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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신'을 버리고 '시간'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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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근대, '신'을 버리고 '시간'을 만들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15> 철도가 만든 새 거인, 시간

1882년 니체의 광인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19세기, 인간과 자연을 고민하던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신의 품으로부터, 이전 시대에서 벗어나야 했다. 과학자, 예술가, 철학자들은 신으로부터 드리워진 장막을 걷어 버리고, 불경한 미지의 세계 - 그러나 이미 존재하고 있던 - 인 세속 사회로 걸어 나와야 했다.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는 종교의 장악력이 소진되는 것을 목격하고 비로소 세계가 '인간적인 공간'으로 변화했다고 기뻐했다. 변화된 세계에서 '인간'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게 된 사실에 그들은 흥분했다.

그렇다면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신을 대체한 것은 무엇일까? 신은 실존하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다. 초월적 존재인 신은 모든 인간을 관장하며 공기처럼 감싸고 있다. 신은 절대자이기 때문에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다. 신의 뜻을 인간은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런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신이 사라진 뒤, 신과 같은 능력을 갖춘 절대자가 탄생했다. 바로 시간이다.

시간의 흐름은 눈으로 볼 수 없다. 시계란 상징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시간은 우주와 전 세계를 가로질러 존재한다. 모든 생명체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인, 죽음이 있다. 모든 인간은 시간의 관장 아래 생존하다가 마지막 시간을 보낸 뒤 사라져야 하는 운명을 거부할 수 없다. 19세기에 탄생한 '시간'의 향연을 만나 보자.

시간의 탄생

고대 그리스, 이집트, 인도, 중국, 남미 등 세계 곳곳엔 각기 다른 다양한 신들이 있었다. 바다의 신, 산의 신, 풍요의 신, 전쟁의 신, 창조의 신, 파괴의 신 등…. 각각 신은 자신의 영역에서 인간을 관장했다. 그러다 이런 많은 신을 일거에 정리한 종교가 등장했다. '너희 앞에 다른 신을 두면 국물도 없을 것'이라고 선포한 기독교다.

유일신을 숭배하는 기독교는 중동을 넘어 유럽을 장악하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가 세계 표준 종교가 되었다. 반도로 이루어진 극동 어느 나라 밤하늘에서도 붉은 십자가가 물결을 이르고 성령이 넘쳐 흐른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은 기독교 이전에 생존했던 탓에 죄 사함을 못 받아 지옥 불에 갇히는 운 나쁜 경우다. 이를 제외하고는 한국인들도 세계 표준 종교인 기독교의 은혜 아래 있다.

19세기까지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시간이 있었다. 인간이 시간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른바 배꼽시계라고 불리는 인체에 내장된 시계 등 사회적 관습, 문화, 지구의 자전 속도 등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했다. 일반적으로 각 지역에서 시간 기준점은 태양이 머리 바로 위에 있는 순간, 즉 그림자가 없거나 가장 작은 순간을 따랐다. 바로 이때가 정오가 됐다.

그러나 문제는 태양이 계속 움직인다(사실은 지구가 자전하는 것이지만)는 사실이었다. 한국 위도를 기준으로 하면, 지구의 자전 속도는 분당 20킬로미터를 약간 넘는다. 해를 따라 1분에 20킬로미터를 움직이면 매 순간 새 정오였던 셈이다. 조선 시대 강릉 관아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을 치면, 11분이 지난 후에야 한양(서울)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세계 곳곳에서도 '태양 정오'를 기준으로 시간을 알렸다. 도시나 항구의 가장 높은 곳에는 '보시구(報時球)'란 이름의 쇠 구슬이 달려있었다. 정오에 맞춰 쇠 구슬이 떨어지면 항구나 관청에선 대포를 쏘거나 종을 울렸다. 그러면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회중시계를 맞추었다. 이 보시구의 손자뻘 되는 게 종로의 보신각이나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이다. 1년에 한 번씩 사람들은 자정에 옛 광경을 재현한다. 12월 31일 카운트다운에 이어 새해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사람들은 회중시계를 맞추는 대신 입을 맞추며 환호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 프랑스 파리 리용역의 시계탑. ⓒ박흥수

