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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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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34>

교육, 그 눈먼 정열

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아이가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학원에 갔다 오느라 그렇다. 방학이 더 싫다고 하는 아이들도 많다, 놀지도 못하고 학원 스케줄이 더 빡빡하니까. 정말이지, 연민의 마음을 금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것이냐고 아이의 부모에게 물어보면 ‘남들이 다 하니까’ 한다고 답한다. 그렇다, 정상이냐 아니냐를 떠나 모든 이들이 한다면 그 압력을 거부하기는 힘든 것이다. 엄청나게 강력한 맹목적 집단의지, 그 앞에서 개인은 약할 수밖에 없다. 오늘은 우리의 교육현실을 음양오행을 통해 바라보기로 했다.

교육은 그 성격이 음양오행으로 볼 때, 나무(木)에 해당된다. 왜 나무인가 하면, 무언가를 길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심고 길러내는 것이나, 아이를 길러내는 일이나 모두 양육(養育)이기에 교육은 나무의 성격을 지녔다. 흔히들 어린 아이나 학생을 묘목(苗木)이라 하지 않는가.

따라서 교육의 동향을 보려면 나무 기운의 주기와 순환을 보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 교육 제도의 근간이 완성된 것은 지난 1974, 갑인(甲寅) 년이었다. 천간에 갑목(甲木)이 오니 교육에 관한 일이 이슈가 되는 해였고, 지지에 다시 인목(寅木)이 오니 교육의 근간이 완성되는 해였다.

그러면 그 해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니, 바로 고교 평준화 제도가 시행된 첫해였다. 즉, 현재의 교육 제도는 고교 평준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1974년은 전에도 얘기했지만, 아파트 투기 붐이 일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중산층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고교 평준화 제도는 유달리 교육열이 강한 우리 국민에게 있어 그 장단점을 떠나 아마도 가장 최선의 방안이었을 것이다. 과열된 교육열이 가져오는 입시위주의 교육 방식과 학부모들의 경제적 부담을 경감한다는 측면에서 더욱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우리 국민 모두가 실로 허리가 휘는 한이 있더라도 내 자녀만큼은 대학을 마치게 해서 사회의 출발선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꿀리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의지에 있어 한결같다는 점을 예상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런 욕구와 의지는 대학에 대한 엄청난 수요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이후 정부는 대학교육의 공급을 늘리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그 결과 1974년 20만 명이던 대학생 수가 10년 뒤인 1984년 갑자(甲子)년에 이르러서는 무려 90만명을 넘어섰으며, 방송대학을 활성화하는 등의 정책이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러 전문대학과 일반 대학을 합치면 학생수는 200만명을 넘어서고 있으니 사실상 대학교육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기본 코스가 된 것이다.

하지만 갈수록 뜨거워지는 교육열과 과외공부 열을 식히지는 못했고, 결국 1994, 갑술(甲戌)년, 다시 한 번 갑목이 오는 해에 가서 ‘수학능력시험’제도. 이른바 수능을 실시하게 된다.

수능시험의 요체는 시험문제의 난이도를 낮춤과 동시에 과목 수를 줄여서 고비용 과외에 대한 수요를 줄이고, 지역의 경제적 차이에서 오는 문제점을 경감해보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98년에 등장한 김대중 정부는 모든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겠다는 국민의 요구에 국민의 정부답게 부응하게 된다. 그 결과 드디어 이해찬 세대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게 된다. 이해찬 세대란 2002년 수능시험을 치른 세대를 말한다. 사실상 시험은 2001년 겨울이었는데, 음양오행으로 봐도 최악의 상황이 예상되고 있었다.

2000년과 2001년은 경진(庚辰), 신사(辛巳)년으로서 모두 금(金)기운의 해가 된다. 앞서 교육은 목의 기운이라 했는데, 금의 기운이 들어오는 해라 목의 기운을 누르니 최악의 상황이 예견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교육 정책은 ‘공부 안 해도 대학은 다 갈 수 있도록 한다’ 는 신호로 해석되어졌고, 그 바람에 ‘단군 이래 최저학력’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그로서 우리 교육 제도는 사실상 어떤 한계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정부의 교육 정책을 비난하자는 의도가 아니다. 그것은 어찌되었든 우리 사회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타협이자 합의였으며 그 나름의 긍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문제를 지적하자면, 우리 사회 전체가 지닌 교육에 대한 맹목적 의지가 뿜어내는 엄청난 압력이 문제의 근원일 것이다.

