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민주주의자 김근태에게 정치를 배운 건 축복이었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민주주의자 김근태에게 정치를 배운 건 축복이었다"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40> 민주당 유은혜 의원 "경청하는 리더십 필요"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 수배된 사람과의 결혼, 고(故) 김근태 의원 보좌관, 야당 당직자, 그리고 지역구 국회의원, 언뜻 보면 소위 말하는 '상남자'의 이력이다. 로맨틱하고 열정적인 삶을 보낸 사람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력의 주인공은 남자가 아니다. '키다리 아줌마'라는 별칭을 가진 유은혜(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국회의원이다.

1980년대 민주주의라는 꽃을 피우기 위한 치열하고 뜨거웠던 울부짖음은 대한민국 또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그 한가운데에 자신의 삶이 어디까지 바뀔 것인지 알지 못했던 한 여대생이 있었다.

"학내 시위를 하든 가두투쟁을 나가든 그것을 나가는 순간순간이 매번 선택이고 결심이었어요. 두려움과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얼마나 갈등했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많이 흔들렸던 탓일까? 많이 흔들렸을지언정 그녀의 선택은 담대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라 교사가 꿈이었던 20살 새내기 대학생 눈앞에 30년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그 충격은 '도대체 왜?'라는 궁금증을 자아냈고, 이후 잔인하게도 더 큰 충격을 안겨준다.

"20여 년 배워온 것이 다 무너지는, 내가 배워 왔던 게 진실이 아니었구나 하는 기분, '광주의 진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면서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사명감을 갖게 되었어요. 내 이후의 세대, 그리고 지금 나와 같은 시기를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더 이상은 속으면서 살아선 안 된다는 심정적인 출발이었죠."

그렇게 그녀의 삶은 새로운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가고자 하는 길과 어떻게 갈 것인지 자신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부터 찾아내고 있다.

"우리 어머니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 선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사실은 우리 주변의 다수라고 생각해요. (중략) 어머니의 삶을 되돌아보면 같은 여성으로서, 또 내가 모셔야 할 어머니로서, 우리 시대의 우리 사회를 이끌어 온 어른으로서 우리 어머니라는 분이 갖는 존재감, 의미가 나에겐 매우 각별합니다."

일상적 삶 속에서 어떤 정치를 할 것인지, 무엇부터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찾아내는 그녀는 격하게 흔들리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그 흔들림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오늘도 담대하게 나아가고 있는 유은혜 국회의원을 만나 보았다.


- <어머니의 이름으로>(호미 펴냄)라는 책을 썼다. 그 안에 1980년 초반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했던 일, 노동현장에서 일했던 일에 대한 에피소드가 담겨있다. 위장취업으로 2년여간 노동자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 강도를 어떻게 견뎠나.

내가 한 체력 한다. 오늘도 세 시간 정도 자고 지금 장외투쟁 현장에서 버티다 왔는데, '약간 뜨겁다'라는 정도지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처음 취업한 곳은 봉제공장이었는데 전자공장보다 봉제공장의 노동 강도가 세기 때문에 자임해서 간 것이다. 그때도 다른 친구들보다는 건강하고 버틸 힘이 있었다. 문제는 남들보다 목이 하나 더 있을 정도로 큰 키였다. 그곳에서 주로 시다 일을 했었는데, 주로 서서 일하다 보니 노동에 익숙하지 못한 몸놀림이 사람들 속에 묻히지 않고 항상 눈에 띄었다. 두세 차례 발각되어 쫓겨나기도 했다. 결국 전자공장으로 옮겼는데, 그때마다 일도 능숙하게 하지 못하고 적응도 잘 못해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도 전자공장에서는 납땜하는 일 등을 앉아서 하다 보니, 크게 도드라지지도 않았고 봉제공장보다 좀 더 수월하게 일을 할 수 있어 적응도 잘할 수 있었다.

▲ 유은혜 민주당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체력적으로는 견딜 만했지만, 그 당시 노동자 신분으로 위장취업을 한다는 것은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과 개인사를 내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머릿속에는 항상 외우고 살아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늘 긴장한 채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위장취업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긴장감과 집중은 큰 고통이었다. 놓치고 흐트러지면 스스로가 생존할 수 없었고, 주변 친구와 조직에 누를 끼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책임감이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힘이었다.

- (편견일지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시절을 보냈다. 어떻게 소위 '운동권의 삶'을 선택하여 살아갈 수 있었나.

