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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자본축적과 지구정치경제의 향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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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자본축적과 지구정치경제의 향방

홍기빈의 '현미경과 망원경' <12> III. 어제의 세계 ③

***III. 어제의 세계: 지구화, 인수 합병, 신자유주의**

***③ 인수합병은 왜 벌어지는가**

현대 문명과 거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 “크기”에 지독한 집착을 보인다. 크기의 측량이 가능한 사물이나 대상이 있으면 그 질을 항상 크기로 측량하는 것이다. 큰게 좋은가 작은 게 좋은가? 그 대상의 성격에 따라 반대다. 집은 클 수록 좋고 전자 계산기와 노트북 컴퓨터는 작을 수록 좋다. 성적 대상으로 바라본 남녀 신체의 경우 특정 부위는 클 수록 좋고 또 다른 부위는 작을 수록 좋다고 생각하여 각종 확대와 축소의 비기가 등장한다. 대대익선이냐 소소익선이냐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크기에 대한 집착은 마찬가지이다.

기업은 어떤가? 클수록 좋은가 작을 수록 좋은가? 최소한 20세기 중반까지는 아예 대기업 숭배에 가까울 정도의 대자본(big business)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80년대 이후에는 그 “크기의 신화”가 무너지고 기업들은 다운사이징, 아웃소싱 등의 방법으로 체격을 줄이기 시작했으며, 특히 기술 정보 산업의 발생으로 작은 기술 연구 벤처 기업들이 새시대의 주자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제 기업의 크기에 관한 한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것으로 기준이 바뀌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판단은 아직 이르다. 비록 2000년을 기점으로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80~90년대는 동시에 전세계적인 규모에서의 기업 인수 합병의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시스코(Cisco) 같은 기업에서 잘 드러나듯, 그 작은 규모의 기술 벤처들도 그 인수 합병의 물결에서 벗어나 있기는 커녕 오히려 그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기업들은 왜 합병을 하는 것인가? 이 단순해보이는 질문에 대한 주류 이론의 답은 의외로 허술하다. 닛잔/비클러는 소유권의 이동을 통한 차등화 축적의 관점에 서는 것이 가장 좋은 답을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1. 기업 합병과 거래 비용 – "신제도주의 이론"**

주류 경제 이론의 부동의 전제 하나는 “자본주의 기업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생산성의 담지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 축적, 기업 성장, 생산성 향상, 사회 전체의 풍요는 모조리 같은 말이다”라는 것이다. 그러한 전제로 인하여, 기업과 자본가는 항상 생산성과 효율성을 주요 관심사로 삼는 존재로 그려지게 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경제의 모든 현상은 바로 그러한 합리적이고 효율적 행위자들의 생산성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벌어지는 것으로 설명된다.

기업 합병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주류 경제학에서 이것을 설명하는 고전적인 이론은 1937년 코스(R. Coase)에 의해 제시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윌리엄슨(O. Williamson)등의 소위 “신제도주의” – 베블렌 류의 미국 제도주의 경제학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 로 이어졌다. 그 요점을 간략하게 말하면, 기업간의 “거래 비용(transaction costs)”을 최소로 하여 생산성 효율성을 끌어 올리려는 동기가 인수 합병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완전한 자연 원자재에서 최종 생산물까지 혼자 모두 생산해내는 기업 조직은 극히 드물다. 시장 경제란 사실상 그렇게 자재를 조달하고 또 완제품을 판매하면서 촘촘히 이어지는 수많은 기업들간의 거래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기업들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경쟁 시장에서의 수요자 공급자로 연결된다. 나는 내 기업과 관련된 원자재 시장으로 나간다. 이론상 무수히 많은 공급자들이 있으니, 나는 그 중 가장 좋은 가격과 품질을 내놓는 기업과 단순한 시장 거래를 맞으면 된다. 우리의 관계는 서로 더 좋은 상대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헤어지는 “갑과 을”의 시장 계약 관계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로운 이합집산 덕분에 시장 경제가 최고의 효율성을 가져온다는 것은 귀가 따갑도록 들은 근대 경제학의 주장이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다. 항상 쓰는 자재 또 항상 나오는 완제품을 매번 그렇게 시장 계약으로 사고 판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그때 그때마다 어떤 공급자와 수요자가 있는지를 조사해야 하고, 또 그 기업들과의 관계가 시장 계약 관계이므로 “현금 박치기”를 기본으로 아니할 수가 없다. 즉, 이러한 “거래 비용”이 상당히 크게 들어갈 수가 있다.

