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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국가와 재벌 공화국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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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국가와 재벌 공화국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이정전 칼럼]<86> 경제 민주화 포기한 '기업 국가'

선거에 관한 정치학 이론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이론은 이른바 '중위투표자이론'일 것이다. 여기에서 '중위투표자'란 중간에 위치한 유권자를 말한다. 예컨대 보수성향의 강도에 따라 차례로 줄을 세운다고 하면 한쪽 끝에는 극좌, 다른 한쪽 끝에는 극보수가 서게 되는데, 이 양 극단의 중간에 위치한 투표자가 중위투표자가 된다. 중위투표자이론은 과반수 의사 결정 방법을 택할 경우 바로 이 중위투표자가 투표의 결과를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서, 보수적 정책, 진보적 정책, 중도적 정책의 세 가지 정책대안이 있으며, 중위투표자는 이중 중도적 정책을 지지한다고 하자. 중도적 정책과 진보적 정책을 놓고 투표한다면, 보수진영은 진보적 정책보다는 차라리 중도적 정책을 더 선호할 것이므로 결국 중위투표자가 지지하는 정책이 과반수의 표를 얻어 채택된다. 중도적 정책과 보수적 정책을 놓고 투표를 한다면, 진보진영은 보수적 정책보다는 차라리 중도적 정책에 표를 던질 것이므로 결국 중위투표자가 지지하는 정책이 과반수의 표를 얻는다. 보수적 정책과 진보적 정책이 맞붙는다면, 중위투표자가 그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투표결과가 결정된다. 그 어느 경우든 중위투표자가 선호하는 대안이 채택된다.

이와 같이 중위투표자가 선거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양당 제도를 택하는 민주주의에서는 각 정당이 서로 중위투표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되도록 자신의 선거공약을 이들의 구미에 맞추려고 애를 쓰게 된다. 이렇게 두 정당이 중위투표자를 놓고 경쟁하다 보면 이들의 선거 공약이 서로 비슷해진다는 것이 중위투표자이론의 중요한 시사점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선거 때마다 나타난다. 지난해 대선 때에도 새누리당이나 민주당 모두 똑같이 재벌 규제와 경제 민주화를 외쳤고, 검찰 개혁, 일자리 창출, 사회복지 증대, 중산층 살리기 등을 약속하였다. 이 공약들 모두 중위투표자들이 지지하던 것들이다. 결국, 양당의 선거 공약이 각론만 약간 다를 뿐 총론으로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선거 공약만 보면 어느 것이 새누리당 것이고 어느 것이 민주당 것인지 알 수 없다는 푸념이 나왔다. 보수층은 새누리당을 얄미워했고, 진보진영은 민주당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중위투표자이론에 의하면 이들은 소수인 탓에 선거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중위투표자는 대체로 중산층이다. 그리고 대체로 중산층이 국민의 과반수를 차지한다. 대수 법칙에 의하면, 소수 견해보다는 다수 견해가 옳을 가능성이 더 높다. 따라서 중산층의 견해가 보수 진영이나 진보 진영의 견해보다 더 옳을 가능성이 높다. 중위투표자이론이 옳다면, 양당 체제의 민주주의는 결국 국민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중산층의 뜻을 받들어 올바른 정치를 하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양당 체제의 민주주의 정치가 그런대로 바람직하게 작동하는 정치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가 보면, 중위투표자이론은 왠지 '탁상공론'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선거가 끝난 후 지금까지의 상황을 놓고 보자.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의 태도는 선거 때와는 딴판이다. 특히 여권은 돌변하였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재벌 개혁은 입 밖에도 내지 못하고 있고 경제 민주화도 흐지부지되고 있다. 중산층을 70퍼센트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공약은 아예 쑥 들어가 버렸다. 검찰 개혁은커녕, 과거 군사독재 정권이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던 내란 음모 카드를 꺼내 들고 있다. 여권은 중산층이 그토록 염원하던 희망들을 하루아침에 내동댕이친 것처럼 보인다. 여권이 이렇게 돌변하다 보니 야당은 선거 기간 중 잠시 내려놓았던 선명성의 깃발을 다시 높이 쳐들고 장외투쟁을 벌이고 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기업 회장단과의 오찬에서 '30대 그룹 상반기 투자·고용 실적 및 하반기 계획' 발표를 들은뒤 박수치고 있다. 이 자리에는 이건희 삼성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구본무 LG 회장, 조양호 한진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허창수 전경련 회장,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등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이와 비슷한 일이 미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부자 감세, 사회복지 지출 삭감, 무모한 전쟁, 등 과거 부시 정부가 강행했던 정책들이 미국 국민 대다수의 뜻에 어긋나는 것들이었다고 미국의 많은 석학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진보와 개혁의 이미지를 업고 변화를 바라는 중산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었지만, 스티그리츠 교수와 삭스 교수는 오바마 정부가 부시 정부의 연속 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보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부시 정부에서 요직을 맡았던 뉴욕 거대 금융기업의 최고경영자(CEO)를 자신의 경제팀으로 발탁하였다. 현재 차기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미국 중앙은행❩의장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로렌스 서머스 교수도 그런 인사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니 오바마 대통령이 약속했던 금융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가 공약으로 내걸었던 건강의료서비스 개혁도 용두사미가 될 처지에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신세대의 희망이었지만, 또한 이들의 첫 번째 정치적 절망이기도 하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그러면, 민주주의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잡은 미국 정부가 왜 이렇게 대다수 미국 국민의 뜻에 어긋나는 정책들을 마구 밀어붙이는가? 미국의 많은 석학이 대기업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대기업들이 엄청난 자금력을 바탕으로 여론을 관리하고 정치가들을 상대로 로비 활동을 벌이며 선거 때마다 막대한 선거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정부의 정책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양당 제도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양당이 추진하는 정책에는 큰 차이가 없는 한 가지 이유는 양당의 주된 선거 자금이 업계 한 곳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삭스 교수는 말한다. 그러면서 미국은 "기업국가(corporacracy)"가 되었다고 단언하였다. 이것이 어디 미국만의 얘기이겠는가? 우리나라에는 "재벌 공화국"이라는 말이 있다. 지난달 28일 열렸던 재벌 총수들과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 오찬 내용을 들으면서 경제 민주화를 열망하였던 많은 사람이 재벌 공화국이라는 단어를 머리에 떠올렸을 것이다.

대기업들은 어쩌다 이렇게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되었을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치에 대한 국민의 무관심이다. 국민들이 대기업과 정부를 똑바로 감시하고, 이들이 하는 행동을 낱낱이 잘 기억해두었다가, 선거 때에 공약 이행 여부를 엄밀히 평가해서 투표로 응징한다면, 아마도 기업국가라는 말이나 재벌 공화국이라는 말도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국민이 한 눈 팔면 대기업은 정치권을 장악하고 이를 통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한 밀어붙인다는 주장이 미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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