태어날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박정희 대통령 치하에서 유신교육을 받으면서 살았다. 박정희 외에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10.26 이후 국상을 치를 때도 굉장히 두렵고 슬펐지, 이 상황 전체를 정치적으로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 없었다. 내가 1981년도에 대학을 입학했으니 80년 광주항쟁이 벌어진 때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그 시기 나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언론에서 '일부 불순 세력들의 체제 전복 기도'라는 보도들만 접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보도들도 자세히 본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런 일이 있나보다' 하고만 스쳐 지나갔었다. 지금 알고 있는 사실들이 그 때 일어났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대학 입학 후 한 달이 채 안 되었을 때 학교에서 충격적인 장면과 맞닥뜨렸다. 선배 한 명이 밧줄로 몸을 묶은 채 굴뚝에 올라 광주 시민을 무참하게 총칼로 진압했던 것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뿌렸다. 그런데 그 유인물이 뿌려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읽기도 전에 학내 상주하고 있던 경찰들이 그 선배의 머리채를 잡고 벨트를 잡아 개처럼 끌고 갔다. 그 일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과연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진 '학교에서 왜 저런 일이 벌어지는지, 경찰들이 왜 학교에 상주해있지?' 하는 정도였지, 그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일을 계기로 '광주의 진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땐 광주에 대한 자료가 없어서 당시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이나, 친구나 가족이 겪었던 일을 주변 사람들을 통해 듣게 되었다. 또 교회나 성당 등 종교 단체에서 나왔던 기록물들, 외국에 보도된 외신 자료 등을 통해 광주의 진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선배들과 친구들과 함께 사회과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유신 독재 체제하에서 받았던 교육이나 문화들에 대해 '내가 속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온 국민을 속일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런 교육으로 나는 대학생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충격이 컸다. 나와 같은 세대를 살았던 동년배나 선후배도 거의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 청년 '유은혜'를 추동하는 시대적 사명감은 무엇이었나?

20여 년 배워온 것이 다 무너지는 기분. 거기에 '광주의 진실'이 더해지면서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지금 나와 같은 시기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이후 세대들은 더 이상 속으면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심정적인 출발이었다. 그 출발은 광주의 진실을 밝히고 알리고 바로잡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당시 전두환 독재에 대한 저항, 민주주의의 실현, 이것들을 위해 내가 뭔가를 해야겠다는 결의가 매우 커졌다.

1945년에 해방되고 80년 광주항쟁 이후에도 제대로 된 민주주의 체제를 이루지 못하고 군사독재체제에서만 살아오지 않았나. 우리나라가 정치적 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 최소한의 기본권, 인권 등이 지켜지지 않는 열악하고 척박한 사회라는 것에 대해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 시절 대부분의 학생들이 느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학생운동을 굉장히 열심히 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일종의 부채감 같은 것이 있어 학생운동을 하는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을 지켜주고 도와주고 싶어 했다.

- 당시는 권력에 대항했다가는 자칫 목숨까지도 위험한 상황이었고, 실제로 소리 없이 죽었던 동료도 있었다. 두렵지는 않았나.

늘 두려웠다. 그때까진 나쁜 짓을 하거나 범죄를 저질러야만 경찰서에 간다고 알고 살아왔다. 우리 학교는 '금잔디 광장'이라는 곳에서 매년 5월이 되면 시위를 많이 했는데, 시위에 나갈 때마다 '오늘은 나갈까 말까' 하는 갈등이 컸다. 경찰서에 가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평범한 삶을 살다가 이제는 옆의 선배들이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컸다. 학내 시위를 하든 가두투쟁을 나가든, 순간순간이 매번 선택이고 결심이었다. 두려움과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못 했을 것이다. 어떤 순간 어떤 사람이 좀 더 많이 흔들리면 좀 덜 흔들리는 사람이 잡아주고, 함께하는 동료들과 선후배들이 서로 버팀목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프레시안(최형락)
2학년이 되던 1982년부터 가두투쟁이 시작됐는데 그해 11월 3일, 아마도 최초로 가두에서 성공적으로 투쟁을 했다고 이야기되는 날이다. 차도를 메우고 스크럼을 짜고 5분에서 10분 이상 구호도 외치고 달리기도 했는데, 그러던 중 경찰에 잡혔다. 여자이고 초범(?)이라는 이유로 하루만 있다가 나왔는데, 동기였던 남자 친구들은 강제징집을 당했다. 그 중 한 친구는 독자이기도 했고 몸이 약해 군을 면제받는 친구였는데, 이 친구도 군대에 끌려가 그 다음 해에 죽었다. 결국 '자살했다'는 식으로 가족들에게 통보됐는데, 그럴 정황이나 이유가 전혀 없고 사인도 밝혀지지 않은 의문사 중 하나로 남았다.

