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이라는 배우가 이토록 사람들의 마음속에 순결하게 다가설 줄은 짐작이나 했을까 싶습니다. 이병헌 주연의 <달콤한 인생>에서 악한 백 사장 역을 그야말로 싸늘하게 연기했던 그가 이와는 전혀 다른 농촌의 순박하고 진실한 청년의 모습을 그토록 다정하게 풀어나가는 모습은 경이롭기조차 합니다.
황정민이 연기한 서른여섯 살 노총각 석중이는 세상이 모두 외면하고 손을 내밀기를 주저하는 여인에게 도리어 그의 인생 전체를 던지는 비현실적 선택을 합니다. 그 선택은 그를 모두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우직함이 사실은 가장 강력한 진실의 힘을 뿜어내는 대목으로, 영악해져가는 이 시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부와 지위와 명예를 모두 손에 거머쥔, 사회적으로 상류에 속하는 이들의 화려한 사랑을 갈망하는 이 시대에, 가진 것 없고 외로운 이들의 사랑에서 애절하고 따뜻한 눈물을 흘리는 경험은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구질구질하고 처참한 현실일 수 있는 자리에서 이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사랑에 행복해하는 이들을 영화적 상상의 실존으로 만나는 경험은 진정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깨움과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영화 <너는 내 운명>이 적대적 냉전의 벽을 넘은 <웰컴 투 동막골>에 이어 한국 영화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오래 전에 지나버린 시절의 신파(新派)를 닮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나, 우리 시대가 잃어가고 있는 진실에 대한 목마름, 그리고 그에 대한 새로운 느낌들이 이 영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관통하고 있는 마음결이 아닌가 합니다.
배우란 여러 가지 성격을 변화무쌍하게 보일 수 있는 역량이 있을 때 탁월함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겠지만, 황정민의 경우 <너는 내 운명>에서 오늘의 우리 사회가 버리고 있는 농촌, 그리고 거기에서 떠나버릴 생각에만 골몰하는 청년세대의 아픔과 갈망까지 껴안고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가 상대하는 여인으로 전도연이 연기한 전은하는 <영자의 전성시대>의 후예이거나 <어둠의 자식들>에 등장하는 몸을 파는 여인의 계보에 속하는 인물이기는 하나, 그보다 더 처절한 처지에 있는 까닭은 AIDS라는 천형에 옭매여 있는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석중은 은하의 이러한 운명을 자신의 운명과 같이 받아들입니다.
하여 <너는 내 운명>이라는 말은, 다만 상대가 자신의 운명 속에 존재하는 사랑이라는 의미로서만 멈추지 않고 상대의 운명이 곧 자신의 운명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서슴없이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 상대의 운명이 이 사회에서 온통 질타와 비난, 그리고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지점에 있다 해도 온 몸으로 그걸 가로막고 자신의 사랑으로 이를 이겨내려는 석중의 모습은, 그래서 이 시대가 흔히 목격하기 어려운 진한 감동을 주고 있는가 봅니다.
작은 갈등이나 이해관계의 충돌만 있어도 가볍게 돌아서고 쉽게 배신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음험하게 보복하는 이 시대에 황정민이 연기한 <너는 내 운명>의 눈빛은 좀체 사라지지 않고 가슴에 남는 소중한 미소가 되는 듯하여 이 가을이 고맙습니다. 힘겨워하는 이들에 대한 아름다운 위로를 발견한 기쁨이 있어서 말이지요.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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