태양 정오

'태양 정오'를 알리는 소리는 지구 자전에 따라 연쇄적으로 울려 퍼졌다. 마치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종종 부르곤 했던 돌림 노래처럼 말이다. '정오'라는 노래 가사의 첫마디가 계속 이어져 나오는 셈이다. 뉴욕 맨해튼에서 보시구가 떨어질 때, 허드슨 강 바로 건너편에 있는 뉴저지 뉴어크의 시각은 11시 59분이었다. 대략 20킬로미터마다 시간을 달리는 지구의 돌림 노래는 계속됐다.

이때에는 태양 정오를 따르는 삶이 커다란 문제가 될 일이 없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태어나서 줄곧 한 곳에 살았기 때문이다. 설사 여행을 하더라도 걸어가는 게 다반사였고 탈것을 이용한다 해도 나룻배나 우마차를 타고 다녔다. 이런 조건에서 지역마다 시간이 다른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됐다. 한 시간은커녕 하루나 이틀을 가더라도 혼란에 빠질 정도로 멀리 갈 수 없었다.

그러다 지구에 존재하던 셀 수 없이 많은 정오와 셀 수 없이 많은 자정을 전부 빨아들일 사건이 일어났다. 인간과 동물의 근지구력에 의존했던 일들이, 동력을 가진 기계 장치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맞닥뜨린 첫 번째 문제가 바로 시간이었다. 런던에서 아침 7시 출발 열차를 탄 후 한 시간을 달려 옥스퍼드에 도착한다면, 옥스퍼드역 승강장에 발을 내려놓을 때 시각은 8시여야 한다. 그러나 이전 시기엔 런던과 옥스퍼드역의 지역 표준 시간이 달랐으므로, 여행자는 역에서 내리자마자 옥스퍼드역 시계에 자신의 시계를 맞춰야 했다.

각지에서 오는 열차를 갈아타야 하는 곳에서는 출발 지역 시각과 갈아탈 역의 시각, 또 최종 도착할 역의 시각을 일일이 꿰맞추는 복잡한 방정식 풀이를 해야 했다. 철도 회사들은 노선별로 독자적인 자신들의 시각표를 계시했다. 철도역마다 지역 표준 시간과 철도 회사들이 걸어놓은 시각표들이 걸려 있었다. 역무원들과 승객들은 끙끙거리며 어떤 열차를 타야 하는지 계산해야 했다. 버밍엄 역이 정오일 때 출발하는 '런던-노스웨스턴 철도회사'의 12시 20분 차를 타야 할 경우, 버밍험 표준시와 철도회사 시간표의 시간차를 계산하지 않으면 승객은 열차를 놓치게 된다. 철도 회사마다 모두 다른 지역 표준 시간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어떤 역에서는 12시에 11시 55분 차와 12시 15분 차가 동시에 출발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승객이 느끼는 어지러움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뒤엉킬 경우 작은 판단 착오가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열차 선로와 운행 편수가 늘어날수록 사람들은 '태양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더욱 강하게 깨달았다.

인류는 신들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에서 문명의 시간으로 걸어 나와야 했다. 증기와 철도와 전신이라는 근대 과학과 기계 문명의 거대한 파도가 '표준시'를 인류의 해안에 밀어 넣은 것이었다. 새 점령자가 된 표준시는 사회 모든 것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마치 점령군의 포고문처럼 인간 생활과 문화 전반에 일일이 간섭했다. 해가 뜨면 생활을 시작하고 해가 지면 하루를 정리하는 뭉뚱그려진 삶의 패턴이 바꿀 수밖에 없었다. 1848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표준시가 채택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제 시간이 인간을 관장하게 되었다. 속도 혁명은 기존 시간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과거엔 결코 얻을 수 없던 속도를 획득한 인류에게 이제 시간은 절대자이면서도 상대적으로 얼마든지 조절 가능한 두 얼굴이 되었다. '(시간)=(속도)/(거리)'란 공식처럼 시간은 물리학 기초 공식 대열에 들어왔고, 속도를 높일수록 얼마든지 줄일 수 있는 변수가 되었다. 철도가 빚어낸 속도 혁명이 시간과 거리를 재편하면서 세상은 다른 세계로 재탄생했다.