그래서, 거의 안정적으로 장기적인 계약 관계를 맺어온 기업들이 이렇게 독립된 기업간의 시장 계약이라는 형식을 취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일 수가 있다. 차라리 두 기업이 하나로 뭉쳐 복합 기업을 만들어내는 편이 훨씬 더 안정적일 수가 있는 것이다. 인수 합병을 “결혼”과 비유하는 것은 비지니스 매체에서 흔히 있는 관행이니, 다음의 예를 들어도 필자를 천박하다고 나무라지 말기를. 시장 경제처럼, 완전한 자유 연애야말로 현대 개개인들의 연애 생활의 만족을 극대화하는 체제일지도 모른다. 모든 개인들은 각자의 주거와 생활을 유지한 상태에서 서로가 필요로 하는 선에서 자유롭고 만나고 찢어진다. 그런데 혹시 거의 매일 매시간 붙어다니는 커플이 발생한다면, 그들이 이런 연인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여간 비용 – 커피값, …기타 등등의 값 – 이 드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아예 생활을 합치기로 한다. 동거 혹은 결혼이 이루어진다.

즉, 기업들은 특정 분야의 유통을 시장에 맡겨두는 경우와 기업 조직 안으로 “내부화”시키는 경우의 비용을 비교하여 더 효율적인 쪽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한계 내부 거래 비용과 한계 시장 거래 비용이 일치하는 선에서 기업의 크기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깔끔한 설명이며, 논박이 불가능한 설명이다. 그런데 닛잔/비클러는 이 논박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이론의 치명적 문제라고 지적한다. 왜냐면 “입증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을 입증하거나 논박하려면 그 한계 거래 비용을 먼저 계산해 놓고 기업이 과연 그대로 행동하는가 아니면 달리 행동하는가를 관측해야만 논박이든 입증할 수가 있다. 그런데 한계 효용이나 한계 비용과 같은 다른 신고전파 경제학의 개념들처럼, 이 “한계 거래 비용”이라는 것도 현실적으로 관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 이론은 거꾸로 현존하는 기업들의 크기는 그러한 계산 결과 나온 것일 테니 모두 “최고의 효율성”을 담보하는 것이라고 강변하는 정당화의 논리로 귀결되고 만다. 실제 1980년 인수 합병이 경제 각 부문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을 적에 윌리암슨 같은 이의 논리는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기업 크기들을 정당화하는 데에 혁혁한 공헌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입증도 논박도 불가능한 이론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인 경향으로 짚어보면 모순이 있다 아니할 수 없다. 시장의 기업의 숫자가 무수히 많다면 정말로 그 시장 거래 비용이 대단할 것이다. 그런데 80년대 이후 과점화의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기업의 숫자도 대폭 줄어들었다. 또 90년대의 소위 “기술 정보 혁명”의 요는 바로 그 거래 비용의 삭감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20세기 중반까지 출현했던 기왕의 대기업들이 오히려 여러 개의 작은 기업들로 분산되는 경향이 나타났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실제 그 기간 나타났던 것은 전대미문의 규모로 벌어진 인수 합병이다. 이는 어떻게 된 일인가?

게다가 그 논리에 입각한다면, 파시즘 경제나 사회주의 아래에서의 집산화된 경제의 크기도 “최적의 효율성”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반박이 나올 것이다. 그런 경우는 탐욕스럽고 무지몽매한 정치가들이 정치적 목적에서 어거지로 합병시킨 것이며, “극대 이윤”을 고려하는 자본가들의 “합리적” 선택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아주 재미있는 점이다. 과연 자본가들이 인수합병을 할 적에 주로 관심을 두는 것이 “비용의 삭감을 통한 효율성과 생산성 제고”일까? 혹시 그들이 인수합병으로 크기를 불리려는 이유도 히틀러나 스탈린처럼 “권력”을 확장하려는 것은 아닐까?

