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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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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29>

모택동의 사주와 일생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22일)은 동지(冬至)이다. 오후 3시 32분 무렵에 태양이 동지점에 이르게 되니 오늘밤이 제야(除夜)가 되고 내일부터가 사실상의 새 해 첫날이 된다. 동지를 화두로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없겠는가 싶어 이리 저리 궁리하다가 동짓달에 태어난 역사상의 인물을 소재로 하기로 정했다. 바로 중국의 모택동이다.

사주부터 보기로 하자.

년 계사(癸巳)
월 갑자(甲子)
일 정유(丁酉)
시 갑진(甲辰)

대운은 다음과 같다.

08세 계해(癸亥)
18세 임술(壬戌)
28세 신유(辛酉)
38세 경신(庚申)
48세 기미(己未)
58세 무오(戊午)
68세 정사(丁巳)
78세 병진(丙辰)

간단히 살펴보면, 정화(丁火)가 동짓달에 났으니 기운이 약하다. 다행히도 일간의 좌우에 갑목(甲木)이 있어 받쳐주고, 년지(年支)에 사(巳), 불이 있어 발전의 기틀을 지닌 자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습기가 태중하여 성격적으로 음삼(陰森)한 면이 보이며, 더더욱 일지(日支)에 유금(酉金)이 있어 편집성향도 있다. 이런 사주는 남방 화운을 만나야 발전하게 되는데 다행히 48 세 이후 대운이 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력도 있다. 일간이 불이니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을 것이다. 그가 평생 동안 역사서인 ‘자치통감’을 끼고 살았다는 것은 그래서 수긍이 간다. 그냥 살았다면 역사 교사를 했으면 딱 알맞을 정도의 사주라 할 수 있다.

1893년 겨울, 몰락한 지주 계급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년 운세가 좋지 않았기에, 학교를 제 때에 진학하지 못하고 17세가 되어서야 소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통 교양서적인 사서삼경 등은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했다가 제대 후 돌아와 사범학교를 다녔다. 팔자가 선생 팔자이니 사범학교와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그는 1917년 신민학회를 만들어 생애 최초로 정치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일종의 계몽운동을 조직한 것이다. 1917년은 정사(丁巳)년이라 일간이 정화(丁火)인 그로서는 출발이 좋았다. 본인의 일간(日干)과 같은 해에 일을 시작해야 오래가고 뜻을 이루는 법이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북경으로 가서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조교로 일하게 된다. 사범학교 당시의 은사로부터 유물사관을 배웠고, 다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그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자가 된다. 당시 레닌이 1917년 겨울에 무장봉기를 통해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을 세웠던 터라, 젊은 모택동에게는 대단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능히 짐작된다.

여기서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20세기를 만들어낸 두 사람에 관한 것이다. 바로 레닌과 윌슨이다. 레닌은 마르크스 이념을 후진국이던 러시아에 적용하여 소비에트 연방을 만들어내었을 뿐만이 아니라, 힘을 앞세운 열강(列强)에 맞서 사회 혁명을 일구어낸 위인이다.

그런가 하면 윌슨은 신흥 강국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민족자결(national self-determination)이라는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오늘날 무수한 나라들이 생겨나 번성하고 그런대로 제 목소리를 내면서 살 수 있도록 토양을 제공한 위대한 정치가였다. 아울러, 훗날 세계 최강대국이 된 미국이 19세기식의 제국 식민주의, 바로 약육강식적 사고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든 이상가였다.

그런 면에서 레닌과 윌슨, 이 두 사람은 비록 그들의 이상이 실패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세계를 만들어낸 거목(巨木)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재미난 점은 이 두 거인이 거의 동 시대에 활동하다가 사라져간 일치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의 위대한 우연이라 하겠다.

돌아가서, 모택동은 1922년에 은사의 딸과 결혼하면서 그 해 7월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호남성 대표로서 참가하게 되니 그의 일생을 결정지은 한 해였다. 이 해는 임술(壬戌)년으로서 관(官)이 오는 해라 공산당 간부의 감투를 쓴 셈이다. 당 활동을 하던 그가 또 한 번의 계기를 맞은 것은 1927년, 정묘(丁卯)년에 3천명의 민병을 조직하여 정강산에 있던 주덕과 합류한 일이다. 이 역시 정화 일간인 그가 정(丁)의 해에 거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그에게 가장 극적인 일이 찾아든 것은 1934년 갑술년의 일이다. 당시 중공군은 장개석의 압력을 피해 무려 일 만리에 달하는 작전상 도주인 장정(長征)을 감행했는데, 이 장정 도중 귀주의 ‘존의’라는 도시에서 당 지도권을 쟁취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일인자로 등장하게 된다. 그의 나이 41세로서 갑술년의 갑목(甲木)이 오니 직장인으로 말하면 승진 운이며, 회의 개최 시기가 정축월이니 또 한 번의 정화(丁火)가 들어온 시기였다.

존의 회의에서 모택동은 종전의 도시를 거점으로 하는 소비에트식 혁명 전략을 통렬히 비판하고 농촌을 거점으로 하는 중국 전래의 전략을 내세워 지지를 받았다.
그 후 1937년 정축년에 중일 전쟁이 터지자, 그 역시 불의 해라 모택동은 장개석과 합작하는 유연성을 발휘, 항일민족통일전선 구축을 통해 성공적으로 대임을 완수했다.

