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만에 고국에 돌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 받은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의 항소심 첫 공판이 19일 시작됐다.
***송두율 항소심 "국보법으로 유지되는 자유민주주의는 문제"**
서울고등법원 형사6부(김용균 재판장)의 심리로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서 송 교수는 모두 진술을 통해 "지난 3월 1심 선고 뒤 독일방송에서는 '매카시가 인사를 전한다'는 자막을 포함한 논평을 내보냈다"며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가 입법적 권한이기는 하지만, 사법부도 열린 태도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판단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이어 "이 재판은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룩된 한국사회에서 앞으로 민주화가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재판"이라며 "1심 재판 최후진술에서 밝혔듯이 사회통합과 통일, 21세기에 걸맞는 '미래지향적 재판'이 돼 우리 시대가 더 밝고 올바른 길로 가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1> 송두율 교수
송 교수는 특히 재판부의 신문 과정에서 국가보안법에 대해 "남한에서 정말 자유민주주의가 철저히 지켜지면 국보법이 왜 필요한가"라고 운을 뗀 뒤, "오히려 국보법으로 유지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는 "북한의 개성공단이 열리고 왕래하는 상황에서 싸우면서 닮는다고 왜 바꾸질 못하나"라며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스스로 위축되고 자부심 못 갖는 것은 헌법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송두율 교수 한결 여유로운 모습으로 진술**
송 교수의 모두 진술에 이어 검찰의 신문과 변호인의 반대신문이 이어졌다.
1심에서는 검찰의 공격적 신문에 역시 공격적인 태도로 대응했던 송 교수는 이날 항소심에서 상당히 여유로운 태도로 조리 있게 답변을 이어가 눈길을 끌었다. 송 교수는 지난해 9월 귀국과 함께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 국정원, 검찰의 조사와 연이은 구속수감, 재판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피로했던 모습에서 벗어나 1심 판결 이후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이날 공판은 총 5시간 동안 진행됐으며, 재판부가 1시간가량 송 교수를 직접 신문해 눈길을 끌었다. 재판부는 "이 사건에 있어 재판부는 어떠한 예단을 하지 않는다"고 전제한 뒤, "일반인의 관점에서 궁금한 것과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묻겠다"고 말하고서 주요 쟁점에 대해 신문을 시작했다.
송 교수는 특히 재판부 신문에서 "73년 처음 방북 당시 노동당 입당 사실과 독일의 한국학술원을 운영하며 북한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한국의 실정법을 위반한 사실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송 교수는 그러나 정치국 후보위원 및 저서의 친북찬양 혐의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부인했다.
송 교수는 또한 신문 과정에서 김일성 주석과 면담한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으며, 황장엽씨와의 인연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기도 했다.
<사진2> 국보법 폐지 1인 시위
다음은 재판부 신문과 송 교수의 진술 요약이다.
***노동당 가입 문제: "노동당 가입원서가 내 인생 이렇게 지배할 줄 몰랐다"**
재판부: 피고인은 73년 처음 입북할 당시 북한에 대한 호기심 및 학문 탐구와 자료 수집 필요에 의해 방북했다고 얘기하고 있다. 당시 남한과 북한의 관계에서 한국 국적을 보유한 자로서 실정법 위반으로 인한 처벌을 의식하지 않았나?
송두율: 당시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한 유신체제였다. 유신이 계속되는 한 돌아갈 수 없다는 각오를 갖고 있었다.
재판부: 처음 입북하자마자 노동당에 가입하게 된 절차는?
송두율: 그 당시 초대소에 있는데, 과장쯤 되는 사람이 와서 입당원서를 주며 "생각해 보십쇼"라고 얘기해 "시간을 달라"고 대답했다. 그 때 당시는 이것이 내 삶을 앞으로 결정적으로 지배할 옥쇄가 되리라 생각치 않았다. 이틀 정도 남한에 있는 부모와 가족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그 당시 독일의 대학 동료 중에는 공산당 당원도 있었고, 독일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서울에서 몰래 가입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그래서 '입북시 다들 요구하나보다'고 지레짐작했다. 당시 입당원서에 가족사항을 기재하는데 외삼촌 두 분이 북한에 있다고 썼는데, 나올 때 쯤 외삼촌을 만났다.
