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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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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18>

이혼, 그리고 시대풍조

필자는 야후 뉴스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접하고 있다. 내용은 잘 보지 않고 제목만 보는 편인데, ‘이혼율이 47.4%’라는 타이틀이 눈앞을 지나갔다. 무슨 말이지 싶어 클릭을 하니, 문자 그대로 두 쌍이 결혼하면 그중 한 쌍은 이혼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니 정말 이럴 수가 있다니!

결혼하려면 서울의 웬만한 중산층 가정의 경우 혼수 장만과 예식장비용 등등 양가 부모의 부담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천만원은 들고, 억대를 넘어서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예식장 비용만 수천만원을 쓰는 경우도 허다하다.

돈이 이처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들어가는 데에는 사실 결혼 당사자들의 이기심도 크게 작용한다. 결국 그 돈이 모두 자신들을 위해 쓰는 돈이고, 자신들의 자산 계정으로 넘어오기 때문에 부모들이야 허리가 부러지건 골절상을 당하건 간에 잠시 눈만 한 번 질끈 감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 또한 일종의 증여이고 상속이며, 그만큼 남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자신들의 인생을 출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리한 젊은이들이고 야무진 젊은이들이라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봐줄 여지가 충분하다.

그런데 그 야무지고 영악한 젊은이들이 어쩜 그렇게 허술할 수가 있을까? 결혼이란 결국 평생을 같이 가자는 무기한의 계약이고, 일생일대의 비즈니스일진대, 왜 그리 짝을 잘못 만나서 그처럼 손쉽게 이혼 도장을 찍고 돌아서고들 있는 것일까? 결혼생활을 유지해 가는 비율이 겨우 절반에 그치고 있다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이혼율이 이처럼 높아진 것은 서구화의 영향도 크지만, 우리 고유의 요인들이 더욱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고, 이를 음양오행의 견지에서 줄여 말하면 지금의 한국 사회가 식상과다(食傷過多)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식상(食傷)이란 음식에 체했다는 말이 아니라, 명리학의 용어인 식신(食神)과 상관(傷官)을 줄여 말하는 것이다. 식신 또는 상관이란 자아(自我)를 외부 세계로 투사하는 힘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저 사람은 재주가 있어’ 라고 말할 때의 그 재주와 또 주관이 강하다고 할 때의 그 주관에 해당된다. 재주나 주관이 강하면 그로 인한 장단점이 있기 마련인데, 지금의 상황은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재승덕(才勝德)이란 개념이 있는데 재주가 그 사람의 덕성을 앞서갈 때, 흔히들 재주부리다가 망했다든가 또는 그 재주가 오히려 위험하게 느껴지는 경우를 말한다. 주장이 강하면 불요불굴하여 마침내 자신의 뜻을 관철하여 커다란 성공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주위 사람과 인화하지 못하여 따돌림을 받거나 외면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한국 사회는 분명 재승덕한 면이 강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위 ‘튄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그 튄다는 것에 대해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튄다는 것은 남들이 체면이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잘 하지 않는 파격적인 언행을 할 때 쓰는 말이다. 튀는 언행은 평상시에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니건만 우리는 오로지 튀려고 안달이니 걱정인 것이다.

사람들이 필자에게 가장 자주 묻는 것 중에 하나가 이혼하는 운명이 따로 있나요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필자는 물론 이혼하는 운명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 풍조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다고 점을 상기시켜준다. 그리고 현 시대 우리의 풍조는 앞서 말한 식상과다의 풍조인 것이다.

원래 우리 민족은 오행 상으로 갑목(甲木)이라 식상(食傷)이 강한 사람들이다. 예로부터 노래와 춤을 즐겼다는 것이 그것을 반증해주고 있다. 다만 조선시대 이후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주요 덕목으로 하는 유교의 이념적 지배 하에서 억눌려 있던 것이 민주화와 산업화 이후 그 반작용으로 지나치게 강조되어 최근의 이혼율 급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는 단순하게 서구화의 영향으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며, 길게는 원 우리의 민족성에 기인하는 면이 상당히 크고 그렇기에 이를 서구적 현상이 아니라 한국적 현상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사주에 식신 또는 상관이 강한 사람은 이혼할 가능성이 크다. 식신과 상관이 강하다는 것은 남들이 어려워하거나 주저하는 일을 감행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혼 역시 함부로 하기 어려운 일이며, 이혼을 한다는 것은 그럴만한 용기가 있다는 얘기가 된다.

특히 젊은이들은 피가 뜨겁고 담이 커서 성급한 면이 있기 마련인데, 이게 아니다 싶어서 이혼이라는 어려운 결정도 쉽게 내리게 된다. 여기에 시대 풍조가 결정적으로 한 몫을 거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혼율 급증의 배경인 것이다.

이혼율이 낮던 시절이나 지금처럼 높은 시절이나 사실 결혼 생활이란 인내와 아량이 없이는 평생을 함께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아내나 잘 생긴 남편도 몇 년 살고 나면 그저 그렇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에 그 다음부터는 서로간의 믿음과 인내, 그리고 아량이나 배려가 있어야 결혼을 유지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금방 싫증을 내고 금방 실망하는 풍조로 흘러가다 보니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혼할 때는 다 이유가 있다. 남편의 바람 행각이나 경제적인 어려움, 성격 차이 등등이 일반적인 이유이지만, 그런 시정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다른 나라나 모두 마찬가지이며 우리라고 특별히 다를 것도 없다. 다만 그런 어려움이나 시련을 참느냐 참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싫어도 참게 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긴 안목에서 사안을 바라보기 때문인 것이다. 참지 않는다는 것은 그래서 급하고 눈앞의 것만 바라볼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또 식상이 강한 사람은 호기심이 많고 이런저런 욕망도 강해서 더더욱 참기 어렵다. 그래서 이혼하는 사주의 유형은 이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만, 오늘날의 이혼율 급증은 여기에 보태어 사회 자체가 식상이 강하다 보니 이혼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살다가 싫어서 헤어지는 것을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는 법이지만, 자라나는 2 세들에게는 사실 대단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 이런 정도로 이혼이 많아질 바에는 결혼도 간소하고 치르고 비용도 적게 들어야 정상이다. 우리 부모들이 정말 허리가 휠 정도로 부담스럽게 돈을 쓸 때에는 자녀가 잘 살라고 한 밑천 만들어주는 것인데, 절반의 확률이라면 그 정도의 돈을 투자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안 그래도 아기를 적게 낳는 바람에 가임 여성 당 출산율이 1.17명이라고 한다. 이 얘기는 두 사람이 만나서 1.17명을 낳는다는 논리다. 이는 급격한 인구 감소를 말해주고 있다. 즉 1.17을 2로 나누면 0.59가 된다. 이런 식으로 두 세대, 육 십 년만 지나면 0.342가 되어 우리 인구는 근 1/3로 줄어들게 된다. 이것만해도 나라가 망하는 꼴인데, 거기에 이혼율마저 이렇게 되면 새로운 세대는 수도 적고 정서적으로도 불안정해서 나라의 장래가 심히 우려되는 것이다.

좋은 결혼의 기본은 교제기간을 최소한 6개월 정도는 가지라는 것이다. 요즘 하루에 열 명은 만나봐야 짝을 찾을 수 있겠다는 결혼 중계 회사의 광고가 있지만 그것은 사실 어리석은 일이다. 한 상대라도 서로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상대를 파악하는데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글을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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