내게는 이런 여러 상황이 늘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진실에 천착해 가면서 독재체제가 가지는 논리와 억압구조를 알게 되고 동시에 거기에 저항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한순간에 된 것은 아니었고 반복되는 갈등 속에서 단련되면서 갈등의 폭 또한 작아졌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란 시가 있다. 참 좋다. 두려움이 왜 없었겠나. 그런데 늘 그렇게 흔들리면서 서로 기대면서 그렇게 이겨왔던 것 같다.

- 20대의 여성들이 보편적으로 누리고 꿈꾸는 것들이 있다. 연애도 하고, 외모도 가꾸고, 문화생활도 즐기고 하는 것들을 일정 정도 포기하면서 20대의 청춘을 보냈다. 다시 돌아간다면 운동을 또 할 것인가.

그런 시대적 상황이라면 운동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20대 여성들만 꿈꾸는 게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 문화 향유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본능적 욕구가 있는 것이고 젊음의 열정이 가득한 20대가 그런 욕구도 가장 클 수 있을 텐데, 그런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시대였다. 운동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가 군대 가서 죽고, 고문당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외모를 가꾸고 문화생활을 하고 그런 것이 사치처럼 느껴지거나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껍데기 자유'가 있던 시절이었다. 같은 상황이라면 지금도 여전히 선택은 같을 것이다. 20대의 특권이든 인간의 기본적 문화향유권이든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이 이런 것을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되어야 자유롭게 만끽할 수 있는 게 아닐까.

- 남편이 수배자 신분일 때 프러포즈를 받았다. 결혼식을 위해 가족들의 비밀 참석 작전이 필요했다고 들었다.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 아니었나. 결혼식 뒷이야기가 궁금하다.

남편은 학생운동을 함께했던 동지였고 그렇게 만나 사랑을 하게 됐다. 남편이 1985년에 학생운동조직사건의 배후로 연루돼 수배자 신세가 되었다. 같은 사건으로 수배된 후배들은 모두 잡혔고 마지막으로 남편만 남은 상태였다. 1985년에서 1987년은 고문이 가장 심했을 때라 연루됐던 사람들이 모두 구속되어 고문을 받아 모든 알리바이가 남편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잡혀 들어가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혼해서 이 남자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냥 가만히 뒀어도 안 죽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웃음).

그때는 옆집 남자가 직업도 없이 월세를 내고 살면 수상히 여겨 신고하던 시대였다. 의심되는 사람이 있으면 신고를 하라는 선전을 하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잡혀가지 않고 살 것인가를 고민하다 결혼이라는 걸 생각해 낸 것이다. 일단 부부가 같이 살면, 신분상의 의심은 받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현장에서 일해 봐야 한 달에 10만 원을 채 못 버는 상황에서 활동하는 것조차 힘들었기 때문에 결혼해서 들어오는 축의금으로 수배 도피자금을 마련하자는 생각도 있었다.

연애 관계가 유지되고 발전하면 언젠가 결혼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지만, 그 시기에 결혼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단지 같은 신념과 지향을 가지고 함께 운동하는 동지이자 앞으로 함께 살아갈 사람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처음 결혼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일주일 정도 고민했지만, 하기로 작정을 하고 집에 통보했다. 내가 워낙 낙천적이고 어떤 결정을 하면 그냥 하는 편이다.

- 주변이나 집에서 깜짝 놀라지는 않던가?

부모님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나. 그 전에 남편을 한두 번 보긴 했지만, 결혼할 사람이 될 줄은 그리고 그렇게 금방 결혼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셨다. 하지만 결국 허락해주셨다. 그동안 대학에서 운동하면서 부모님과 계속 갈등을 겪었고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이해해주시니 감사했다. 그동안의 우여곡절 속에 부모님도 '말려도 안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못하게 해봐야 다른 사고만 더 칠 거다'라는 생각을 하셨을 수도 있고(웃음).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부모님도 전두환 독재 치하에서 나를 포함한 당신의 아들딸들이 겪는 아픔과 고통을 조금은 이해하셨던 것 같다.