그리고 1945년 을유(乙酉)년, 즉 인수(印綬)가 들어오는 해의 4월 연안(延安)에서 열린 제7차 중국공산당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주석이 되었으며, 1946년 병술년, 병화(丙火)의 강한 기운이 들어오는 해에 가서 국민당과 전쟁을 시작해서 1948년까지 중국 본토의 공산당 지배를 확립했다.

그리하여 1949년 10월 1일, 기축년 계유월 갑자일에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중국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세계 만방에 공포했으니 기축년은 중국에게는 힘이 되는 해라, 오랜 열강의 침탈로부터 나라를 세우고 잃었던 자존심을 되찾았으니 이제 새로운 중국이 시작된 것이다.

모택동 개인으로서는 이 때가 기미(己未) 대운에 기축(己丑)년이라 활동의 식신(食神)운이라 무공(武功)이 천지를 진동한 한 해였다.

문제가 된 것은 그의 나이 58세인 1951년부터였다. 이 때부터 그는 무오(戊午)대운을 맞아 각 방면에 열과 성을 다해 일을 해 나갔지만 서서히 독단 독재의 모습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 때부터 당의 노선방침을 놓고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면서 종전의 집단지도체제의 원리를 무시하고 당내 온건파들을 차례로 숙청했으며, 그 과정에서 대자보(大字報)를 통한 대중 선동정치로 나갔으니 그 부작용이 극심할 밖에. 그가 추진한 인민공사나 대약진 등이 이른바 ‘3면홍기’운동은 중국을 엄청난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동료였던 유소기나 임표 등을 숙청하고 주은래나 등소평 등의 온건파들을 무력화시키면서 급기야 그의 노선에 걸림돌은 모조리 제거되었으니 결국 모택동은 인민이 잘 먹고 사는 문제보다는 한시바삐 강국(强國)이 되어야 나라의 안녕을 지킬 수 있다는 노선을 택했던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고 하겠다.

그 결과 1970년 경술(庚戌)년에는 재운(財運)이라 욕심이 등등하여 헌법 수정을 통해 1인 체제를 확립하였으니, 사실상 과거 중국의 봉건 황제로 되돌아간 셈이었다. 그러나 결국 경술년과 충(衝)이 되는 1976년 병진(丙辰)년에 일종의 대중 반란이 일어난 가운데 쓸쓸한 절대 권력자의 모습을 뒤로 한 채 세상을 떠났다.

모택동은 위대한 인물인 만큼 공도 많고 과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무튼 그는 19세기 이래 열강에 의해 조각난 중국 대륙으로부터 외세를 몰아내고, 민족자존심을 되찾는 대위업을 이룩했다는 점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역대 중국에서 농민의 봉기가 안정된 정권 수립으로 이어진 예가 없다는 것인데, 모택동이 영도하는 중국 공산당은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성은 빛을 발한다. 대개 농민군은 조직력이 약하고 기강이 없어서 전제 정권을 물리쳤다 해도 나중에는 약탈 방화를 일삼는 오합지졸로 끝나게 되고 이어서 군벌이 등장해서 새로운 왕조를 여는 것이 중국 역사의 일반적인 상례였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그런 면에서 전혀 다른 면모를 보였다. 기강이 높아서 약탈 방화를 한 적이 없고, 끝까지 농민과 인민의 편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이는 모택동이 이념 무장과 정신교육에 대한 강조를 최후까지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겠다. 상례대로라면 장개석의 군벌이 마침내 새 정권을 여는 것인데, 시대가 변하여 마침내 농민과 대중의 정권이 탄생한 것이니 역사의 발전이라 하겠다.

잠깐 중국 공산당의 미래를 내다보기로 하자.

1949년에 정부를 세운 중국공산당은 그로부터 30년 뒤인 1979 년에 가서 등소평의 영도 아래 개혁개방으로 실용적 노선을 변경했으며, 그 노선의 연장성 상에 오늘날 중국의 번영을 이룩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중국의 흐름은 2009년 기축(己丑)년이 되어야 커다란 주기인 60년 한 갑자(甲子)를 마무리하는 셈이 된다.

그 전반 30년은 정치 안정화였고, 그 후반 30년은 경제번영이 된다. 2008년에 개최될 북경 올림픽은 중국이 정치와 경제 모두를 달선한 연후에 여는 일대 잔치인 셈인 것이고, 그 다음부터 새로운 라운드로 들어가게 될 것인 바, 그것은 중국의 민주화 차례인 것이다.

중국의 민주화가 어떻게 진척될 것인지를 내다보는 중요한 단서가 있는데, 이는 지난 1989 년 기사(己巳)년에 있었던 천안문 사건이다. 따라서 중국의 민주화는 그로부터 30년 뒤인 2019년 기해(己亥)년에 급진전될 것이다.

그 해의 대혼란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일당 지배체제는 사실상 마무리될 것이지만, 공산당 지배 체제의 종언이 과연 중국 인민에게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냐의 여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동시에 중국의 혼란은 아시아 전체의 안전과 번영과도 직결되는 문제라는 점도 밝혀둔다.

(마지막으로 명리학과 관련된 문제인데, 종전의 이론에 의하면 사주의 기운이 강하고 관운도 강해야 권력을 잡는다고 되어있지만, 정작 모택동의 사주를 보면 강한 사주라 할 수는 없다.

필자는 그간 많은 사람들의 실제 사주를 연구해오면서 반드시 그런 조건에 부합되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차에 걸쳐 경험했으니 종전 이론에 수정의 여지가 있음을 느낀다.

필자 경험으로 중요한 것은 기운이 강한 것보다는 기가 통하는 것(氣通)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명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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