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에 의해 봉쇄된 지 27일째인 5월 1일, 마침내 팔루자가 열렸다.
5월 1일 아침, 검문소 앞에 도착했을 때, 전날과 다른 풍경이 있다면 미군 대신 이라크 국기를 팔에 단 이라크 군대가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수백명의 난민들은 미군이 아니라 이라크인이 검문소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자 두려움과 경계심이 일단 다소 누그러진 분위기였다. 그러나 타고온 자동차를 버리고 걸어서 팔루자로 들어갈 수 있다는 방침이 내려졌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곳저곳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수백 명이 팔루자 사람들은 차를 버리고 그동안 개미 한 마리 지나다지 못한다고 말해질 정도로 굳게 봉쇄되었던 고향을 향해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1일, 팔루자 봉쇄 풀려**
4월 30일, 미군은 팔루자에서 철수 준비를 했다. 전날 29일 미군 지휘부와 전직 이라크 장성들이 29일 만나 팔루자 합의안을 도출했다. 미군 대신 후세인 정권 하의 바트당 고위장성이었던 자셈 무하마드 잘리가 '팔루자 보호군' 사령관으로 등극, 30일 현지 방송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은 앞으로 팔루자의 치안을 1천명이 넘는 이라크군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5월 1일, 검문소 앞에서 만난 팔루자 난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미군 대신 팔에 이라크 깃발을 단 이라크군이 그들과 맞대니 직접적인 적개심의 표출 등은 자연히 자제됐고, 미군 탱크는 멀찌감치 떨어져 팔루자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차피 작전권은 미군이 있지 않느냐"는 비관적인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다.
또 검문소 앞에서 기다리다 지친 문들 무한넷씨(40세)는 "우리는 지금 팔루자를 가려고 한다. 그동안 미군이 우리를 못 가게 하더니, 오늘은 이라크 군대가 우리를 못 가게 한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곧 이어 걸어서 갈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걸어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교전이라도 벌어지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며 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가족들을 차에서 내리지 못하도록 했다. 지난 전쟁의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 역력했다.
5월 1일, 사람들이 빠져나가 유령도시처럼 된 팔루자에 사람들이 들어가 가장 먼저 한 일들은 죽은 가족과 친척들의 시신을 거둬, 묘지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그동안 시신들은 땅에 묻히지도 못하고, 20여일이 지나도록 방치되어 있었다. 팔루자 열린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공동묘지로 쓰이는 축구경기장에는 4백여구 이상의 시신들이 옮겨졌다. 이곳으로는 부족해 또다른 새로운 공동묘지가 만들어졌고, 그곳에도 하룻동안 2백여구 이상이 묻혔다. 그동안 방치되어 부패되고 있던 시신 6백구 이상이 이날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아이들까지 자원해 시신 처리. 2일 묘지에 이장된 사망자만 8백여명**
땅에 묻는 것이 하루라도 시급한 사정이라 아이들까지 자원하여 봉사자로 마스크를 쓰고 정원에 아무렇게 있는 문드러진 시체를 꺼내 묘지로 이장하는 작업에 함께 하는 장면은 차마 눈을 뜨고 보지 못할 정도였다. 팔루자 사람들이 연일 검문소 앞에서 팔루자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 것도 죽은 가족들을 두고 제대로 묻지도 못하고 못하고 피난을 떠나왔기 때문이다.
5월 2일 오후 4시, 갑자기 만들어진 축구경기장 묘지를 책임지고 있는 성직자는 "총 6백여구 이상이 묻혔다"고 밝혔다. "새로 만들어진 공동묘지에도 2백여구 이상이 묻혔고, 아직도 피난갔던 사람들이 다 돌아오지 않는 상황이고 이곳으로 옮기지지 못한 시체들도 아직 많다"고 말했다. 이 숫자만으로도 사망자 수는 8백명을 훨씬 웃돈다.
그리고 이번 전쟁피해는 폭격에 의한 것이 대다수라서 아직도 건물 잔해에 깔려있는 시체는 수거하지 못한 상태이고, 그리고 지나가는 차량에 미사일 공격을 한 경우는 그 시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망자수는 발표된 숫자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5월 2일까지 묘지에 이장된 숫자만 해도 8백명 이상이다.