딱 2주 만에 결혼 준비를 했다. 당시 시댁과는 전혀 만날 수가 없어 최소한 친정 쪽 친척들에게만 알리고 엄마가 다니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그땐 지금처럼 통신수단이 없어서 남편이 공중전화로 전화해서 벨이 몇 번 울리면 끊었다가 다시 받는 암호 같은 것으로 시댁에 알렸다. 시부모님들이 그 전날 집에서 나와 다른 친척 집에 가서 주무시고 각자의 작전으로 미행을 따돌려 결혼식장에 오실 수 있었다. 남편은 가명으로, 나는 내 이름으로 결혼식을 치르고 친구들은 밖에서 경호를 섰다. 그렇게 결혼식에서 받은 축의금으로 우리는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한 달이 되니까 부모님에게도 미행이 붙고, 나도 함께 수배자가 됐다. 1989년 말 노태우 정부 때 수배해제가 될 때까지 햇수로 4년 정도를 그렇게 수배 부부로 살았다.

- 스무 살 이전의 삶과 스무 살 이후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동안 익숙했던 것에서 새로운 환경을 선택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가.

아버지가 은행 지점장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은 시기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보증으로 크게 사기를 당한 바람에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6~7년 정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상황을 겪으면서 어려운 사람들, 없는 사람들, 먹고 살 방법이 없어 고통 받는 사람들, 그게 나를 포함해 내 형제, 내 부모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프레시안(최형락)

노동운동을 하면서 현장에 같이 들어갔던 친구들이 '이건 나의 길이 아니구나' 하면서 포기하고 출판운동을 하거나, 재야 시민단체 운동을 하는 방식을 찾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그런 결정도 존중했다. 내가 현장에서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이 물려주신 체력과 가정의 어려운 경제 여건에서도 부모님과 언니들로부터 받았던 사랑과 신뢰, 그 안에서 키웠던 자신감과 자존감이 스스로 그것을 선택하고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지금껏 나와 굉장히 다른 삶을 살아온 남편을 만나면서였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어렵게 살았지만, 그의 삶에는 항상 치열함이 있었다. 내가 포기하려하고 나약해질 때 남편이 늘 용기를 주었다.

- 보통은 '남자가 여자를 지킨다'라고 마음먹는 것이 대부분이다. 여자이지만 남자를 지키기 위해 결혼을 결심했던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나.

어렵게 독학하다시피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육 남매 중 처음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그만큼 형제들과 부모님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아들이었다. 집에서 행정고시를 보길 원해서 잠시 고민했다가, '행시 봐서 공무원으로 맘 편히 사는 것이 참 허망한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고 학생운동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쓸데없는 갈등을 잘 안 하는 사람이다. 잃어버릴 게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내가 느꼈던 두려움은 내가 운동을 함으로써 포기해야 할 것,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안정적이고 편한 삶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갈등의 순간에 있을 때마다 남편의 한마디가 내게 자유를 얻는 결단을 할 힘이 됐다. 물론 결혼하면서 삶이 변하고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이 생겼지만, 그것 또한 내가 받아들이고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계관, 신념, 가치 등을 함께하는 동반자가 있다는 것과 그것이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그런 단단함이 더 큰 생명력을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 1998년 고(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보건복지부 장관, 민청련 의장 역임)의 후원회 사무국장에서부터 시작하여 2002년 보좌관을 하면서 국회에 발을 들였다. 지금껏 해왔던 운동이 아닌 실제 정치를 어떻게 하기로 결심한 것인가.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하는 것과 정치를 하는 것은 내게 연속선에 있는 일이었다. 운동은 그 안에 구호와 선언, 주장이 있어 (거칠게 이야기하면) 이것에 대한 책임성보다는 사람들이 이 이슈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소 투쟁의 방식이 제한돼 있고 선도적이다. 반면 정치는 실제로 제기된 사회적 현안에 대해 구체적인 책임을 갖고 법과 정책으로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내 주장과 상대 주장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타협해서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하는 거다. 운동을 할 당시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사명감으로 기본권, 인권, 노동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사회·한반도 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운동을 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근태 의장과 함께 일하면서도 내가 직접 정치인이 돼서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를 통해서 사회를 바꿔나가고 구체적인 정책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김근태'라는 사람은 우리 역사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의 대표성을 가진 상징적 인물이었다. 김근태 의장처럼 원칙과 철학이 분명하고 합리적인 판단력을 지닌 분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의 꿈을 폭넓고 깊이 있게 그리며 우리 사회를 바꿔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 분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적 가치를 위해 실천해 왔던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곳곳에서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되면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서 김근태를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뒷받침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런데 2002년 열린우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김근태 의장의 양심고백으로 중도사퇴를 했고,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경선에서 이겨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후 내가 직접 정당에 들어가서 그 안에서 김근태 의장과 함께할 수 있는, 더 많은 사람과 더 큰 힘을 만드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04년 1월 열린우리당 공채 1기로 당직자 생활을 시작했다.