***2.“토빈의 Q”- 이론과 실상**

위와 같이 “효율성”과 비용 절감의 차원에서 기업의 인수 합병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노벨상에 빛나는 유명한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James Tobin)과 동료 브레이냐드(William Brainard)가 제안한 “토빈의 Q”(Tobin’s Q) 이론으로 나타났다. 기업이 생산을 확장하려할 적에 선택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맨땅에 새로 설비를 건설하는 것이며 둘째는 기존의 설비를 사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그 두 가지 비용의 비율 즉 기존의 기업의 시장 가치와 설비의 보전 비용(replacement cost)의 비율을 일컫는 것이 그 “Q”이다. 이 Q가 올라간다는 것은 인수 합병의 비용보다 새로 짓는 쪽이 훨씬 더 싸진다는 말이니, 기업들은 주로 신규 설비 쪽으로 돈을 쓸 것이다. 이 또한 “비용 절감의 효율성” 논리에 근거한 깔끔한 설명 방식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게다가, 그 “한계 거래 비용”과 달리 이 Q는 분명히 현실에서 측정도 가능한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입증 혹은 논박이 가능하다.

이에 닛잔/비클러는 그 문제의 Q 와 실제의 인수 합병의 경우를 조사하여 비교해보았다. 그것이 다음의 그림에 나타나 있다.

[그림 ]

토빈이라는 경제학자의 노벨상의 명성이 무색해지고 말아 필자도 민망하다. 이 그림에 나타난 토빈의 Q는 어처구니가 없을만큼 현실과 반대임을 가리키고 있다. 굵은 선으로 나타낸 것이 실제의 시설 투자에 대한 인수 합병 금액의 비율인데, 가는 선으로 나타난 토빈의 Q 와 마땅히 반대로 움직여야 할 이 계열이 거의 정확하게 함께 등락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토빈을 탓할 일이 아니다. 분명히 미국의 기업가들이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볼 수가 없다. 생산 설비 건설 비용은 내려가고 인수 합병은 어려워지는 판에 어째서 이들은 비용 절감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돈을 물쓰듯 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히 주류 이론에서의 기업가들은 “효율성과 비용 절감”을 최상의 원칙으로 행동하는 합리적 존재가 아닌가?

***3. 자본주의와 효율성 - “깽판놓기”와 소유권**

이러한 수수께께를 푸는 데에 적절한 해답은 쏘스타인 베블렌(Thorstein Veblen)의 자본 이론에 있다고 닛잔 비클러는 주장한다. 그 주장의 논점은 다음과 같다.

베블렌은 자본주의 경제를 “영리 활동(business)”과 “산업(industry)”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본다. 순수하게 생산성과 효율성을 모토로 하여 실제의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후자라고 한다면, 전자는 그러한 산업을 지배함을 통해 금전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영역이다. 즉 영리 활동의 모토는 “금전 이익의 극대화”이지 “생산과 효율의 극대화”는 아닌 것이다. 베블렌은 (신)고전파 경제학자와 마르크스주의자들 모두가 “자본주의의 비밀은 생산성 향상이다”라는 신화에 빠져있다고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란 바로 “영리 활동”의 영역이 “산업”의 영역을 지배하는 것으로 특징 지워진다. 이때 영리 활동이 생산성 향상에 관심을 갖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금전적 이익”을 올릴 수 있는 경우에만 벌어지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윤과 축적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산성”이 아니라 “산업”에 투여되는 각종 생산 설비에 대한 “소유권”이다. 그 소유권이란 자신들의 마음대로 그 생산 설비를 사회가 사용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일정한 소득을 약속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윤의 원천이다. 즉, 사회적 생산에 “깽판을 놓아(sabotage)” 사회로부터 일정한 몸값을 뜯어낼 수 있는 권리가 소유권이며, 그로 인한 소득이 바로 이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베블렌은 19세기 후반에 들어 공업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그 잠재적 생산 능력이 현실의 시장 수요를 훨씬 초과하는 단계로 갔다는 것을 주목한다. 이 상황에서 만약 18세기 소공업자들마냥 “최대한의 생산”이라는 원칙으로 산업이 굴러가도록 내버려 둘 경우 시장에는 물건이 넘치고 이윤은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에서는 자본가들이 소유권을 발동하여 생산을 일정하게 제한하도록 하는 것이 “영리 활동”의 논리가 된다. 이렇게 “거래량이 담을 수 있는 것만을 생산(charge what traffics can bear)”하도록 “효율성을 조심스럽게 제한하는 것(conscientious withdrawal of efficiency)”가 바로 자본주의의 축적 논리가 된다.

