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 보도된 후 많은 사람들이 검도부 코치의 포악성을 비난했고, 그의 심리상태를 의심했다. 하지만 정말 이 사건이 이례적으로 폭력적인 한 사람의 문제였을까? 한 친구가 직접 겪었다고 전해준 또 다른 이야기로부터 나는 이 사건이 단지 운이 없거나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혼자 몸으로 말썽꾸러기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을 키우던 엄마는 아이가 아빠 없이 나약한 철부지로 자라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제부에게 아이의 훈육을 부탁했다고 한다. 태권도 사범이었던 아이의 이모부는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이를 폭행했고 결국 그 아이도 매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런 일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주변의 남성들에게 아빠의 빈자리, 그 훈육의 빈자리를 의탁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보통의 아버지들은 어떠한가? 얼마 전에 가진 대학 동기 모임에서 친구들은 자식 키우는 고충을 늘어놓았다. 배울 만큼 배운 '386 세대' 아버지들은 처음에는 말로 알아듣도록 설득해보았지만, 결국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견디며 폭력으로 훈육할 수밖에 없더라고 했다. 자신들이 아버지로부터 겪었던 훈육의 폭력을 감동적으로 회고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자식을 때린 매로 자신의 종아리를 치며 눈물을 흘리는 아름다운 부정(父情)을 익히 들어오지 않았는가. 결국 대한민국의 대부분 아이들은 코치든 이모부든 아버지든 훈육자들의 폭력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검도부 코치와 이모부, 많이 배운 386세대 아빠들, 이들의 훈육은 얼마나 어떻게 다른 것일까?
▲ 학생 자살을 소재로 삼은 영화 <여고괴담5-동반자살> 포스터 |
훈육과 진정성의 폭력
아이가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할 정도의 폭력과 아빠들의 눈물을 머금은 폭력은 그 훈육의 진정성에서 크게 다를지도 모른다. 전자의 폭력이 남의 자식을 향한 화풀이일 가능성이 있다면, 후자의 폭력은 명실상부 진정한 훈육일 수 있다. 하지만 체벌이란 원래 피교육자가 상해의 위협을 느껴야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만약 그러한 위협을 느끼지 않고도 훈육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엄한 말과 경고만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경우다. 게다가 아이들은 처음에는 체벌을 두려워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체벌에 익숙해지고 체벌의 효과는 점점 더 감소하게 된다. 따라서 체벌의 강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질 수밖에 없고, 진정성의 폭력은 훈육자의 마음과 상관없이 언제나 폭력의 증가와 학대의 위험을 내포하게 된다.
1950~1960년대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쥐에게 전기충격을 주는 일련의 실험들에서 처벌의 강도가 클수록 학습의 효과도 커지며, 처벌의 강도는 처음부터 높은 수준일 때만 즉각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결과를 얻었다. 낮은 수준의 전기충격은 오히려 전기충격에 대한 쥐들의 내성만 키워 나중에는 높은 수준의 전기충격을 주어도 아무런 학습효과를 얻을 수 없었다. 이후 학교 장면에서 체벌의 효과를 조사한 연구들은 실제 장면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모든 체벌은 점점 더 강도가 강해지고 학대의 수준으로 발전한다는 결과에 도달한다.
훈육의 폭력은 그 진정성의 정도와 무관하게 아이를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의 폭력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이며, 오히려 훈육자의 진정성이 강하면 강할수록(미어지는 가슴을 더 강하게 움켜쥘수록) 아이들은 더 치명적인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 물론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훈육자들은 아이의 고통과 신음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성들이 그러하듯이 만약 스스로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져 버린 훈육자들이라면, 과연 그들의 진정성이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을까?
위험한 세상, 그 피할 수 없는 진정성의 폭력
우리는 진정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폭력들을 경험하고 살아왔다. 비단 부모와 교사의 폭력만이 아니다. 진정으로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총과 수류탄을 들게 했고, 진정으로 민중을 사랑하는 마음이 짱돌과 화염병을 들게 했고, 진정으로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스통을 들게 했다. 그들은 모두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들이다.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폭력을 쓸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언제나 더 큰 폭력과 위험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원하지 않아도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진정성의 폭력을.