재판부: 피고인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지만 피고인 나름대로 남한의 부모를 생각하고 고민한 것은 자유로운 의사 결정한 것이고 이후 노동당원 신분 취득을 인식했을 텐데, 단순 통과의례랑 배치되는 것 아닌가?
송두율: 수표에 사인하는 것처럼 가볍게 생각한 것은 아니고, 남한이 아닌 독일에 있었고,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입장이었으며, 심리적 갈등은 학문적 욕구에 의해 희석화됐다. 당원이라지만 당증이 있고 당비를 내며 활동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원서 쓰는 걸로 끝이었다. 북한 주민들은 입당절차가 까다롭다고 들었는데, 내 경우에는 북한에서 살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입당원서는 초대소 직원의 성과물 중 하나이지 않았나 싶다.
<사진3> 송두율-김일성 면담 기념 사진
***김일성 주석 면담: 김일성 "경제가 힘들다"**
재판부: 91년 5월 김일성 주석 면담은 어떻게 이뤄졌나?
송두율: 일정에 있었던 건 전혀 아니었고, 면담 전날 갑자기 얘기를 들었다. 윤기복 비서가 가자고 그래서 묘향산에 기차 타고 갔다.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
재판부: 아무련 이유 없이 면담 통보 왜 응했나?
송두율: 만날 기회가 있다는 데 흥분한 감도 있었고, 갑자기 통보 받는 것은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관례가 그렇다고 하더라.
재판부: 김 주석을 만나 무슨 얘기를 했나?
송두율: 제일 중요하게 얘기한 것은 독일 통일에 대한 얘기였다. 김 주석은 자기 정보를 확인하는 질문들을 주로 하며 "통일 됐는데 동독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이후 동.서독 주민간의 감정은 어떤가?", '경제문제' 등을 주로 물어봤다. 김 주석은 북한 현실에 대해서도 "경제가 힘든데..."라며 "구멍이 뻥뻥 뚫려 있다. 광물 파는 수밖에 없다. 제일 우수한 두뇌들이 모두 군수(軍需)에 막혀 있는데, 이들을 민수(民需)에 쓰면 우리 인민이 잘 살 수 있는데 안타깝다"는 얘기를 했었다. 식사할 때 자기의 빨치산 활동 얘기도 했었다.
재판부: 왜 만나자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나?
송두율: 처음 만났을 때 "송 선생 나이가?"라고 묻길래 "마흔 일곱"이라고 대답했더니 "아 늙지도 젊지도 않은 좋은 나이다"라면서, 자기가 84년에 동유럽 순방하던 얘기를 했다. 김 주석이 "동독에 갔을 때 호네커와 거리를 도는데 동독 사람들은 강제 동원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거리에서 박수를 쳐주는데, 폴란드 갔더니 군대를 동원했더라. '인민들이 싫어해서 그랬다'고 했는데, 동독은 다르더라"라는 얘기를 했다. 통일 얘기를 집중적으로 했고, 이밖에 브레즈네프를 만난 얘기도 했다.
재판부: 91년 5월 김일성 면담 이후에 94년 7월 장례식까지 해마다 북한을 방문했는데, 순수학술적 목적이라면 김일성, 김용순 등을 면담할 필요가 없지 않았나?
송두율: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없다. 북한에 가면 동포 원우회와 사회과학원에서 면담 등 일정을 짜는데, 그 사람들 나름대로 대접 차원에서 환영 식사를 같이 하는데, 그 자리에 부부장이 올 때도 있고, 비서가 올 때도 있다. 어떤 때는 일본 사람과 동석을 하기도 하고 외교적으로 식사를 하는 것 같더라.
***북한 지원금 수수 문제**
재판부: 북한에서 독일에 있는 한국학술원 지원비를 공식 회계처리했나?
