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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과 공감, 연대는 우리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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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과 공감, 연대는 우리의 힘

[민교협의 정치시평]<23> 무엇이 떨어져 나가는가?

수많은 세포가 모여 장기를 이루고, 여러 장기가 모여 제대로 작동하는 신체는 건강하다. 균형 잡힌 식사와 더불어 대사 작용을 촉진하기 위한 꾸준한 운동은 건강한 몸의 필수조건이다. 반드시 병원체에 감염되지 않더라도 균형 잡히지 않은 식사나 운동부족이면 우리 몸은 점차 이곳저곳 아픈 곳이 등장하고 결국엔 전체적인 몸의 통합성이 사라져 건강함을 잃게 된다. 최근 난치병은 외부로부터의 특정 원인체에 의한 질병보다는 균형을 잃고 스스로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공격하는 구조로 전환되어 버린 자가면역질환 등이 대표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식으로 몸이 점차 쇠약해지면서 결국 큰 병이 되어 나타날 때 처음에 탈이 나는 부위는 몸에서 가장 취약한 부위나 장기부터 그 위험신호가 감지된다. 거창한 증상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사소하고 작은 증상이 가장 약한 부분에서 나타나 고장이 나다보니 일반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대로 방치하다가 어느덧 그런 상황이 쌓이면서 결국 몸 전체의 건강함을 잃게 된다.

사회도 마치 사람의 몸처럼 수많은 이들이 모여 다양한 이해집단을 이루고, 그 여러 집단이 모여 각기 맡은 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건강함이 유지되는 유기적인 구조다. 다양한 집단의 균형 잡힌 역할과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 흐름이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데에 중요하건만 종종 균형과는 거리가 있는 치우친 상황이나 흐름이 계속될 때 점차 사회의 건강함을 잃으면서 무너져 간다, 역사상 많은 사회가, 국가가, 문명이 그렇게 사라져갔다.

불행히도 우리사회에서 크고 작은 그런 징조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아니 무척 많다. 크게는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을 필두로 해서 역사교과서 문제도 그렇고, 국민보다는 정파싸움이나 당리당략에 세월 보내는 정치인과 권력과 재벌의 눈치만 보는 사법인, 언론 기능을 잃은 조중동이라는 변종 국내언론, 심지어 위안부 문제를 포함해 과거 반성은커녕 뻔뻔한 자기변명을 계속하는 이웃나라마저 집단자위권을 확보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최소한의 권리인 전시작전권마저 반환 연기를 요청하는 정부가 있는 한 우리사회가 건강해질 리 없다. 심지어 대통령마저 적극적으로 국민을 속이는 데에 앞장선 것은 4대강 운하작전 때만도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단지 인간과 사회의 유사성이라기보다는 사회를 좀먹어 병들게 만드는 크고 작은 징후와 통증에 대해서이다. 개개의 사안으로 본다면 용산 사태로 무고한 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경찰청장이 오히려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추천되고, 이념 몰이나 개인 신상 털기의 황색 선전으로 국회의원이나 검찰총장이 제거되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양심을 지킨 수사과장에겐 경고, 권력에 쓴 소리를 하는 지식인은 표절 등으로 매도되는 것은 기본이 되었다. 이는 가진 자가 불법과 편법을 통해 더욱 가지려는 행태에 불과하지만 이미 우리사회를 망가트릴 정도의 상황이 구조화되어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사회가 구조적으로 그 건강함을 잃었을 때 그 사회나 집단 내에서 가장 힘없고 취약한 사람들이나 집단부터 무너진다. 마치 병이 시작된 몸에서 가장 취약한 부위부터 서서히 증상이 나타나는 것과 유사하다. 병든 상황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는 데 그 영향을 직접 그리고 가혹하게 받게 되는 사람이나 집단, 계층은 그 사회에서 지원과 배려가 누구보다도 필요한 가장 취약한,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 된다는 점이다. 근본적 책임이 없는 비정규직과 저소득층에 사회 소외계층이 우선적으로 병든 구조의 희생물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

