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엔 '산모가 아기를 삶아먹었다'는 사실 같은 소문이 떠돌았다고 한다. 수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그곳은 가난한 동네, 가난하기 때문에 범죄가 많은 동네, 무서워서 가지 않고 기피하는 동네였다고 한다. 서울시민들의 안녕과 도시미관을 위해 국가가 만든 빈민들의 거대한 정착촌, 성남이다. '가둘 수 없으면 차라리 보이지 않게 하라'는 60~70년대 국가 시책에 의해 빈민들(호남 출신이 대부분이었다)이 격리 수용된 그곳에서 NL 운동의 독특한 분파인 경기동부연합이 자라났다.
90년대 들어 해방 이후 최대의 연합조직인 전국연합의 상층부가 민주당 내지 민주당 선호의 시민운동 세력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남은 세력은 더욱 급진화됐다. 성남을 중심으로 군대를 방불케 하는 생활과 투쟁의 공동체가 형성됐다. 스스로를 보전하기 위해 교조화, 지하화했다. 현실과 유리돼 북한의 실상을 외면하는 순간 그들은 과거의 기억에 고착됐고 그들의 운동은 퇴화했다. 성남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외대 용인캠퍼스에서 대학 생활을 한 이석기 의원의 삶의 궤적은 국가로부터 40년 간 배척된 도시 성남을 닮아있다. (참고 : 논문 '경기동부연합의 기원과 형성, 그리고 고립'. 임미리 한국학중앙연구원)
논문은 경기동부연합이 스스로를 집단 유폐시키게 된 연원을 성남이라는 지역의 역사에 주목해 분석한다. 아울러 한때 같은 당에서 활동했던 동료들은 물론이고 국민 전체를 적으로 돌리기까지, 세상과 그들 사이에 금을 그은 '공범'을 추적한 데에 의미가 있다. 논문의 저자는 "기억을 고착시킨 공범은 바로 국가보안법으로 사상의 자유를 금한 대한민국"이라고 결론짓는다. 또다시 국정원의 올무에 걸린 통합진보당에 대한 여론의 돌팔매질과 달리, 한 정치세력의 탈선을 사회병리로 돌아보게 되는 지적이다.
이번 이석기 사건에 있어 균형점을 찾으려 애쓴 언론들은 '적대적 공생'이라고 규정했다. 억압적 국가기구인 국정원과 시대착오적인 몽상가들 사이엔 서로의 존재를 필요악으로 삼는 적대적 공생 관계가 있다는 거다. 양비론이지만 모범답안이다. 이석기 집단의 거짓 진보 행세를 들추고 국정원이 조장하는 종북몰이의 의도를 조망하는 데에 편리하다. 진보와 보수 양 극단 '꼴통'들의 일탈을 꾸짖음으로써 정치의 정상적 경로를 근엄하게 말 할 수 있는 전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임 씨의 논문과 달리 언론의 관조자적 시점은 불편하다. 국정원의 '광인 사냥'을 힐난하면서도 광인의 존재를 키운 국가와 사회의 책임에 대해선 외면하기 때문이다. 마침 "모든 혐의가 날조"라던 이석기 의원의 발언이 이정희 대표의 "농담" 발언으로 어처구니없게 뒤집히면서 사상의 자유라는 가치로 이들을 엄호해야 할 의무감마저 소멸된 분위기다. 이제 언론은, 가장 자극적이지 않은 경우에조차 이석기 집단에게 원죄를 묻는다. 그들의 이중성은, 북한에 대한 맹목성은, 남한 사회에 대한 폭력성은 원래부터 그랬던 집단이기에 구제불능이라는 얘기가 된다.
적대적 공생론은 정치권에서 보다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냉전 수구세력과 급진 민족주의 세력이 쌍생아로 결합해 한국 정치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논리를 세웠다. 국정원과의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불의의 일격을 당한 야당은 이석기 세력을 쫓아내는 작업부터 서둘렀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정의당조차 '헌법 밖의 진보'라는 명징한 언술로 이석기 의원을 정치적으로 추방했다. 이석기 체포동의안은 그렇게 신속하게 처리됐다.
그러나 이는 국정원이 씌운 내란죄의 옷이 무겁다면서도 국회의 권한 내에서 따져보지 못한 야당, 한때 국가보안법 폐지를 부르짖었음에도 국회의사당까지 넘어온 국보법의 현재적 위력에 무신경한 야당의 속살을 보여줬다. 적대적 공생론으로 포장했지만 실상은 여론 재판에 밀린 결과다. 광인과 한통속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수밖에.
이해한다. "종북세력의 숙주 노릇을 했다"는 새누리당의 정치공세가 민주당으로선 얼마나 억울하기 짝이 없는지. 간난고투 끝에 건설한 진보정당이 시대착오적인 한 분파의 분탕질로 무덤 앞에 서게 됐으니 진보정치인들은 또 얼마나 속이 터지는지. 그러나 적대적 공생론의 밑자락에 서린 이석기 집단에 대한 체험적 분노를 거두지 않는 한, 언론도 야당도 '공생을 위한 적대'로 국정원과 같은 방향을 걷게 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세상과 동떨어진 세력이라도 법의 간섭 없이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자연 소멸되는 과정을 밟는 게 정상적인 국가의 정치라고 아직도 믿는다. 무심결에 용인돼온 '현실정치'란 말이 폭력적으로 기능하는 이 시점에선 그것이 얼마나 비(非)진보적인 용어인지 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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