또 87년 4.13 호헌조치 직후엔 국장단 회의에서 ‘호헌조치 문제 있다’고 발언했다가 역시 징계위에 회부됐지만 4.13 반대 시위가 거세지면서 유야무야 됐다고 한다. 여당내 반대가 훨씬 더 어려웠던 상황에서 자신은 반대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60년대 대학의 젊은이들은 윤보선과 장면으로 대표되는 야당세력과 박정희로 상징되는 군사정권 사이에서 고민이 있었다. 실제 63년 선거에서 보혁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윤보선이 보수.수구.냉전 쪽이었고, 박정희는 ‘민족’이란 단어조차 터부시 되던 당시 상황에서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그래서 심정적으로 난 박정희 편이었다. 또 하나 당시 야당엔 공채제도 같은 게 없었기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이상이 공화당 공채에 응한 배경설명이었다.

“그건 60년대 얘기고 당료가 된 건 유신 직전인 72년 아니냐”고 반문하자, “유신이 터지고, 민정당으로 이어지는 그 과정에선 내가 ‘생활인’이 되었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고 했다.

90년 3당합당 이후 야당으로 변신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때 ‘그동안의 내 고민을 털자’는 결심을 했다. 내가 의원급이 아니어서 신문에 1단짜리 작은 기사로만 났지만 당시 민정계 중에서 3당합당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내친 김에 “그럼 지금 민주화운동 출신 의원들의 정치행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물었다. 답은 즉각 터져 나왔다. “사석에서 만나면 ‘이런 식으로 하면서 수구세력 전위노릇 하려면 5.6공 때는 왜 민주화운동 했느냐’고 말한다”는 것이다.

***민정당 들어오려 한 야당.재야인사 있다**

“자기 소신이 있어도 현실 때문에 목소리를 내지 못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 그 사람들 가운데 지역주의정치, 맹주정치의 전위대를 자임하는 사람들까지 있는데, 그건 현실과 타협하다가 스스로 내면화되어서 자기주장이 되어 버린 것 아니냐. 이게 아쉽다”는 얘기였다.

“지금 활동 중이라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당시 내가 민정당 조직 쪽 일을 했기 때문에 아는데, 민정당에 들어오려 하다가 받아주지 않자 야당이나 재야를 한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오히려 ‘평생 야당만 해 왔다’고 더 강조하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수차례 캐 물었지만 끝내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여기까지 김원웅의원의 과거 경력에 대한 궁금증은 풀렸다. 공화당, 민정당 당료를 지낸 자신의 경력에 대해 ‘원죄’라고 인정하고, ‘생활인’이었기 때문에, 쉽게 말하자면 ‘먹고 사느라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를 펴는 김원웅 의원. 하지만 그 말보다는 ‘변명 같지만’, ‘자기합리화인지 모르지만’이란 전제 아래 ‘반대 목소리를 계속 냈었다’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는 얘기를 훨씬 더 오래 했다. 역시 그는 정치인이었다.

앞으로의 정치적 계획에 대해 물었다. 먼저 이회창 총재와는 자주 만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회창 총재가 ‘한나라당에는 이런 목소리도 있다’는 걸 내세우기 위해 김원웅 의원에게 ‘튀는 발언’을 계속하도록 방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총재와는 가급적 안 만나려 한다”고 했다. “나이 차이도 있고 또 당총재이고 해서 만나면 주로 총재 얘기를 들어야 하고, 듣다가 일일이 반박할 수도 없는 것 아니냐. 그래서 난 일단 다 듣고 나서 마지막 나오기 전에 꼭 한마디 내 입장을 얘기한다. 총재 앞에선 가만 있다가 뒤에 가서 딴 소리 한다는 말 듣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다 다음 공천 못 받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묻자, “공천 걱정 안한다”고 잘라 말했다. “14대 때 충청도 지역 전체에서 민주당 당선은 나 하나였다. 이번 16대 때도 대전에서 한나라당은 나 하나 됐다. 나머지 후보들은 2등도 아니고 다 3등이나 4등으로 떨어졌다. 지역에서 나한테 ‘당 보고 찍어준 것 아니다’고 말한다. 공천 못 받아도 무소속이나 다른 당으로 나가면 난 당선된다”고 덧붙였다.