송두율: 공식 회계처리 했어야 하는데, 학술연구원을 운영하던 김길순 박사가 간암으로 귀국하는 바람에 연구원이 법적으로 해산한 상태라 여의치 않았다. 당시 1만5천권의 한국 관련 서적이 창고에서 쌓아뒀었는데, 그대로 썩혀 둘 수 없어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성과가 좋지 못했다. 그래서 91년 북한에 갔을 때 이런 사정을 얘기하니 윤기복 비서가 "생각해 봅시다"라고 말하더라. 그 후 독일 북한 주재국을 통해 1만달러, 5천달러씩 지원 받아서 연구실 집세와 책장, 도서 분류 기구 구입 등 운영비에 썼다. 유지하는데 1달에 1천2백달러 정도가 들었고 책을 사 모으는데도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아 흄볼트 아시아 재단에 기증했다. 당시 아시아 재단에 한국 연구소만 없었다. 지금은 훌륭한 한국 연구 및 자료실로 이용되고 있다.
재판부: 교통비조로 2만달러를 받기도 했는데
송두율: 공식행사 초청은 보통 초청자가 경비를 부담한다. 북한 말고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그 외에는 70년대 2번, 80년대 2번 다 합쳐서 1만달러 정도를 받았는데, 가면 마지막 날 수행하는 사람이 인삼주와 함께 봉투를 찔러 넣어주고 그랬다. 비행기 타기 직전에 받아 돌려주지 못한 적도 있다.
***정치국 후보위원 문제, "김철수 후보위원 기재는 오류"**
재판부: 김일성 장례식 참석할 때, 이익대표부에서 김철수라는 장의위원 명의로 초청했나?
송두율: 처음에는 "강의 때문에 안된다"고 거부하다 "가야 한다. 장의 위원에 들어있다"고 해서 가게 됐다. 그 때 김철수라는 가명을 처음 들은 것이다. 그 전에는 김철수라 불린 적이 없었다.
재판부: 김일성 주석 면담 과정에서 정치국 후보위원 선임됐다는 얘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와 같은 사실 들은 적 없나?
송두율: 전혀 없다.
재판부: 피고인의 저서인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를 보면 장의 위원 명단에 김철수가 포함 돼 있는데 본인의 가명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같은 책에 정치국 후보위원으로도 명기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송두율: 70, 80년대 미국 자료에 근거해 당 서열을 정리했는데, 그 외에는 자료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가 90년대 장의 위원 명단이 유일했다. 그런데 김기남 비서가 최고 비서임을 감안해 김기남 보다 위는 정치국 위원, 아래는 비서로 귀납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렇게 기계적으로 분류하다 보니 오류가 있었다. 내가 당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도 아니다. 당시 한겨레신문사에서 도표나 통계 같은 자료를 넣는 것이 독자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연락이 왔는데, 도표나 통계를 컴퓨터로 입력하는 것에 미숙해 유학생을 시키는 과정에서 '장의 위원'을 '장례 위원'이라고 오기가 나는 등 오류가 있었다. 도표에 빠진 사람도 있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했다면 (김철수를) 빼던가 했겠지만 도식에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나중에 중앙일보 북한전문기자가 와서 "장의 위원을 정치국 위원으로 판단한 것은 잘 못 됐다"고 내게 비판하기도 했다. 동국대 박순성 교수도 내 잘못을 지적한 바 있다. 내가 기술할 때 잘 못 기술한 것이다. 김철수가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기재된 자료는 없다.
<사진4> 송두율vs 황장엽
***황장엽과의 만남: "황장엽 혼자 1시간 동안 주체사상 얘기해 기분 나빴다"**
재판부: 황장엽씨를 두 번 만났다. 누구 요청으로 만났나?
송두율: 북측에서 주선했다.
재판부: 주체사상 강의 요구는 누가 했나?
송두율: 그 쪽에서 계획 짜는데, "오늘은 황 비서가 만나서 담화를 하자고 한다"고 하더라. 황장엽씨가 1시간 동안 줄곧 자기 얘기만 했는데, 솔직히 기분이 나빴다. 담화를 하자면서 자기 얘기만 그렇게 하는 것은 서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인상이 안 좋았다. 황장엽씨는 "송 교수가 주체사상을 모르고 지식이 없어 강의를 해달라"고 내가 먼저 요구했다고 그러는데, 말도 안된다. 두 번째 만남은 좀 나았다. 황장엽씨는 여전히 자기자랑을 했지만 분위기는 좋았다. 천체 물리학 얘기도 하고, 주체사상 얘기는 많이 안했다.
