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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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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14>

김우중과 대우를 돌이켜 보면서

고속성장이란 어휘는 이제 우리 사회에서 망각되고 실종되어 버렸다. 한 때 우리는 전 세계에서 고속 성장의 대명사이기도 했었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우리는 고속성장이란 말을 뇌리에서 깡그리 지워버린 것이다.

고속 성장 시대를 마무리 지은 사건이 바로 지난 1999 년, 대우의 몰락이었다. 아득하고 까마득한 옛 전설만 같은데, 세어보니 불과 4년도 되지 않았다. 하루하루의 일상은 늘 같게만 느껴지지만, 어느덧 우리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니 세상의 변화와 시대의 흐름이 어쩜 이리도 빠르고 무상(無常)할 수 있을까.

대우와 김우중의 이야기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벤처 스토리였다. 벤처다운 급성장이었지만, 고속 질주를 거듭하다가 브레이크 파열로 허공에 산화되어 이제는 어느덧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대우와 김우중의 얘기를 음양오행을 통해 반추해 보는 것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는 것은 결국 현재의 우리를 더 잘 보기 위함이니 말이다.

먼저 김우중 회장의 사주를 보기로 한다. 1936 년 양력 12 월 19 일 묘시 생이니 다음과 같다.

년 丙子
월 庚子
일 乙亥
시 己卯

그리고 우리 나이로 매 7세마다 변하는 대운은 다음과 같다.

07 辛丑
17 壬寅
27 癸卯
37 甲辰
47 乙巳
57 丙午
67 丁未
77 戊申

사주와 대운을 볼 때, 37세 갑진 운부터 발전을 거듭하는 운명이지만, 사업에 손을 댄 것은 그보다 좀 빨랐다. 섬유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32세 되던 해인 1967년에 소속사의 하청기업체와 손을 잡고 대우실업주식회사를 차리게 된다. 그 후 독립한 지 불과 7년만에 규모 면에서 국내 10위권에 드는 대기업으로 급성장하는 신화를 만들게 된다.

그는 70년대, 정부의 중화학 공업 육성책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약 재계의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특히 1974-1975년간은 갑인 을묘 년이라 도처에서 동지를 만나고 사업 파트너를 만나는 욱일승천의 기세였던 것이다.

김우중씨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뒤를 밀어주는 힘이 있었다는 점과 아울러 금융기법에 대단히 탁월한 능력과 식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금융이 오행 상으로 목(木)에 해당되는데, 김우중 본인의 일간이 을목(乙木)이라는 점만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김우중은 본인이 금융에 일찍 눈을 떴기에 그의 주변에는 금융에 밝은 뛰어난 참모들이 포진하게 되었고, 그들이 그룹의 사업 확장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 수요를 정말 절묘하게 해결해내었던 것이다.

그의 고속 질주는 급기야 1993년에 가서 '세계경영'을 선언하게 되었던 바, 그 내용은 '해외산업기지 1000개 이상, 총매출액 1780억 달러(해외 매출 890억 달러), 총 고용인력 35만명(해외 현지인력 25만 명) 이상을 달성하겠다'는 야심에 찬 목표였다. 1993년은 계유(癸酉)년이라 을목 일간인 김우중에게는 계수가 와서 편인(偏印)운이 되는데, 편인운이란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하게 되는 운이다. 그래서 그 때 얻은 발상이 바로 세계 경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때가 바로 김우중과 대우가 공중 붕괴로 접어드는 초입이었다. 그 까닭은 이 때 그의 나이 58 세였는데, 바로 57 세부터 시작되는 병오(丙午) 대운에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1992년 12월 7일 대설(大雪) 절기부터 병오 대운이 된다.)

전문적인 얘기는 피하기에, 간략하게 설명하면, 병오 대운의 의미는 김우중에게 있어 평소의 냉철함과 조심성을 상실하게 되고 그간 알게 모르게 도와주던 사람들의 지원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더 줄여 말하면 너무 급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안 그래도 늘 100 마일로 달려오던 차가 병오 대운부터는 120마일로 가속한 셈이다.

하지만 1993년부터 1997 년까지의 4년간은 년운(年運)들이 그나마 받쳐주고 있어 별 탈이 없었다고 할 수 있으며, 오히려 IMF를 계기로 더욱 고속 경영을 강화하는 추세로 나아가게 되었다.

IMF 위기 당시 김우중 회장만이 유일하게 자신만만해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확대 경영을 외쳤고, 그런 그는 1998년 말에 출간된 자신의 책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자신의 인생 철학을 젊은이들에게 내비침으로써 일약 국민적인 스타로 자리 잡았다. 이는 그가 몰락하기 불과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의 일이니, 세상사 얼마나 뜻밖으로 흘러갈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실상 김우중의 운세는 1998 년부터 위기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계기는 GM과의 협상이 난관에 봉착한 일이다. 그 해 여름 경신(庚申), 신유(辛酉)월에 금의 기운으로부터 침해를 받아 뇌에 이상이 생겼고 그 바람에 겨울 무렵 그는 뇌수술을 받았던 바, 그것이 그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수술 후 촌음도 쪼개어 쓰는 평소의 그답게 충분한 치료도 받지 않고 경영 일선으로 돌아갔지만, 사태는 시시각각 엄중해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기업가로서 마지막을 맞는 순간을 따라가 보자.