***"다음 공천 걱정 안 한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지역 사람들은 민정당 때부터 내 논리가 바뀌지 않았다는 걸 다들 잘 안다. 이번 선거에서도 난 ‘한나라당을 개혁적 정당으로 바꿔내겠다’고 약속하고 표를 받았다. 그 공약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김원웅 의원. 정치인으로서 공천과 다음 당선 걱정 안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김원웅 의원이 유달리 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쯤 되면 당연히 따라 나올 질문이 소위 ‘개혁적 제3세력론’에 대한 생각이다. 김 의원은 이 문제에 대해 논리정연하게 정리된 생각을 피력했다.

“지역주의 3당 구도는 혁파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나라는 정당은 없고 단지 향우회만 있을 뿐 아닌가. 지금 여야에 개혁적 사람들이 40여명 이상 된다. 원내교섭단체 2개는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 영향력 면에선 17석짜리 자민련보다 못하다. 지역주의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제3세력 만들기는 어렵다. 각자 결단하라고 말할 수 없다. 15대 때 ‘꼬마 민주당’으로 선거에 나갔다가 다들 떨어지고 그래서 통추를 만들고 식당까지 차렸다. 하지만 힘이 없어서 다들 흩어졌다. 지역주의에서 떨어져 혼자 선거해 본 좌절이 주는 학습효과가 크다. 그래서 지금 같이 모이자고 못한다.”

“우선 각자가 현 상태에서 각자 당 개혁을 위한 가열찬 투쟁을 해야 한다.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호남지역이 희망을 갖도록 해야 하고 민주당이 집권해도 영남이 희망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탈바꿈 하는 노력이 절망적이라고 생각될 때는 각자 나와서 정치판을 깨고 새로운 정치세력 형성에 나서야 한다.”

“나는 그 불씨를 피우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불씨, 기득권층의 역사왜곡논리에 저항하는, 언제가 있을 미래에 대한 불씨를 피우고 있다.”

***"개혁정당 만드는 게 목표"**

여기까지 듣고 나자 김원웅 의원이 왜 그렇게 계속해서 튀는지 이해가 됐다. 아니 이젠 ‘튄다’는 표현을 쓰기가 거북해졌다. 정치현실이 워낙 척박해서 다른 의원들이 못하고 있을 뿐이지, 그가 자신의 소신을 거듭거듭 밝히는 것이 사실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점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국회의원으로서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정치인들은 대중적 인지도가 좀 높아지면 다들 차세대 얘기를 하는데, 그 차세대 얘기가 개혁세력 뭉치는데 장애가 된다. 그래서 난 좀 뜬다 해도 ‘차세대’ 하지 않겠다. 차세대 안하고 대중적 힘을 묶어 나가는 일 하겠다”는 대답이 나왔다.

확인삼아 “그럼 개혁정당 만드는 게 김 의원의 정치적 목적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민족문제에 투철한 개혁적 정당 만드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김원웅 의원의 홈페이지에는 ‘맑고 시원한 샘물처럼 신선한 정치’라는 슬로건이 맨 앞에 걸려 있다. 인터뷰 도중 “탄압에 저항하긴 쉽다. 하지만 유혹에 무너지지 않기는 차라리 어렵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도 대부분 변절했는데, 다들 유혹에 변절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그의 말처럼 ‘유혹에 무너지지 않고’ 소신을 끝까지 지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인 ‘민족문제에 투철한 개혁적 정당’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때는 우리 국민들도 ‘맑고 시원한 샘물처럼 신선한 정치’를 구경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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