재판부: 한길사 발간된 저서에 수록된 '주체사상' 저술 청탁은 누가 한 것인가?
송두율: 한길사 원고는 한길사측에서 청탁해 쓴 것이다. 북한에는 뛰어난 철학자 3명이 있다. 김일성종합대학철학부장 김영춘, 주체사상연구소 실장 박승덕, 주체과학원사회학연구소 소장 이성갑 이렇게 세 사람인데 이들은 러시아, 일본 책 통해 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비교적 얘기가 된다. 황장엽씨와는 전혀 대화가 안됐다. 기본적으로 그 세 사람은 나와 학문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막스 베버(Max Weber)가 어떻게 연구되나?"는 등 논문 얘기를 했다. 내가 "어디서 읽었냐"라고 물으니 "일본 번역서를 읽었다"고 대답하더라. 그래서 서구 현대 사상에 대해 슬쩍 집어주고 그런 식이었다. 그 때 내가 "당신들 주체사상 교과서는 있냐?"고 물었더니 "쓰고 있다"고 하더라. 이후에 이들이 주체사상을 인권, 평화, 종교 등의 개념으로 확장해 새롭게 해석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쓴 한길사 원고는 5부를 복사해 위 3명의 학자들에게 주고, 한 부는 황장엽씨에게 나머지 한 부는 송모 철학자에게 줬다.
재판부: 주체사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나?
송두율: 사투리가 갖는 생명력이 있듯이 변방 자체가 갖는 생명력이 있다. 노벨상을 수상한 루마니아 출신의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가 비슷한 얘기를 했다. 정체성을 지키는 데는 사투리밖에 없다. 그러나 폐쇄적인 상황에서는 그 자체로 자폐증이 될 수 있다. 세계화된 주체, 주체화된 세계는 남과 북에 던져지는 화두다.
재판부: 유럽에 체제하며 주체사상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하지는 않았나?
송두율: 한 번도 없다. (주체사상은) 구라파 철학에서는 이해 안되는 '사투리'다.
<사진5> 송 교수 석방대책위
***내재적 접근론 문제, "남과 북은 서로 자기 속의 타자로 봐야 통일 가능"**
재판부: 내재적 접근론은 타자 시각과 선험적 기초를 버리고 다른 사회를 관찰해 냉전적 시각 바꾸는데 기여했다고 한다. 그 이념적 토대에서 평가하자는 것은 주체사상을 옹호하고 북한 체제를 합리화한다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송두율: 독일에 유명한 팔십 가까운 나이의 아랍 전문가가 있다. 그는 가톨릭이지만 아랍 이해는 정확하다. 아랍세계를 내재적으로 드러내서 서방세계가 이해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그가 이슬람 사람은 아니지 않나. 내재적 방법론 있어서 그 방법은 객체 연구 분석인데, 거리감 인식 못할 때는 '찬양하는 것 아니냐'는 1차원적 이해를 할 수 있다. 장자(莊子)와 혜자(惠子)의 일화 중, 장자의 "물고기가 잘 노는구나"라는 말에, 혜자가 "너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가 잘 노는 줄 아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장자는 "너는 내가 아닌데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아느냐?"는 것이 있다. 단, 해석학적 자비심은 경계해야 한다. 서구에서는 제3세계에 대해 좋게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어 비판 받고 있다. 따라서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남과 북은 자기 속의 타자로 서로를 봐야 통일을 이룰 수 있다. 결국 내 속의 타자로 인식해야하는 긴장이 필요하다. 서로가 남이라 생각하면 어떻게 통일하나. 결국 우리 현실을 볼 때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기본적으로 이해 대상의 조직과 경험세계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70년대 소련과 중국을 연구하며 2만장 이상의 데이터를 정리했다. 북한에 관해서도 내가 국내.외 전문가보다 낫지 않나 생각한다.