그런데 왜 맹목적 의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대학에 보내겠다는 요구의 바탕에는 자신의 자녀를 인생의 출발선 상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하도록 만들겠다는 심리가 깔려있기 때문이고, 더 큰 문제는 그런 투지(鬪志)를 전 국민이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경쟁 피라미드의 최정상을 향한 의지와 연결된다. 그러니 허망한 것이고 눈먼 정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물론 자신의 자녀가 반드시 1등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대로 상위권에 들었으면 한다. 그래서 대학을 마치면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 남보다 그리 못하지 않은 출발을 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이 한결같은 부모의 마음을 누가 나무라겠는가!

하지만, 경쟁이란 기본적으로 상대가 있는 게임이고, 그렇기에 누구나 상위권에 들려고 하니 결과적으로 1등을 향한 의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실을 모르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못 본 척 하기에 맹목적 의지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눈이 멀었거나 눈을 감은 것이다.

사실 교육 그 자체만으로 보면,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옛날 같으면,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쓸 줄 알고, 주판을 만질 줄 알며, 위아래를 구분할 줄 아는 예절을 몸에 익히면 그만이었다.

그렇듯이 오늘날에는 한자를 약간 알고 영어로 된 글을 조금 이해하고, 워드와 액셀, 그리고 파워 포인트 정도를 쓸 줄 알고, 인터넷 서핑을 할 수 있으며, 주변 사람에 대해 친절한 마음씨를 지니도록 배웠다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훌륭한 시민으로서의 기본 교육은 충실하게 받은 셈이다.

그리고 학문이란 사실상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고, 동시에 모든 국민이 학문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상한 얘기로 들리겠지만, 대학이란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기에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학자가 되는 것인데, 전 국민이 학자가 되는 사회는 얼핏 보아 좋아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대체적으로 학문을 하는 사람은 사회 구성원의 1% 정도면 충분한 법이며 나머지는 앞서 얘기한 정도의 교양수준을 가진 자면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학문이든 뭐든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무엇에 써먹기 위함이다. 쓰이는 바, 즉 소용(所用)이 없으면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 교육을 마치거나 대학원까지 마치면 대개 이십대 후반이 되는데, 지금의 우리 사회는 삼팔선이니 사오정이니 하는 말이 유행하는 사회이다. 직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생산하고 그 보수를 받는다는 것이니, 최근의 분위기는 한 개인의 생산 기간이 겨우 15년도 채 되지 않는다는 얘기와 같다.

만 6세부터 20년을 배우고 나서 겨우 15년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낭비가 될 수밖에 없다. 반면, 우리 사회가 자녀 교육에 쏟는 비용은 실로 엄청나다. 얼마 전 사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이 GDP의 2 % 수준이라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나는데, 이 수치를 적다고 느낀다면 커다란 오산이다.

정부가 공교육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교육비가 그만큼 된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의 앞날에 커다란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 교육이 어떤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은 이런 점들을 두고 하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바로 금년이 2004, 갑신(甲申)년이다. 항상 하는 얘기이지만, 만물은 30년이 지나면 커다란 변곡점을 맞이하도록 되어있으며, 그것을 충(衝)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니 고교 평준화가 실시되었던 1974, 갑인(甲寅)년과 올해 갑신(甲申)년은 충이 되는 해이다. 지지의 인목(寅木)과 신금(申金)이 상반되는 기운이기 때문이다. 저번에 부동산 거품도 올 해로서 수그러들기 시작한다고 했는데, 교육 제도 역시 우리 사회는 이제 엄청난 거품을 만들어낸 것이고, 그것이 금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해가 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니 이제 서서히 더 이상 대학, 그리고 대학원까지 다녀봤자 별 득이 될 것이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에 따라 이제 그간 무수히 생겨났던 대학들과 학과 정원 늘리기도 한계에 달했으며, 장차 통폐합의 기운이 밀려올 것이다.

이 문제 역시 대학에 종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일자리가 걸린 사안이라 당장의 급격한 변동은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큰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외면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조만간 대학 교수들과 직원들이 붉은 띠를 매고 나설 날도 멀지 않았다.

이 글을 읽으면서, 그렇다면 자녀를 대학에 보내지 않으면 그 대안이 뭐냐고 필자에게 물어보실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일이 될 것이다. 다만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세상의 큰 틀이 이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기준과 방향이 앞으로 30 년에 걸쳐 또 다시 모색되고 생겨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변화가 장차 우리 아이들이 실컷 뛰어놀고 놀이를 통해 세상을 배우는 시대, 아울러 진실로 학문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은 실컷 학문을 연구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힘이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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