대우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자금문제였다. 일간이 을목이라 금융의 귀재 소리를 듣던 그가 금융과 자금 문제에 말려든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일은 장점이 바로 단점이 되는 경우가 실로 허다하다. 나무 타던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질 때 위기가 발생하듯이, 자금에 관한 한 세인의 상상을 초월하던 그가 자칫 방심한 탓이었을까 대우의 자금 악화설이 돌면서 위기로 내몰린 것이었다.

갑자기 돈줄이 막혔다. ꡒ우리 돈도 좀 써달라는 유럽 은행들의 요청이 끊이지 않고 있다ꡓ고 말하던 그에게 갑자기 모든 돈줄이 일시에 막혀버린 것이다. 책이 나와 일약 스타덤에 오르던 그 시점부터 대우는 악성 소문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1999 년 기묘년 6월에 가서는 6조원의 대출금이 연장되지 않고 회수되어 버렸다. 이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당시의 음양 오행을 보면 기묘년 경오월이 된다. 바로 금(金)의 기운이 들어오기 시작하지만, 이를 완충해 줄 수(水)기운이 없으니 그대로 구석에 몰릴 밖에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더 이상 방도가 없음을 깨달은 그는 7월, 신미(辛未)월이 되자 극심한 압력과 스트레스 속에서 그만 손을 들고 만다.

IMF 라는 혹독한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고속 질주를 거듭하면서 '세계를 경영하겠다' 고 외치면서 당시 실의에 젖어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던 그의 드라마가 종영(終映을 맞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ꡐ세계경영ꡑ은 단순히 대우의 전략이라는 차원을 넘어서고 있으며, 이제 한국경제의 확실한 대안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애국적 차원에서 사명감을 갖고 추진되어야 하며, 국가 경쟁력과 수출증대, 고용확대를 위해 세계경영을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말은 1997년 대우의 새해 최고경영자 회의에서 그가 한 말이다. 1997년은 대우가 생겨난 지 30 년 된 해다. 언젠가 말했듯이 30 년은 60 년 한 갑자의 절반이기에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사람의 운은 아무리 좋아도 30 년을 넘어가는 법이 별로 없다. 김우중도 30년 충운(衝運)에서 그만 실족해 버린 것이다.

당시 '대우는 2005년에 가서 국내 최대의 그룹이 될 것' 이라는 기사도 있었듯이, IMF 한파 속에서도 감량이나 구조조정과는 거리가 먼 대우는 재계 인사들과 일반 세인들에게 가히 경이로움이자 경악 그 자체였다. 그러던 것이 불과 2년 뒤에 가서는 세계 경영이 무모한 도박으로 비하되었고, 외줄타기의 곡예 경영이 실패하고 있다는 혹평을 들어야 했다.

그간의 찬사가 일시에 경멸로 돌변해 버린 것이니, 세상사 원래 그런 법이라고 해야할는지!

김우중의 얘기는 한 때 유럽을 호령하던 나폴레옹과 닮은 점이 실로 많다.

대우는 큰 기업이고 그룹이었지만, 지휘 구조는 아주 단순했다. 김우중 스스로가 말했듯이, "내가 모든 결정을 내리니까요."에서 알 수 있듯이 덩치는 컸지만 실은 김우중 스스로가 CEO 였고 장수였던 셈이다. 나폴레옹 역시 그랬었다. 거대한 프랑스 육군이었지만 모든 것은 나폴레옹이 진두지휘 했었다.

결국 그는 자동차로 몰락했지만, 자동차야말로 그의 최대 역작이었고, 경영의 최전선 목표였다. 자동차를 앞세워 그는 세계 경영의 골격을 짰고, 그것이 자금 문제로 말려들자 낙마하고 말았으니, 이는 연전연승의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결국 고배를 마신 것과 같다.

김우중은 그 행동 양상을 볼 때, 대단한 낙관주의자임이 분명하다. 낙관하지 않으면 그토록 무모해 보이는 경영 방식을 택할 리도 없었을 것이다. 나폴레옹 역시 낙관주의자였다. 또 김우중은 철저하게 계산된 모험을 즐기는 자였고, 나폴레옹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의 실패 이유를 말하라면 아주 간단하다. 계산상에 착오가 있었던 것이라고.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들어간 것이 몰락의 원인이 되었듯이 그 역시 세계 경영에 들어간 것이 결국은 실패의 원인이 된 셈이다. 결국 그는 여러 국내외 자동차 메이커들로부터 집중 견제를 당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이는 정글과 같은 사업의 세계에서 사실 누구를 탓할 것이 없다 할 것이다.

한 때, '역사는 꿈꾸는 자의 것이다. 꿈을 공유하는 민족은 세계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며 강한 신념을 펼치던 그가 좌절한 것은 결국 우리의 좌절이기도 하다.

물론 그 역시 한국적 상황에서 사업을 했던 만큼 정치와 유착되었고, 거액의 검은 거래가 오갔을 것이다. 하지만 꿈을 쫓는 사업가로서 그의 좌절은 실로 아쉬운 바가 있다.

그는 1970년대부터 다른 대기업들이 진출하기 꺼리는 동유럽이나 베트남,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해외사업 확장에 나서 큰 성과를 올렸으며, 자동차 현지공장으로 전략 목표를 설정했던 폴란드와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을 현 시점에 와서 평가해 보면 앞날을 보는 그의 눈이 얼마나 탁월한 지 선명히 드러난다.

그래서 그가 조금만 더 신중하게 경영했더라면 오늘날 대우자동차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의 고속 성장 신화는 종말을 맞이했다. 새로운 흐름으로 접어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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