***북한체제 옹호 문제: "미국적 가치가 보편적 가치는 아니다"**
재판부: 주체사상의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는데, 피고인 저서 요약물을 살펴보면 역기능 측면 언급이 없는데, 주체사상의 모순과 문제점에 대한 비판은?
송두율: 가령 주체화와 세계화에 대해 보자면, 세계화는 나로부터 시작한다. 국경도 없어지고 정치.경제. 사회적 세계화가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 고전적인 국가 개념을 갖고 있다. 통일은 동시화와 비동시화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그 복잡한 것을 너무 단순하게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으로 빨리 처리하려 한다. 조그만 남북 테두리에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재판부: 북한 사회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서 볼 때, 수령제, 1인 지배, 권력세습, 핵 문제, 인권 상황 등 부정적이고 비판적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송두율: 북한이 현재 처한 실상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보편적 가치가 있는가부터 물어야 한다. 미국적 가치가 보편적인가. 불행히도 분단이 안고 있는 그런 관계보다는 관점을 넓혀 나를 중심으로 비교해서 본다. 남북 공동 보편성을 개발하는데 가까이 가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황장엽 귀순" "북한 망하는 줄 알았다"**
재판부: 97년 황장엽씨의 귀순 요청을 언제 어떻게 알았나?
송두율: 당시 유학생이었던 유시민 의원이 전화해줘서 알았다.
재판부: 피고인은 황장엽씨의 귀순 요청이 있고 이틀만에 김경필 주재원을 만났는데.
송두율: 나도 궁금했다. 당시 북한은 경제위기, 수해 등으로 불안한 상태로 알고 있었는데, 독일에서는 황장엽씨 망명을 두고 '맑스가 망명했다'는 식으로 충격적인 사건으로 보도했다. 그래서 오늘, 내일 북한이 망하나 궁금했다. 황장엽씨 개인적 인연도 있어 호기심에 김경필을 흄볼트대 카페로 불러 만난 것이다.
재판부: 황장엽이 남한에 가서 피고인의 친북활동 및 당원 신분을 노출하는 것을 우려한 것은 아니가?
송두율: 황장엽씨가 나에 대한 비밀을 아나 모르나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은 김경필이 하는 말이다. 황장엽씨는 인문 철학자일 뿐이다.
재판부: 북한에 축전 및 메시지를 보냈다.
송두율: 의례적인 내용이었다. 보내달라고 요청하면 몇 가지 문장만 바꿔 보내주곤 했다. 당시 97년 통일학술회의가 지속 여부를 두고 난항을 겪을 때 절박한 심정으로 축전이라도 보내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보낸 것이다. 노동신문에 나온 축전 등은 자기들 형식에 맞춰 보도하는 것이다.
***독일내 한국단체의 친북편향성" "87년 양김 분열 보고 정이 떨어졌었다"**
재판부: 독일에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 '한국학술연구원', '범민련 유럽본부' 활동을 했는데.
송두율: 87년 12월 공식적으로 모든 활동을 관뒀다. 양김이 분열해 망하는 모습을 보고 정이 떨어지고 희망이 없어져 학술활동에만 전념했었다. 범민련에는 소설가 황석영씨와의 인간관계 때문에 나가봤다. 그러나 저녁때 지인들과 술 마시고 그게 전부다.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한 건 민건 정도다.
재판부: 그런 단체들이 표방하는 목적과 달리 북한에 기울이 있는 친북 편향적 단체는 아닌가?
송두율: 민건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자료를 구할 정도다. 친북 편향성과 관계없다. 당시 유신투쟁을 다짐한 유학생들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각오를 갖고 시작한 것이다. 얼마전 서울에서 30주년 기념행사가 열리는 등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나름대로 정직하고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 자리의 검사님은 87년 6월에 어디 계셨나? 80년 광주를 외국에서 보고 피눈물을 흘리며 긴 세월을 보냈으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37년만에 귀국해 7개월간의 구치소 생활을 하고 있다.
<사진6>귀국 당시
***귀국을 결심하기까지: "2~3일 조사 받으면 될 줄 알았다"**
재판부: 귀국당시 몇 일 체류 예정이었나?