- 김근태 의장은 어떤 분이셨나?

한 번도 당신의 원칙과 신념을 포기한 적이 없었던 분이다. 더디 가더라도 그래서 욕을 먹더라도 그 가치의 끈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분이셨다. 그래서 많이 배웠다. 지금도 늘 '내가 그분처럼 정치를 할 수 있을까'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다. 김근태 의장을 통해 정치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을 축복이라 생각한다.

- 민주당에 있으면서 민주당이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통합민주당 등으로 분열하고 새롭게 다시 조직되는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 왔다. 자기가 속한 당이 때로는 분열과 갈등을 반복하고, 또 새롭게 통합하고 재정비되는 속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그동안 민주당은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긴 했지만, 2002년까지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아주 큰 어른 한 분이 거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당을 운영해왔다. 당시 당내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몇몇 정치인들이 총재가 명령하고 모든 공천권을 행사하는 정당구조의 폐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다. 물론 군부독재 하에서 야당이 명맥을 유지해 왔던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리더십에 의존해왔던 바가 크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후, 제왕적 총재를 중심으로 한 당 구조에 본격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당시 정치개혁과 정당개혁이 시대정신이자 화두였다. 2002년 대선을 통과하면서 우리 정치의 권위주의적 정당문화를 깨고, 정치자금과 관련된 문제를 투명하게 바꾸고 법으로 제도화하는 측면에서 많은 진전이 있었다.

그 변화를 계기로 원내 정당화, 상향식 공천, 당원중심 정당 등을 과제로 개혁당과 민주당에서 나온 사람들이 합쳐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였다. 정당 민주화를 이루려 했던 큰 도전이자 실험이었으나 집권 여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 내 구조와 관련한 개혁은 실패했다. 구체적인 개혁 방식과 이것에 대한 내부의 충분한 공감, 그리고 대안에 대한 구성원 모두의 합의가 매우 부족했던 것 같다.

- 원내 정당화, 상향식 공천, 당원 중심 등의 다양한 의견들이 정당 내 존재한다. 정당 차원 어떤 것에서부터 무엇을 실현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리 당내의 구조는 새로운 젊은 리더들을 키우지 못한 구조였다. 누군가 성장하고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다른 나라에서 당내 경쟁을 하는 과정을 보면 서로가 가지고 있는 각자의 재능을 바탕으로 조직에 능한 사람, 홍보에 능한 사람, 선거에 능한 사람이 있는데 이들의 합의를 통해 한 사람을 대중 정치 후보로 내세운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을 분담한다. 젊은 리더 후보군들이 자유롭게 내부에서 경쟁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리더의 교체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런 과정이 거의 없었다. 누가 더 큰 인물이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몇몇 분을 중심으로 계파정치로 정당 내부의 구조가 이뤄지다 보니 진보개혁적인 젊은 리더를 키우지 못했다.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민주주의'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서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민주 정부 10년 동안 신주유주의적 시장경제는 훨씬 강화됐고, 그 결과 양극화는 더욱 심화됐다. 그걸 정치에서 책임져 주지 못했다. 그래서 집권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국민에게 비판받고 외면당했고, 결국 대선에서 졌다. 그래서 그때부터 경제민주화를 화두로, 5년 뒤 대선을 나름대로 준비했는데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모방 내지는 선수를 쳐버렸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를 강조한 지 6개월도 안 돼 거의 아무런 약속도 지키지 않은 채 오히려 경제활성화 정책을 펴고 있다. 마음이 매우 착잡하고 속상하다.