신이 관장하던 세상에서 시간이 관장하는 세상으로

영국 표준시가 세상을 어떻게 지배하게 됐는지를 보는 것도 근대를 보는 흥미로운 방식의 하나다. 영국 표준시는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의 '태양 정오'를 기준으로 한다. 영국 표준시가 채택된 같은 해에 <공산당 선언>이 발표되었던 것도 이제 시간이 관장하는 세상이 도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근대의 시간은, 세상 모든 종류의 가치를 '시간'으로 변환시켰다. 흡사 원시 시대부터 이어져 온 물물 교환이 화폐라는 매개체를 통하는 방식으로 바뀌며, 모든 것이 '돈'을 기준으로 환산되듯 말이다. 인간의 노동도 시간을 기준으로 계산됐다. 주급이나 월급이 모두 시간당 임금을 기준으로 매겨지게 된 것이다. 지주나 영주 밑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한 달 치나 1년 치 노동력에 해당하는 '세경'을 받을 때에는 시간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지주나 영주와 달리 하인들은 겨울을 좋아했을 것이다. 겨울이 해가 짧아 노동 시간이 훨씬 짧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 시간이 장악한 세상에서는 더는 태양 길이에 노동 시간을 위탁하지 않아도 되었다.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다. 시간당 임금이 5000원인 사람이 시간당 임금이 10만 원인 사람만큼 돈을 벌기 위해서는 20시간을 더 일해야 한다. 2012년 4월 4일 자 한 경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어떤 재벌 기업의 회장 1년 치 연봉이 최소 112억일 것으로 추정됐다. 이는 현재 내 연봉을 기준으로 했을 때, 조선 시대 고종황제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만들 수 있는 돈이다.

▲찰리 채플린 영화 <모던 타임스>의 한 장면

노동이 인간을 지배하다…'소외'

마르크스의 <자본>은 시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노동시간, 확대 재생산, 회전율, 잉여노동 모두, 시간이라는 악보 위에서 연주되는 음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생산 과정에 개입하면서 만들어낸 새로운 가치는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다. 여기서 필요노동이란 노동자가 자신과 그의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생활 수단의 가치를 재생산하는데 해당하는 노동의 일부분이다. 잉여가치는 상품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필요노동시간만큼의 가치 이외의 것으로, 이는 자본가의 몫이 된다. 때문에 잉여 가치를 크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된다. 기계의 생산능력을 늘려 필요노동시간을 줄이는 방법도 있지만, 자본가들이 손쉽게 생각한 방법은 절대적 노동 시간의 크기를 늘리는 것이었다. 필요노동시간 이후 잉여가치로 전이되는 시간 몫을 확대해 부를 증대시키는 방법이다. 근대 초기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길었던 것은 이런 방식으로 자본가들이 더 많은 잉여가치를 확보하려 눈에 불을 켰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생산에 투여되는 자본을 생산수단인 불변자본과 노동력인 가변자본으로 분류했다. 말 그대로 변화의 여지가 없는 기계장치 보다는 변화시킬 수 있는 가변자본을 조절해야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조건이다. 생산과정의 한 요소에 불과한 인간은 잠자는 시간 이외에는 노동에 투입되어야 했다. 인간이 노동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노동이 인간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게 '소외'였다. 마치 <자본>의 한 부분을 영상으로 옮긴 듯 보이는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 <모던 타임스>에는 거대한 생산과정의 한 부분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인 동작만 강요당하는 노동자가 급기야 기계장치인 톱니바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나온다. 마르크스나 채플린이 말하는 소외를 극복한 노동 해방이란, 노동에 모든 시간을 강탈당한 노동자가 노동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제대로 된 여가를 꿈꿀 수도, 인류가 쌓아온 지적인 성과들도 누릴 틈이 없고, 먹고 쉬는 것조차 다음 노동을 위해 최적화시켜야 하는 생산 과정 안에서 대다수 인간과 이들을 지배하는 소수의 세상은 반(反)인간적 지옥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시간을 두고 벌이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전쟁

