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후 동교동 자택에 사실상 칩거 상태에 있었던 김대중 전대통령이 지난주말 오랜만에 바깥 나들이에 나섰다고 한다. 나들이 장소는 다름아닌 경기도 문산 통일동산. 김 전대통령의 의미심장한 메시지 전달이다.
김 전대통령은 오는 15일, 남북정상회담 3주년을 맞아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져 주목된다.
***DJ, "갑갑하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지난 2월24일 퇴임후 건강때문에 일주일에 한두차례 병원을 찾는 것외에는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회피해왔다. 최측근인 박지원 전비서실장만이 하루에 한차례씩 동교동 자택을 방문할 따름이다.
이처럼 칩거하던 김 전대통령이 “갑갑하다”며 지난주말 통일동산을 찾았다. 김 전대통령이 통일동산을 드라이브했다는 사실을 정치권에서는 단순한 바깥나들이가 아닌 의미심장한 '정치적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김 전대통령이 "갑갑함"을 느끼는 대목과 관련, 정가에서는 우선적으로 그 원인을 지난달 한-미정상회담후 급속한 변화조짐을 보이는 대북정책에서 찾고 있다. 현재 김 전대통령측은 북핵문제와 남북경협의 '병행정책'에서 '연계정책'으로의 전환, 햇볕정책의 폐기 움직임, 특히 최근 들어서는 미국이 강행하려는 MD(미사일방어)로의 편입 움직임 등등 남북정책의 경색화 가능성을 크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 전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 전인 지난 4월22일 노무현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남북문제와 관련, "북핵 문제는 평화적으로 풀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막아야 한다"면서 "7천만 민족의 생사가 걸린 문제인 만큼 어떤 경우에도 한국이 평화적 해결 원칙을 반드시 지켜나가고 주도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 전대통령은 또 "한미관계와 남북관계는 병행해 잘 풀어나가야 할 것"이라며 "그래야 우리의 자주적 입장이 강화될 것"이라고 '병행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지속해나갈 것을 주문했었다. 김 전대통령은 또 “현대의 대북 송금은 크게 봐서 사법적 심사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는 소신에 변화가 없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조언이 수용되지 않은 데 대해 김 전대통령측의 우려는 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같은 우려의 연결선상에서 최근 특검 수사방향에 대한 우려도 적잖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북송금 의혹사건’을 수사중인 송두환 특검은 2000년 6월 현대그룹의 대북송금이 청와대.국정원.현대그룹.금융기관 등이 개입, 공모한 합작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특검은 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사실이 드러난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 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 김대중 정부 핵심인사와 현대와 금융기관 고위인사 등 모두 16명에 대한 처리문제를 고심중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와 관련, 지난달 27일 민주당 의원들과 만찬 자리에서 특검과 관련, "남북관계를 해칠 만한 수사로 달려가지 않게 최선의 노력을 하겠으며, 남북정상회담의 가치를 손상하는 결과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최근 특검이 이 문제를 사법처리 대상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분명히 하자, 김 전대통령측은 이 문제가 자칫 남북관계 경색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DJ “남북관계 여러가지로 걱정스러워”**
이에 앞서 김대중 전대통령은 지난달 31일 고(故) 문익환 목사 기념사업회에서 선정한 제8회 '늦봄통일상'을 받고 이희호 여사가 대독한 수상소감을 통해 한-미 정상회담후 급속히 경색조짐을 보이고 있는 남북관계에 대한 우려를 피력한 바 있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이날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행한 수상소감에서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과 1980년 신군부의 쿠데타 당시 문 목사와 함께 투옥된 바가 있음을 상기하고는 "오늘날 우리가 세계가 인정하는 민주국가가 되고 남북간의 긴장완화, 이산가족 상봉, 경제적 협력 등 여러 가지 진전을 보인 점은 문 목사의 희생적 노력이 크게 기여했다"며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헌신하신 늦봄 문익환 목사님을 기리는 통일상을 받게 된 것을 자랑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 전대통령은 이어 "그러나 남북관계는 아직도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걱정스러운 점도 많다"면서 "문익환 목사님의 민족사랑과 통일에의 신념을 간직하면서 남북이 평화공존하고 평화교류해서 평화적인 통일을 이룩하도록 중단없는 노력을 계속하자"고 부탁했다.
이날 신창균(96세) 통일연대 명예대표는 축사를 통해 "1948년 백범 김구선생에 의해 남북합작이 최초로 시작되었다"면서 따라서 "김대중 전대통령이 이곳 백범기념관에서 수상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특히 2000년 6월 김 전대통령이 이룬 남북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은 7천만 민족에게 통일의 길을 제시해준 것이라고 치하했다.
***한광옥,이기호,임동원 "우리가 책임지겠다"**
한광옥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기호 전 수석, 박지원 전 장관, 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이 최근 일제히 “모든 것을 우리가 책임지겠다”고 나선 것도 이같은 김 전대통령의 시국에 대한 우려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광옥 전 비서실장은 5일 변호인을 통해 공개한 자필 성명에서 "대출금의 북송금 사실은 전혀 몰랐다"며 자신의 연루설을 부인하면서도 "남북화해를 위한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를 비서실장이었던 본인이 책임지겠다"고 밝혔다. 그는 "한광옥이 죽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온갖 수모와 암울한 정치적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가겠다"고까지 말했다.
특검팀이 구속수감한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도 이에 앞서 북송금 과정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전에 보고받고 묵인했다는 의혹에 대해 일체 함구한 채 "제가 십자가를 지겠다"고 말했다.
특검팀이 내주초 소환을 검토중인 박지원 전 장관도 최근 지인들에게 "나에 대해서는 몰라도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만은 안 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앞서 임동원 전 국정원장도 지난 2월 대국민담화에서 "당시 국정원장인 제게 큰 책임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DJ, 15일 입장발표 검토"**
이처럼 국내외 상황전개가 심상치 않은 가운데 김대중 전대통령은 6.15 남북정상회담 3주년을 맞아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져 주목된다.
김한정 비서관은 7일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남북관계, 한반도 정세 등에 대해 충정이 담긴 말씀을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어 여러가지를 검토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남북관계에 대해 공개적인 언급을 할지에 대해선 아무 것도 결정된 바 없다"고 밝혔다.
과연 김 전대통령이 오는 15일 시국에 대한 입장을 발표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김 전대통령이 만약 현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밝힐 경우 국내외적으로 몰고올 후폭풍이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는 15일 입장표명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김 전대통령의 '메시지'는 분명히 드러났다는 점에서 향후 정국에 일대 파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