ⓒ프레시안(최형락)

우리가 5년 후 수권 정당으로 국민의 신뢰를 받고 정권교체를 이뤄내려면 나를 포함한 의원들이 정당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고 밑에서부터의 조직들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 내용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동료의원들과도 치열하게 토론하고, 실천해야 한다.

- 민주당은 얼마 전 을(乙)을 위한 길(路)을 뜻하는 '을지로 위원회'를 출범했다. 절실하게 필요했던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을만을 위하는 것으로 보며, 갑(甲)을 적대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정치권 일각의 시각도 있다. 을지로 위원회가 추구하는 갑을관계는 무엇인가.

을이 있다는 것은 갑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갑 역시 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희생이나 강요만으로는 관계 자체가 형성될 수 없다. 불평등한, 불공정한 계약거래관계가 지금까지 갑을관계의 문제였다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갑을 상생관계'는 평등하고 공정한 계약 거래 관계, 즉 '더불어 함께 사는 관계'이다. 갑이 가졌던 그동안의 특권, 일방성, 반칙, 이런 것을 제대로 바로 잡아 놓는 게 갑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나 갑이 일방적인 횡포를 유지하면서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건 공멸하는 길이니까. 을 없이 갑 없고, 갑 없이 을 없다. 우리는 갑을 적대시하는 게 아니다. 갑과 을이 공생하는 관계,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하고 평등한 관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원칙과 상식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 2012년 대선 당시 '경제민주화'가 시대의 화두였다. 이를 위해 어떤 것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보나.

지난해 4.11 총선 선거유세 당시, 당장 먹고사는 게 힘들고 부채 더미에 앉아 고통 받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그들에게 공약했던 것은 '먹고사는 문제를 제도적, 정치적으로 감당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노동에 대한 부당한 임금과 대우, 비정규직 문제 등을 해결하겠다는 포부였고 약속이었다. '경제민주화'라고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성장 동력을 끌어낼 것인지, 발전 전망과 로드맵이 확실하게 있어야 한다. 더불어 우리나라의 역사와 사회구조를 고려해 우리 사회에 적합한 복지모델을 구체화하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재원과 구조, 우선순위 등이 정책적으로 합의되고 실현되어야 한다.

최근 박근혜 정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경제민주화는 다 끝났다. 이제 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학교 비정규직문제 등에 대해 근본적 해결은 하지 않은 채 생색내기만 하면서 넘어간다. 이것을 볼 때 박근혜 정부는 계속해서 경제민주화에 역행하고 있으며, 결국 이명박 정부 때 그랬던 것처럼 대기업과 재벌의 논리를 대변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 어려운 것은 언론 환경이다. 공영방송이라고 하는 KBS조차 '51대 49'의 구조 속에서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 이미 눈치 보기를 하고 있다는 것의 다른 표현 아닌가. 양쪽에서 질타를 받고 있기 때문에 '51'측을 의식하는 보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니 다른 방송들은 어떻겠는가. 이명박 정부 때 미디어법 등을 통해 언론이 정권에 장악되는 과정을 겪었다. 최근 박근혜 정부의 민주주의·경제민주화·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모든 사항이 퇴행·역행하고 있고, 마치 독재를 예고하는 인사 등을 보면서 '우리가 들고 싸울 수 있는 무기가 대체 무엇일까' 하는 위기의식을 느낀다. '남은 국회의원 임기 동안 수권정당을 만들기 위해 계획적이고 집요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결의가 있는 한편, '그것을 하기까지 매우 어렵고 지난한 고통스러운 과정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우리 사회는 급속한 산업화 과정을 통해 성장해 왔고 10여 년 이상을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구조화됐기 때문에 이대로 가다간 양극화는 더 심화 될 것이고 서민의 삶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야당으로서 여당을 계속 견제하고 비판하면서 우리 내부에서는 이 구조를 어떻게 바꿔낼지에 대한 전망과 방안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만들고 국민적 합의를 끌어내야 할 것이다.

-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한국 정치 영역에 많은 여성 정치인이 역할을 하고 있다. 남성 리더십, 여성 리더십 차원을 떠나 진짜 리더십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나.