인간에게 시간을 주는 것. 이것은 고대로부터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에 가로 놓였던 첨예한 쟁점이었다. 시간을 관장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었고, 신의 대리인인 왕은 시간을 조정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세상에 인식시켰다. 예컨대 고대 중국 황제들은 집권과 동시에 새 달력을 만드는 데 착수했다. 만약 진나라 시황제가 시간당 최저임금 협상 테이블에 나왔다면 쩨쩨하게 350원을 인상하며 엄살 부리진 않았을 것이다. 시간은 황제의 재산인 세상에서, 시황제는 호탕하게 몇천 원을 올려주고 전체 시간을 늘리면 그만이다. 고대 로마에선 황제들이 달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카이사르는 7월, 아우구스트스는 8월이다.

프랑스에선 1793년 새로운 혁명력이 제정됐다. 프랑스 혁명세력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난 뒤, 새 세계를 표상하는 상징으로 그레고리력을 폐지하고 혁명력을 채택했다. 혁명세력은 혁명 정신인 '평등'을 구현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달수의 날을 똑같이 했고 10진법을 달력에 적용했다. 혁명력에 따라 새롭게 제정된 설날은 왕정이 폐지된 다음 날인 그레고리력의 1892년 9월 22일이 되었다. 새해는 이때부터 시작되어 1년을 보낸 것으로 간주하였다. 달의 이름도 모두 바뀌었다. 로베스피에르가 쿠데타로 실각한 테르미도르는 여름 석 달 중 한 가운데 달을 의미했다. 테르미도르 9일에 권력을 읽은 로베스피에르는 단두대로 끌려가 생을 마감한다. 1799년 브뤼메르 18일에는 그 유명한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는데, 브뤼메르는 3개로 나누어진 가을의 중간 달로 안개라는 의미이다. 앞이 안 보이는 안개 정국을 뚫고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그의 이름을 딴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을 소용돌이에 몰아넣는다. 프랑스 혁명력은 12년간 사용되다가 1805년 폐지되었다. 1871년 파리 코뮌 때 반짝 부활해서 사용되기도 했지만 파리코뮌의 붕괴와 함께 혁명력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592년 임진년 6월 초하루. 맑음.
사량 뒤 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새웠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중 한 대목이다. 오늘날의 일기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요일이 없다는 점이다. 한국 달력 체계에 요일이 등장한 것은 1895년부터다. 태음력으로 살아온 조선 백성들은 1895년 11월 17일 태양력인 그레고리력이 도입되며 큰 충격에 빠진다. 11월 17일이 새해 첫날이 갑자기 1월 1일로 둔갑했고, 약 두 달 전인 10월 26일(음력 9월9일) 일어난 을미개혁에 따라 을미년을 1895라는 숫자로 바꿔 불러야 했다.