20세기의 자본주의적 축적이 생산성에 기반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렇게 생산성을 “깽판 놓는” 경향을 가진다면, 축적에서 좀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베블렌은 여기에서 그 “소유권”이라는 사회적 권력의 확대와 강화가 바로 자본의 축적이라고 보고 있다. 즉, 사회 전체에 걸쳐 다른 경쟁 기업 그 누구보다도 커다란 “산업”에 대한 지배력을 갖는 것 즉 “차등화 축적(differential accumulation)”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닛잔/비클러의 해석이다. 쉽게 얘기하자면, 생산성 효율성을 올리는 것은 핵심이 아니며, 사회적 생산성에 대한 소유권을 그 누구보다도 크게 차지하는 것이 곧 축적의 핵심이라는 말이 된다.

이러한 베블렌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인수합병의 의미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이게 된다. 인수 합병은 “비용 절감을 통한 효율성 제고”가 목적이 아닌, “소유권 확장을 통한 권력 축적”으로서,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토빈의 Q 이론과 완전한 모순을 보이는 위 그림의 현실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설비 투자의 비용이 낮아진다고 해서 모든 기업들이 인수 합병 대신 시설 투자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개별 기업으로서야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전체 기업들이 그렇게 하여 생산성이 극도로 올라간다면 위의 베블렌의 주장처럼 “아예 이윤 자체가 사라질” 위험이 나오기 때문이며, 큰 덩치를 가진 오늘날의 “지배적 자본”들은 이 사실을 뚜렷이 의식하고 행동한다는 게 닛잔/비클러의 진단이다.

기업들은 설비 투자의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소유권 확장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보기 때문에, 인수 합병의 추이는 그 토빈의 Q 와는 독립적으로 결정된다. 오히려 인과관계가 거꾸로일 수도 있다고 닛잔/비클러는 암시한 바 있다. 위 그림의 두 계열을 보면 실제의 인수 합병 증감을 나타내는 굵은 선이 인수 합병의 비용을 표현하는 가는 선의 토빈의 Q 를 시간적으로 앞서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자본가들이 “비용 효율성”이라는 토빈의 Q 를 먼저 고려하여 인수 합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기업들은 인수 합병 그 자체를 목적으로 먼저 추구하며 기업의 시장 가치가 그 결과로 영향받아 토빈의 Q 가 아래 위로 증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기업의 크기에 관한 한, 아무래도 “대대익선”을 향한 경향이 더 우세한 듯 하다. 만약 자본주의 기업이 정말 효율성이나 생산성을 목표로 하는 “산업(industry)”의 조직이라면 그 최적의 크기는 생산의 성격에 따라 큰 쪽도 작은 쪽도 될 수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자본주의 기업이 사회적 생산 전반에 대한 지배 권력을 늘리기 위해 경쟁자들보다 소유권을 끊임없이 늘려야 하는 “영리 활동(business)”의 조직이라면 항상 “큰 것”을 향한 끝없는 팽창욕이 내재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개별 기업의 크기가 파시즘 경제나 사회주의 경제 이상으로 팽창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동기와 목적도 똑같은 “권력욕”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렇게 인수합병에 의한 소유권 팽창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자본 축적에는 사회적 한계가 없는가? 어째서 인수합병은 계속적인 경향이 아니라 몇 십년 주기를 둔 하나의 물결(wave)처럼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것인가? 이에 대해 다음 편에서 살펴보자.

* 이 부분에 대한 닛잔/비클러의 좀 더 심화된 이론은 홍기빈 역, 조나단 닛잔과 심숀 비클러, <자본 축적과 변형의 지구 정치 경제학(가제)>(삼인, 근간) 를 참조할 수 있다.

* 필자 홍기빈씨는 정치토론 사이트 '시대소리(www.sidaesori.com)'의 고정 필진으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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