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27일 취임 후 처음으로 청와대에서 민주당 의원들과 만찬을 함께한 자리에서 신당 창당과 관련, “호남득표를 잃지 않을 전략과 약간의 손상과 전국적 지지를 얻으려는 전략과의 충돌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 당의 과제였다”면서 “민주당이 전국적 토대 위에 서야 한다”고 ‘전국정당화’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당정분리’ 원칙에 따라 “분당, 신당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어렵다”면서도 “민주당이 지역당이라고 스스로 비하하고 지역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기 이전에 지역적 기반의 사고를 뛰어넘지 못하면 안된다”며 ‘지역주의 극복’을 역설했다.
노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신당 창당에 대한 찬성 입장을 밝히면서도 구체적 방법론에 대해서는 입장 표명을 유보한 것으로, 앞으로 신당 창당 논란과정에 각 정파의 '인위적 해석'을 낳을 소지를 제공했다.
***“DJ 햇볕정책 계승하겠다”**
노 대통령은 그러나 이날 상당 시간을 '호남차별론'에 대한 해명에 할애하며 김대중 전대통령의 정책 승계를 강조함으로써 노 대통령이 내심 '통합적 신당'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낳고 있다.
노 대통령은 우선 대북 정책과 관련, "최소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열고 이어온 포용정책, 햇볕정책은 확고히 계승하겠다"며 "일관된 원칙은 남북관계의 평화적 해결이며 이를 위해 꿇으라면 꿇겠지만, 이것의 훼손은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 공동성명에 포함된 ‘추가적 조치’에 대해 "남북관계가 극도로 악화되고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면 나올 수 없다"며 "이것으로 남북관계가 달라지거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방미 외교 중 보여줬던 변화에 대해 “당선자 시절 무력행사에 단호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해 한미관계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 됐다. 평화적 해결원칙으로 큰 흐름이 바뀌어 갔으므로 더 이상 이 문제로 미국과 입씨름 하거나 각 세울 일은 없다. 그래서 한미동맹관계를 다져가는 것이 시급했다. 그렇게 가다보면 경제불안도 없어지기에 빠르게 나의 자세가 변화해 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대북송금사건 특검과 관련, "나도 특검을 수용할 때 마음이 좋지 않았다"며 "남북관계를 해칠 만한 수사로 달려가지 않게 최선의 노력을 하겠으며, 남북정상회담의 가치를 손상하는 결과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대북 비료 및 식량 지원문제에 대해 "저쪽에서 몇가지 제의를 해왔는데 다 필요없다고 했다"면서 "(최근 남북 경추위 회담을 놓고) 북한의 기를 꺽었느니 끌려다녔느니 얘기가 있었으나 김 전 대통령의 남북정책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북핵문제를 해소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저는 남북관계가 틀어질까봐 말 한마디 조심해야 하고, 부엌눈치, 안방눈치를 살피는 가장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면서 "(한국이 빠진) 3자회담에 찬성하는 우리 심정이 오죽했겠느냐"며 "그렇게라도 끈이 이어지는 것이 낫다"고 덧붙였다.
***의원들, "신당 논의 주도해달라" 요구**
이날 만찬자리는 9명의 의원이 질문을 하고 노 대통령이 일괄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의원들은 특히 신당에 대한 노 대통령의 입장 탐지에 주력했다.
설훈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말년에 어려움을 겪은 것은 정치를 안하려 했기 때문인데, 노 대통령도 그런 것 같다”면서 “‘당정분리’라지만 우리 당이 배출한 대통령이므로 당론의 한가운데 서서 맨 앞에 나서야 한다. 대통령이 만약 정균환, 박상천 의원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안된다고 하실 분들이 아니다”고 말했다.
배기운 의원도 “많은 국민이 분당을 걱정하고 있다.”면서 “어느 시점에 당 문제를 얘기하겠다고 했는데 지금이 그 시점이다. 당의 지도자와 원로를 불러 당 문제를 논의, 함께 고민해 해결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거리두기'에 서운함 표시**
특히 이날 많은 의원들이 ‘대통령의 거리두기’에 대한 서운함을 직접적으로 표출했다. 노대통령이 지난 4월초 천정배, 신기남 의원을 만난 이래 당 의원과 일체 개별접촉을 기피해온 데 대한 불만 토로였다.
대선 당시 특보단장이었던 유재건 의원은 “대통령을 만나는 게 3개월만에 처음”이라며 “대선때 특보들과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말했다.
허운나 의원은 “오늘 올 때 무거운 마음이 들었으며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면서 “대통령과 우리가 생각이 같고 같이 가는지 모르겠다. 좀더 같이 한방향으로 가고 자주 도와주고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태홍 의원은 “수석.보좌관들은 대통령의 아픈 문제점을 제기할 수 없다”면서 “평상시 자주 만나는 수석.보좌관과 당직자 말고 일반 의원들과 생산적인 자리를 자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김성호 의원도 “대통령이 어려울 때, 누군가를 필요로 할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민주당 의원, 당원밖에 없다”며 당과 거리 좁히기를 강조했다.
또 경제 정책 등 정책일관성에 대한 요구도 했다. 정장선 의원은 “서민경제가 어렵다고 아우성치고,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면서 “정부가 일관성 없이 극과 극을 오간다, 집단의 힘에 밀리는 것 아니냐고 한다. 원칙을 갖고 해달라”고 조언했다.
박병석 의원도 “기업인의 투자의욕을 북돋우는 게 중요하다”면서 “반도체 이후 나라의 먹거리에 대한 깊은 전략이 있나 회의감이 든다”고 말했다.
***김상현 고문, 뼈 있는 건배사**
이날 특검제 수용,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 신당 반대 등 취임 후 노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밝혔던 신주류인 추미애 의원은 불참했으나, 한화갑 전대표, 박상천 최고위원, 정균환 총무 등 구주류 의원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날 만찬에서 ‘뼈 있는 발언’을 할 것이란 예측과는 달리 정치적 발언은 삼갔다.
하지만 김상현 고문은 건배사에서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이 퐁피두 프랑스 전 대통령을 국빈초청한 자리에서 ‘공동의 동지인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건강을 위해’라고 했다. 남북전쟁 때 링컨 대통령이 사단을 방문했을 때 사단장이 당번병과 장기를 두느라 영접을 안나온 데 대해 누군가 ‘목 잘라야 한다’고 하자 링컨 대통령은 ‘전쟁만 이겨주면 그놈 말고삐라도 쥐고 다니겠다’고 했다고 한다”면서 신당 창당과 관련, 신주류 강경파에서 주장하고 있는 ‘인적청산’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전술의 경직성은 패배의 원인”이라면서 “한국정치는 전쟁도 아닌데 퇴로도 없고, 다리를 폭파하고, 확인사살까지 한다. 노 대통령이 진실과 사랑이 넘치는 풍토를 만드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부부 동반으로 저녁 6시30분부터 2시간 10분가량 진행된 만찬엔 소속 의원 1백1명 가운데 해외출장, 와병, 수감 등 사정이 있는 15명을 제외한 86명과 김태랑, 이용희 등 원외 최고위원들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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