그런 면에서 특정 사회의 건강성은 그 사회의 취약층을 바라볼 때 알 수 있다. 그들에게 기본적인 생활 보장이나 권익이 사회적으로 보호되고 있는지 아니면 그들이기에 오히려 더욱 소외되고 착취되어 사회 부조리의 희생양으로 등장하는지이다. 물론 우리사회가 이상적인 유토피아가 아닌 이상, 모든 계층이 아무 문제없이 누구나 만족하고 대립이나 갈등 없이 지속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크고 작은 갈등이 있고 특정 집단만이 이득을 취하는 상황으로 인해 사회 구성 집단 간의 건전한 균형이 어느 정도 깨지더라도 통합적인 사회 모습에 영향이 없을 때라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잘못된 상황을 특정 집단만의 개선점으로 받아들이면서 수용해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잘못된 모습을 특정 집단 내지 계층의 문제라고만 생각하는 중에 그 위험신호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덧 구조적으로 되어 시나브로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사회를 치료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사회 통합성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몸의 가장 약한 부위부터 그 치명적 독소에 의해 하나 둘씩 병들어 고장 나 쓰레기로 버려지듯이, 실제 병들어 쓰레기로 버려져야 할 자나 집단은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힘없는 취약한 자들이라는 것 하나로 다른 집단의 탐욕의 대가의 희생양이 되어 사라져간다. 어차피 어느 정도 가지고 있거나 위치에 있는 이들은 그 작은 기득권으로 인해 그 대가를 치루지 않아도, 그들의 영향으로부터도 조금은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엉뚱한 행동이나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나름 자신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하면 살아간다. 다만 그런 선택이 다른 이들과 공유되지 않아 엉뚱하게 보일 뿐이다. 개인 선택의 근거가 각자의 합리성이라고 할 때, 종종 이런 타인과 공유되지 못하는 개인의 주관적 합리성은 그가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의 누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남이 이해하기 어려운 그만의 고유한 합리성은 그가 살아온 삶의 역사성에 근거한다.

사회나 집단에서도 교과서나 책에 등장해 가르치고 공유될 수 있는 합리성과 더불어 이런 주관적 합리성이 작동하고 있다. 기실 특정사회의 역사성에 근거한 사회 고유의 합리성이야말로 그 사회의 흐름을 조절하는 실제적인 힘이다. 지금은 황당한 중세 때의 마녀재판도 당시 사회에 있어서는 합리적이었을 것이고, 지금도 벌어지는 특정 문화권의 명예살인이나 일제와 분단의 역사 속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말도 안 되는 종북 운운의 이념 논리가 여전히 한국사회에 작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21세기 우리사회 고유의 암묵적 합리성은 불행한 우리사회의 근대역사에 뿌리 내리고 있어서 친일과 친미를 통한 기득권 유지 집단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

불행히도 지금 이런 불합리한 합리성 때문에 우리사회의 취약층이 거리로 내몰리고 자살을 강요당하고 있다. 사람의 몸에서도 그렇지만 병든 원인에 대한 근본적 치료가 힘들 때에는 대증요법을 실시해서 우선 구조적 상황의 영향에 의해 그 존재가 부정되기 시작하는 약한 부위에 대한 보강을 시도한다. 그렇지 않고는 몸의 건강성과 통합적인 회복이란 이루기 어렵다. 내 문제가 아니라고, 어쨌든 우리 집은 그럭저럭 산다고, 나는 조금 있다고 사회의 자신 일부가 단지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에 떨어져 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때, 아니 단지 힘없고 약하다는 것 하나로 떨어져 나가는 한 부분을 너희는 왜 그리 못났냐고 비난하면서 진정 병든 곳을 바라보지 않을 때, 어느덧 병든 합리성은 스멀스멀 내 온 몸을 감싸 스스로를 치료불능으로 만들고 나 자신이 사라지게 된다.

편안한 집에서 있지 못하고 거리에서, 산 속에서 외치는 강정 주민이나 밀양 주민이 과격한 사람들인가. 사회가 일차적으로 지원하고 돌보아야 하는 약한 집단이 기득권 강화를 위해 생긴 병든 사회 구조의 영향을 가장 크고 빨리 받는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라면, 건강하고 건전한 사회를 위해서라도 떨어져 나가는 다양한 취약 부분에 있어서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볼 필요는 없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필요하다. 역사성이 담긴 이 사회의 병든 합리성을 고친다는 것은 이 사회의 진정 합리적이고 사회약자와 함께 하는 또 하나의 합리성을 쌓아가는 것이다. 지금 내 몸에서 무엇이 떨어져 나가고 있는가를 살피면서 내가 이 사회의 무엇이 되어 무엇을 향해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내 디딜 것인가를 일상의 자리에서 실천할 때, 너와 나의 삶의 역사가 쌓여 이 사회의 새로운 역사성은 만들어 진다. 아픔과 공감, 그리고 연대는 우리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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