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이러한 대북정책의 퇴보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pivot to Asia)'과 조우하게 되면서 오바마의 대북정책의 마비 현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려는 노력보다는 북한의 위협을 근거로 미사일방어체제(MD)를 비롯한 군비증강과 동맹체제 강화에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 내에서 "대화를 위한 대화를 하지 않겠다", "대화를 하려면 북한이 먼저 비핵화의 진정성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는 네오콘식 화법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 네오콘을 강력히 비판했던 오바마 행정부에서 네오콘의 향기가 짙게 느껴지는 것은 지독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 지난 2008년 12월 8일 증국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북핵 6자회담 ⓒ연합뉴스 |
나가도 너무 나간 북한
북한은 6자회담을 하자는 입장이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의 마음을 돌려놓기에는 너무 나갔다. 툭하면 "서울 불바다"니 "워싱턴 불바다"니 하는 말 폭탄을 던지고,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백지화를 선언한 모습에선 회담에 응하는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북한은 상반기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도발적 언행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다가 하반기부터는 '저게 북한 맞아?'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유연하고도 실용적이며 때에 따라서는 낮은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광폭의 널뛰기'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인지, 아니면 사후의 노선 변경인지는 알 수 없다.
개인적 견해로는 김정은 체제의 치밀한 계산이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상반기에 '미친 자의 이론(madman theory)'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도발적 언행을 선보인 배경에는 두 가지를 포석에 깔고 있었을 것이다. 대외 전략상으로는 정전체제의 불안정성을 극적으로 고조시켜 대화와 협상의 핵심 의제로 평화체제 문제를 삼고 싶었을 게다. 대내적으로는 군사지도자로서의 김정은을 극적으로 부각시켜 김정은 체제 공고화와 함께 개혁의 토대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김정은에게 핵은 대외적으로는 군사적 억제력이자 평화체제 협상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외교적 카드'이다. 이는 김정일 체제의 연속선상에 있다. 동시에 김정은에게 핵은 북한 군부의 반발을 무마시켜 경제건설의 토대를 닦고자 하는 '개혁의 칼날'이라는 속성도 지닌 것 같다. 김정은 체제 들어 가장 유행하는 담론은 '핵을 가졌으니 이제 경제발전에 집중하자'는 것이고 이는 군부의 세대교체 및 권한 축소와 내각의 권한 강화라는 개혁적 조치와 맞물려 있다. '경제건설과 핵 무력건설 병진 노선'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북핵이 북한 군부부터 잡는다'는 필자의 농담 같은 진단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며, 이 점이야말로 선군정치를 앞세운 김정일 체제와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추측성 분석의 타당성과는 별개로 북한이 진정 '다른 미래'를 모색하고자 한다면 유념해야 할 대목들이 몇 가지 있다. 먼저 '도발의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상반기 도발적 언행을 통해 정전체제의 불안정성과 평화체제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정전체제는 더욱 불안해지고 평화체제 협상의 문은 더욱 좁아졌다. 미국이 당장 대화에 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북한이 또다시 도발적 언행을 일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6월부터 본격화하고 있는 대화 노선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이 대화 노선을 지속해야만, 한국과 미국 내의 협상파들의 입지가 커지고 중국의 중재력도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열쇠는 한국에?
한편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은 본격적인 대미 압박에 나선 분위기이다. 상반기에는 북한의 도발적 언행을 비판하고 대북 압박과 제재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가 북한이 대화 의지를 밝히자 이를 근거로 미국을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중국 국방부의 창완취안(常萬全) 부장(장관)은 8월 20일을 전후해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척 헤이글 국방장관과 수전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을 만나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났다"며 미국에 북한과의 대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북미 양자 대화도 좋고, 중국이 주선하는 3자회담도 좋고, 남-북-미-중 4자회담도 좋고, 6자회담을 재개하는 것도 좋으니, "이제 미국도 조건을 달지 말고 대화에 나서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행보 가운데 두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중국의 국방부 장관이 미국에 대북 대화를 강력하게 요구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내용을 언론을 통해 상세하게 공개했다는 것이다. 미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그것도 공개적으로 높이겠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른 6자회담 참가국들인 러시아와 일본의 입장은 큰 변수는 아니다. 전통적으로 중국과 보조를 맞춰온 러시아는 6자회담의 조속한 개최 필요성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특히 동방정책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는 푸틴 대통령은 이러한 관점에서 6자회담의 유용성을 주목하고 있다.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참의원 선거 전에는 북한과의 대화에 적극적이었다가 최근에는 무관심으로 돌아선 것 같다. 선거 전에는 일본인 납치 문제에 진전을 이뤄내겠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지만, 압승 이후에는 이러한 정치적 수요가 떨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끝으로 한국의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한국이야말로 북미 간의 첨예한 입장 차이로 5년 가까이 열리지 않고 있는 6자회담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박근혜 정부는 "대화를 하려면 북한이 비핵화의 진정성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미국과 공동보조를 맞추고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개선, 한중관계에 대한 고려,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와 DMZ 세계평화공원 조성 계획 등이 부상하면서 6자회담에 대해 점진적이면서도 전향적인 입장을 보일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최근 박근혜 정부는 '신뢰와 원칙의 대북정책'이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고 자신감을 가지면서도 6자회담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 당국자들 사이에서 "남북관계 개선이 6자회담 재개에 간접적으로 기여할 것"이라거나 "비핵화를 위한 진전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6자회담을 할 수 있다"는 등의 발언이 나오는 걸 보면, 6자회담 재개에 대한 입장이 유연해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박근혜 정부가 6자회담에 대해 보다 거시적이고 전략적으로 판단해야 할 사유도 커지고 있다. 우선 중국이 본격적으로 회담 재개를 강력히 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중관계 복원을 대외정책의 핵심 목표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는 박근혜 정부가 마냥 중국의 입장을 외면하기도 힘들 것이다.
또한 이산가족 상봉 확대와 정례화를 이루려면 현실적으로 금강산 관광 재개가 필요한데, 6자회담 재개는 이를 위한 좋은 여건을 조성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현금이 지급되는 금강산 관광이 유엔 안보리 결의와 저촉된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6자회담 재개를 통한 비핵화의 진전은 이러한 경직된 해석을 유연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박근혜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비무장지대(DMZ) 평화공원의 성공을 위해서도 6자회담 재개는 반드시 필요하다. DMZ 평화공원 조성은 남북한과 미국, 중국 사이의 공감대 형성 및 협력이 필요한데, 이들 4자 사이의 공감대 형성은 6자회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6자회담 재개 여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핵화의 진전 가능성이다.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 정부 역시 이 부분을 자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보면, 회담 재개 시 비핵화 프로세스 재개에 의미 있는 디딤돌을 놓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북한이 북미 양자 대화와 다자 대화 의지를 피력하고 있는 데에는 핵과 로켓 문제와 관련해 양보 조치를 취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핵 문제 해결의 기회가 열렸다'며 회담 재개를 강력히 촉구하고 있는 데에는 북한으로부터 모종의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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