김근태 의장이 항상 말하며 몸소 보여줬던 것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안에 대한 결론을 내리거나 본인 주장을 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 '경청한다'는 것은 소통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공감을 형성한다는 거다. 진정성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지역에서 사람을 만날 경우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 얘기를 들어주길 원한다. 그 문제가 해결되건 안 되건, 진심으로 귀 기울여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고 느끼면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문제가 반은 해결된 것처럼 고마워한다. 나는 정작 아무것도 해 준 게 없고 옆에서 들어주기만 했을 뿐인데 말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을 지키기'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불이익을 당해 억울하고 도움을 받을 곳도 하소연할 데도 없었는데 우리가 '을 지키기'를 한다고 하니까 찾아와서 여러 이야기를 한다.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 자체만으로도 고마워하고 속 시원해한다.

진심으로 공감하고 소통하면서 함께 희망을 만들어나가는 리더, 그런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어머니'는 든든한 후원자라는 말도 되지만, 내 꿈의 원인 제공자라는 말과도 통한다"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여기서 어머니는 시어머니를 이야기한다고 들었다. 시어머니와 어떻게 이런 끈끈한 정을 주고받을 수 있나.

어머니는 산업화 시대에 노동자로 6남매와 가정경제를 책임지며 어려움 속에서도 당당하게 산 분이다. 당신의 어려웠던 삶 때문에 나를 이해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것 같다. 더 크게는 당신의 아들이 수배생활을 할 때 경찰에게 협박도 받고 미행을 당하기도 하면서 우리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먼저 이해하게 되신 것 같다. 노동자로서의 삶과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이 삶 속에 고스란히 당신 몫으로 체화되어 지금은 나보다 훨씬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계신다. 매일 신문과 뉴스를 보고 '민주당, 그렇게밖에 못하냐'라고 야단도 친다(웃음).

김근태 의장께 배웠던 철학과 가치 지향과 품성·태도를 배우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다른 한 축에서는 어머니의 삶을 되돌아보면, 같은 여성으로서 또 내가 모셔야 할 어머니로서 우리 시대 우리 사회를 이끌어 온 어른으로서 우리 어머니가 갖는 존재감과 의미가 나에겐 매우 각별하다. 이제 팔순이 넘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더위에 힘들어하셔서 많이 걱정된다. 마음에 부담이 더 된다. 힘든 일을 하시면 안 되는데, 나는 매일 나와서 이렇게 살림은 '나 몰라라' 하고 있으니 이런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나 싶어서….

- 유은혜 의원의 삶을 포함한 모든 인간사가 그렇듯 그 안에는 세대별 상황과 아픔, 사랑과 이별 등이 존재한다. 이것을 지나고 있는 동시대의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최근 중·고등학생들이나 대학생들이 촛불집회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대견스럽다. 하지만 우리 세대가 과거에도 이런 사회를 우리 자식들에게는 물려주지 말자고 나름대로 투쟁하면서 청춘을 바쳐 왔는데, 지금 또다시 우리가 이 청춘들과 같이 거리에서 투쟁하고 있다는 게 너무 미안하고 부끄럽다.

ⓒ프레시안(최형락)

그런데 과거 우리는 함께 힘을 모아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오면서 87년 6월 항쟁을 이뤄 낸 경험이 있다. 거대한 벽을 한 번 뚫어 본 적이 있는 것이다.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지만, 사회의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경험했다. 반면, 지금 20대 청년들은 취업경쟁이다 뭐다 해서 매우 개별화돼 있다. 이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을 목표로 해서 잉여나 혹은 루저(looser,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다.

지금 청년들에게 닥쳐 있는 벽은 우리 때보다 더 절박한 생존의 문제와 가까운 거대한 벽일 수 있다. 하지만 경쟁을 통해 이기는 것만을 목표로 해서는 이 벽을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이 경쟁의 구조를 변화시킬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독재체제와 스크럼을 짜고 싸웠다면 지금 청년들은 옆에 있는 친구들과 선후배들과 함께 경쟁을 압박하는 이 사회의 거대한 벽을 어떻게 함께 넘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렇다.

- 유은혜에게 자유란?

늘 두려움 속에서 결단하면 자유를 얻고 사랑을 얻었던 것 같다.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 고민과 갈등과 망설임으로 자신과 싸우는 그 순간, 내 나약함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올바른 것, 정직한 것, 정의로운 것에 대하여 결단했을 때 나 자신의 자유와 사랑을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내게 '사랑이란, 자유란?'이라는 물음은 '늘'이라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늘 선택이고 결단이었던 것 같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한림국제대학원 석사 과정 박주연 씨가 진행하고, 정리는 정치경영연구소 손어진 연구원과 정인선 인턴이 맡았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