아무리 폭력을 혐오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더 큰 폭력에 항거하는 정당한 폭력의 필요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사실 우리는 크든 작든 폭력의 은혜를 입고 살아왔다. 엄마의 잔소리가 없었다면, 선생님의 사랑의 매가 없었다면, 오늘날 나는 과연 이 정도라도 적응적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1980년대 청년 학생들의 화염병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 정도의 민주주의라도 체험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15세의 어린 죽음이 보여주듯 진정성의 폭력은 그 사랑하는 존재마저 앗아가는 끔찍한 관성을 지니고 있다. 자가발전하는 엄청난 가속도의 관성을 말이다. 아무리 큰 사랑과 진정성이라도 그 가속의 질주를 제어할 수 없는 때는 반드시 온다. 정의와 진정성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이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일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필요하지만 무서운 진정성의 폭력. 폭력은 진정한 것이든 아니든 살아 있는 사람을 사물로 만들고, 소중한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것은 폭력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끔찍한 폭력의 질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더 큰 폭력으로부터 사랑하는 아이와 조국을 지킬 것인가? 어떻게 진정성의 폭력은 그 진정성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모르는 그 진정성의 블랙박스
진정성의 폭력이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존재의 파괴를 향해 나아간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면, 문제는 어쩌면 간단하다. 진정성만 남기고 폭력을 버리면 된다. 하지만 만약 진정성이란 것이 필연적으로 폭력을 요구한다면, 진정성이란 원래 폭력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다면 문제는 아주 복잡해진다. 진정성은 스스로의 양심을 의미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진리를 향한 마음인 양심은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자기만의 마음속에 있으며, 오직 하늘만 알 뿐 어떤 누구에게도 드러내어 보여줄 수가 없다.
하늘과 나만 아는 나의 진정성은 때로는 신념으로, 때로는 이데올로기로, 때로는 신앙심으로 나타나고, 소수의 사람들과 그 진리를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공감대를 얻는 것은 극히 어렵고 또 그런 공감이 있었다 해도 대부분 완전한 착각일 때가 많다. 나의 간절한 사랑을 알아 줄 이는 나의 연인이 아니라 오직 나의 하늘뿐인 것이다. 모두의 하늘이 아닌 나만의 하늘. 그래서 사람들의 진정성은 늘 자신만의 세계에 온전히 갇혀 있게 된다(이것이 바로 근대적 주체들의 진정성이다). 하지만 진정성은 그 강도가 크고 순수할수록 더욱 더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한다. 사랑하는 아이를, 사랑하는 조국을, 사랑하는 민중을 향해…….
진정성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설득의 방식을 취할 수도 있고, 분신의 방식을 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이 혼탁할수록 설득은 어렵고, 분신은 무용하며, 침묵은 비겁하다. 모든 방법이 좌절되었을 때, 오롯이 자신의 양심과 가슴 속의 사랑으로만 남아있던 진정성은 결국 폭력의 형식을 빌려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이렇게 드러난 나의 진정성은 사랑과 진리의 산물이기 때문에 수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죽지 않을 만큼' 때려서라도 아이를 바로잡아야 하며, 성폭력을 통해서라도 그녀를 소유해야 하며, 계엄령을 내려서라도 전쟁의 위험을 막아야 하고,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무도 들여다보지 못하는 블랙박스 속의 진정성은 강하면 강할수록,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다른 사람의 오해나 비난이나 강제를 넘어 스스로를 실현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성이 가진 불행한 운명이다.
다시 15세 중학생으로 돌아가자. 아빠의 폭력이든 코치의 폭력이든 15세 남자 아이들은 그 폭력 뒤에 숨은 진정성을 알 수 없다. 오직 폭력에 대한 공포만 남을 뿐이다. 아이들이 폭력에 희생되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아 이 사회가 요구하는 적응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고, 그래서 그 훈육이 훌륭하게 실현된 경우에도 아이들은 아빠의 진정성을 알 수 없다. 다만 폭력에 대한 공포를 내면화하고, 그 공포에 굴종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울 뿐이다. 진정성의 권력이 폭력과 동의어가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아이들은 또 다른 자신만의 진정성을 가진 채 또 새로운 폭력을 행사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진정성의 윤리를 넘어 소통의 윤리로
우리가 먼저 버려야 할 것은 폭력이 아니라 그 갇혀버린 진정성일지도 모른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양심이 아니라, 아이들의 웃음에서 천국을 보고 밀양 할머니들의 눈물에서 지옥을 경험하는 귀도 얇고 변덕스러운 그 헤픈 오지랖이 필요한 지도 모른다. 진실로 진정한 진정성은 자신의 마음속이 아닌 바로 세상 속에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웃고 우는 그 얼굴 속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하늘은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가 대면해야 할 진정한 양심의 하늘은 한밤중에 몰래 고개 들어 응시하는 밤하늘이 아니라 바로 사람의 얼굴이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와 코치의 하늘은 바로 그 호기심 넘치는 아이의 웃음과 비명이며, 대통령의 하늘은 내 고향에서 살던 대로 그냥 살게 해달라는 밀양 할머니들의 절규여야 한다. 15세 중학생에게 규범이 아니라 인생을 가르쳐줄 수 있는 교사, 국민들에게 애국이 아니라 행복을 바라는 대통령, 살려달라는 비명에 귀를 닫지 않는 이웃들, 제 코가 석자라도 남부터 챙기는 모자란 사람들……. 강인하고 독한 갇힌 진정성이 아니라 이 물러터지고 모자란 소통의 진정성만이 우리의 아이들을, 우리의 할머니들을, 우리의 산과 강을 이 끔찍한 체제의 폭력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성의 폭력에 희생된 모든 약자들에게,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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