이때부터 조선은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쓰게 된다. 건양은 새로 양력을 세웠다는 의미였다. 10월 초 아흐레(10월 9일)와 같은 10일 단위의 날들은 7일의 주 단위로 변경됐다. 그러면서 각 날이 위치하는 요일이 생겼다. 그동안 몸에 익었던 음력과 새로 들어온 양력의 대격돌이 벌어졌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한 이후엔 음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된다. 일제는 설날을 앞두고 떡 방앗간에 순사들을 보내 가동을 중지시키고 설 당일에는 설빔을 입고 세배를 나서는 사람들에게 먹물을 뿌렸다. 미개한 조선 풍습을 유지하는 것은 대일본 제국의 영도를 거부하는 것이기에 단호하게 낡은 관습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설날은 복권되지 못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은 설날 풍습을 유지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낙후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여겼다. 정부와 신문·방송이 총동원되어, 양력 1월 1일을 새해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했다. 설날의 휴일을 없애는 대신 양력 1월 1일부터 3일간을 새해 공휴일로 지정했다. 그러나 천 년을 넘게 이어져온 전통은 무지막지한 압력에도 끈질기게 이어졌고, 그 결과 제자리를 찾았다. 설날이 시민 품으로 돌아오게 된 계기는 1987년 6월 항쟁이었다. 이승만, 박정희와 전두환을 이어온 수십 년 독재 권력의 탄탄한 성이 무너지면서, 권력에 휘둘렸던 많은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야 한다는 민심이 들끓었다. 그중 하나가 설날을 되찾자는 것이었다. 1885년 전두환 대통령은 국민 의견을 존중한다며 설날에 '민속의 날'이란 애매한 명칭을 붙이고 다일 하루를 공휴일로 지정했다. 그러던 것이 1989년 진짜 설날로 부활한다.

▲ 새벽 도착 열차 승객들을 위한 야간 통행증.
만약 요즘에 정부가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돌아다니지 못 하게 한다면 끔찍한 소동이 날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야간 통행금지는 1982년, 엄밀히 따지면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이 돼서야 전국적으로 폐지되었다. 통행금지가 있었던 시기, 심야 파출소 의자에는 야간 통행금지를 위반한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새벽이 밝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새벽에 도착하는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개찰구에서 역무원들에게 야간 통행증을 얻어야만 집에 갈 수 있었다. 마음에 둔 여자와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려는 남성은 굳이 마지막 배가 끊기기를 노리고 남이섬 같은 곳으로 가지 않아도 됐다. 은근히 자정이 넘어가기만을 고대하면서 눈치를 보면 그만이었다. 독재 권력은 시간을 통제함으로써 사람들을 시간의 섬에 고립시켰다. 밤 11시 반이 넘어가면 호루라기를 든 경찰이 깔리고 사람들은 자정 사이렌이 울리기 전에 집에 가기 위해 발길을 재촉했다. 맹수가 아니라 시간에 쫓기는 신세가 된 꼴이다. 시간과 시간을 투영한 달력을 두고 벌어진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 대립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면서도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

철도가 발명한 새 거인, 시간

철도가 개통되고 흩어졌던 시간이 통일된 후 시간이 모든 것을 재는 척도가 되자 '시계'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리버풀-맨체스터 철도가 개통된 이후 리버풀이 새로운 시계 생산지로 거듭난 것도 철도여행을 위해서는 시계가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역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대형 시계가 있다는 점이다. 역사의 중앙 벽면이나 대형 탑 위에 걸린 시계는 '이제 시간이 세상 모든 것을 흡입하겠다'는 징표였다.

시계탑은 약속의 장소가 됐다. 서울역이나, 도쿄역, 파리 리용역, 런던 워터루역의 시계탑 앞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였다. 여행객들은 어디서나 눈에 잘 띄면서 열차 시간에 맞춰 움직이기 쉬운 시계 밑으로 모여들었다. 급하게 역으로 달려 나온 사람들은 시계탑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 야 안도의 숨을 내쉬거나 안타까운 실망의 눈빛으로 놓쳐버린 열차를, 아니 시간을 한탄했다.

마차가 주인이던 시절, 출발은 전적으로 마부의 마음이었다. 또는 돈이나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 당겨지기도 하고 늦춰지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 탄생한 시간은 그가 누구이든 사람이 시간에 맞춰야했다. 12시에 출발하는 열차는 그가 수만 평의 땅을 보유한 부자라고 해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시간은 공평하게 사람들을 한 줄로 세웠다.

<멋진 신세계>의 저자인 올더스 헉슬리는 1936년 펴낸 <시간과 기계>에서 "와트와 스티븐슨은 기관차만 발명한 게 아니다. 그들은 시간도 발명했다"고 썼다. 1830년대부터 벌어진 속도 혁명은 인류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시간'이라는 새로운 거인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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