특히 5월 2일, 한 사원 앞에는 폭격되어 전소된 자동차가 두 대나 있었는데, 사람들은 죽은 가족이 형체도 없이 사라진 그 자동차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하루종일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50미터도 안되는 거리 안에서 총 4명의 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마흐멧씨(26세)는 "오늘 팔루자에 들어왔다. 부모님과 삼촌이 이 차 안에 타고 있었다"며 그저 새까맣게 타버린 차옆을 떠날 줄을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세 사람의 시신이 고스란히 차안에서 죽은 것이다. 약 30미터 떨어진 거리에 전소된 또 하나의 자동차 안에는 여자가 한명 타고 있었는데, 미군의 공격에 의해 흔적도 없이 타버렸다. 시체도 없는 그 빈좌석에 굶주린 개가 하루종일 앉자 사람들이 쫓아도 으르렁거리며 차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11일에 한 집에 25명이 죽어있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단 한명의 생존자가 있었는데, 대여섯살쯤 보이는 아이가 살아있었다.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응급처치를 했는데, 아이는 다섯시간 후에 죽었다. 그곳은 하일 아스카리 지역이었다."
이걸 증언한 후세인은 26일간의 전투 중에도 목숨을 걸고 의약품과 구호품을 전달하기 위해 세번이나 팔루자로 들어왔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바그다드 사람이었지만 팔루자 현지를 잘 알고 있어, 미군의 검문을 피하는 길을 통해 들어왔고, 5월 2일 그는 당시 팔루자에서 함께 그의 구호작업을 도왔던 팔루자 현지 사람의 집을 방문해 그의 생사를 확인하자, 부둥켜 안고 눈시울을 붉혔다.
***"미군 저격 무서워 아버지 시신 봐도 옮기지도 못해"**
"거리에 아버지가 죽어 누워있는데, 아이들이 아버지를 시체를 눈으로 보면서도 무서워서 집문 밖을 나가지 못했다. 생각해봐라. 얼마나 끔찍한가. 나 또한 두번째 방문한 날에는 옆집에 있는 그 아이들의 안타까움을 알았지만 시체를 옮길 엄두를 못냈다. 모든 모스크에는 첨탑이 있다. 그 꼭대기에 미군 사격수 두명이 사정 거리에 있는 움직이는 모든 물체를 쏘는 걸 보는데, 누가 나갈 수 있었겠는가?"
그는 그날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가 생사를 함께 한 친구를 만나 얘기를 나누는 10분동안에도 비행기에 의해 폭격이 가해지는 폭발음이 가까운 곳에서 정확히 4번 들렸다. 그리고 더 짧은 간격으로 열번 이상의 폭발음이 들렸다. 팔루자가 열리는 첫날인 5월 1일에도 미군이 완전히 팔루자를 빠져나가진 않았다. 오전 11시에도 시내에서 교전이 있었고, 이튿날인 2일에도 여전히 팔루자 외곽에서는 미군에 의한 폭격이 계속 있었다.
5월 2일 팔루자는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난 모습은 아니었다. 저항세력 무자헤딘들이 총을 들고 거리 곳곳에서 보초를 서고, 지붕 위에서도 경계를 늦추고 있지 않는 모습이었다.
텅비어 있는 거리와 다 무너진 건물과 집 앞에서 망연자실한 사람들의 모습. 전쟁 후의 모습은 처참했다. 40명이 한꺼번에 죽었던 압둘 아지즈 알-사마라이 모스크는 완전히 파괴되어 중장비가 동원되어 그 잔해들을 치우고 있었다.
또 하이-나잘 지역을 지나치다 들른 한 민가는 총 수백발의 총탄으로 건물 벽은 벌집이 돼 있었고, 지붕은 몇 번의 폭격으로 인한 것인지 셀 수도 없이 구멍이 몇 개나 나 하늘이 훤히 보였다. 이 폭격으로 집을 지키고 있었던 한 사람만이 희생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피난을 가 있어 다행히 희생자는 적었다. 도대체 빈집을 왜 이렇게 벌집으로 만들어놓은 것일까?
"인샬라"라고 인사하는 주인은 그 이유에 대해서 "모른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희생당한 여성.아이들의 이름이 '학살'임을 말할 것"**
이번 공격을 지휘했던 미 해병대 대대장 브레넌 바인 중령은 도시시가전에서 따르는 불가피한 군사작전이었다며 "지독한 전투였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분명히 해둘 것은, 이런 걸 두고 군사작전이라고 하지 않는다. 학살이라고 일컫는다.
축구장을 가득 메우고도 묻을 자리가 없어 한 구덩이에 네다섯 구의 시체를 함께 묻기에 바쁘고, 그래도 묻을 자리가 없어 새로 만들어진 공동묘지로 가 비석을 쓸 틈도 없이 굴러다니는 돌 위에 죽은 자의 이름을 쓸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이유가 도데체 뭔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묻혀지진 않는다.
돌 위에 쓰여진 그 이름들이 이제 말을 할 것이다. 아이들과 여성들의 이름들이 "학살"이었음을 말할 것이다.
이번 전쟁으로 희생을 당한, 그리고 20여일이 넘는 시간동안 그 죽음마저도 갇혀 울음을 삼켜야만 했던 모든 이들의 명복과 위로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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