송두율: 2003년 9월 22일 귀국해 10월 13일 돌아갈 예정이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 철학회가 공식 초청했기 때문에 세미나 주제 발표, 전남대 명예박사 학위 수여 및 기념 강연 등의 일정이 예정돼 있었다. 당시 한국에 한 번도 와보지 못한 아이들이 학업을 마치고 각자 미국과 스위스로 가기 전에 2주일의 시간이 있어서 마지막 가족 여행을 하기 좋은 기회라 생각했고, 아내는 한국을 떠난지 나보다 1년 더 됐었다.
재판부: 귀국하며 형사처벌을 예견하지 않았나?
송두율: 올 때만 해도 노동당 입당 문제 등 심각하게 생각 안하고, 조사도 2~3일 받고 사실관계만 확인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언론이 십자포화를 날리고,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 같은 사람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나름대로 구치소에서지만 한국에 있으면서 탄핵 정국과 선거 등을 지켜보며 몇 십년 동안 밖에 있다가 한국을 압축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이 사회는 살아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재판부: 처음부터 과거 친북행적들에 대해 노동당 입당 사실부터 적나라하고 진솔하게 밝힐 생각은 없었나?
송두율: 올 때 영사 2분이 변호사 입회할 수 있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실제 와보니 변호사 입회가 불가능 했고, 시차 적응이 안돼 매일 밤샘 조사를 받는 셈이었다. 또한 그 당시 법적인 용어를 모르던 상태로 내 처지가 너무나 처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었다. 어느 날 조사실 화장실에 거울이 없는 것을 보고 '자해 하지 못하게 거울이 없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사진7> 구속수감 당시
***"정치국 후보위원 절대 아니다"**
재판부: 피고인은 해외에서 친북활동 있었고, 실정법 위반 행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나?
송두율: 두 가지 점에 대해 분명히 반성한다. 첫째, 노동당 가입 문제다. 실정법 위반을 인정한다. 둘째, 독일에 있던 한국학술원을 운영하기 위해 북에서 돈을 받은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을 준수하겠다. 구치소에 수감됐을 때 한 독자가 '대한민국 헌법' 책을 보내줘 입감하자마자 읽었다. '헌법은 제대로 돼 있는데, 왜 이런 상황에 처했나' 많은 생각을 했다. 헌법 정신에 따르자면 하위법(국가보안법)도 그에 따라야 하는데 말이다. 법조인은 아니지만 사법부도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37년만에 고국에 돌아와 폭풍을 맞았지만 안팎에서 많은 사람들이 편지를 보내와 '고통 있더라도 그 고통으로 인해 이 사회가 더 밝아지지 않겠나'라고 격려해준다. 독일 친구들은 '7개월간 고문을 받고 있는데, (한국이) 그런 값어치가 있는 나라인가'라고 묻기도 한다. 그러난 난 고국으로 돌아왔다. 국가보안법이 '국제 스탠다드'에 맞도록 변화되길 바란다.
***"남한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사회라면 국보법 왜 필요하겠는가?"**
재판부: 피고인은 대한민국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다짐했다. 우리 헌법은 자유 민주주의를 근간 이념으로 한다. 그러나 6.15 공동선언 이후로도 북한은 여전히 헌법 지탱하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위협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고 본다. 피고인은 분단된 한반도 통일을 위해 노력을 해왔다고 자부하는데, 그런 입장에서 북한을 보는 관점은 무엇인가?"
송두율: 남한에서 정말 자유민주주의가 철저히 지켜지면 국보법이 왜 필요한가. 오히려 국보법으로 유지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북한의 개성공단이 열리고 왕래하는 상황에서, 싸우면서 닮는다고 왜 바꾸질 못하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스스로 위축되고 자부심 못 갖는 것은 헌법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본다. 어제 한겨레신문을 보니 우리 사회의 지향으로 '북유럽형 복지사회'가 거론되더라. 우리는 어떻게 그런 사회로 갈 수 있고, 한국적 맥락에서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중국의 15년뒤, 일본의 15년 뒤를 보고 한국의 15년 뒤를 봐야하는데, 한국의 시야가 너무 좁다는 느낌이다. 헌법 자체는 얼마나 좋은가. 법의 이념이 미래지향적이고 현실화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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