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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째 산소마스크, 6자회담 안락사하면…

[정욱식의 북핵이야기] 6자회담 10년, 과거와 현재

어느덧 10년이 지나가고 있고, 또 어느새 5년째가 다가오고 있다. 6자회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회담은 2003년 8월 27일에 처음 시작됐다. 그리고 2008년 12월을 마지막으로 5년 가까이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고 있다. 이 사이에 6자회담은 빠른 속도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일각에선 이미 6자회담은 무용해졌다거나 죽었다는 진단까지 나온다.

과연 이래도 좋은가? 적어도 한국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6자회담은 한반도 문제를 풀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틀이자 신냉전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동북아의 다른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6자회담은 미국의 부시 행정부의 대북강경책과 북한의 핵 개발 카드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한반도 위기관리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북미 대결을 골자로 하는 한반도 핵문제 해결은 우리에게 사활적인 이해가 걸려 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6자회담의 대안을 마련하기도 마땅치 않다. 우리가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는 6자회담의 신세를 남 몰라라 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중국의 부상, 일본의 우경화, 미국의 아시아로의 복귀(pivot to Asia), 러시아의 동방 정책, 영토 분쟁의 격화 등이 맞물리면서 동북아 정세는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전환기에 서 있다. 6자회담의 중요성은 여기서 거듭 확인된다. 6자회담마저 소생하지 못하면 동북아 안보 문제를 논의하고 공동 안보와 평화체제의 틀을 설계할 수 있는 길은 더더욱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6자회담 개시 10년째를 맞이해 어제를 복기하고, 오늘을 진단하며, 내일을 설계해보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관련국들이 네 탓 공방과 비관주의로 허송세월하기에는 지금까지의 노력이 턱없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다가올 대가 역시 너무나도 클 것이기 때문이다.

네 차례의 변화

지난 10년간 6자회담은 크게 네 차례의 변화를 겪어왔다. 첫째는 2003년 8월 1차 회담부터 2004년 6월 3차 회담 때까지로 '북미 양자대화 없는 6자회담 시기'로 규정할 수 있다. 이 시기 6자회담을 바라보는 북미간의 동상이몽이 컸다. 북한은 북미대화의 틀로 6자회담을 간주한 반면에, 미국에게 6자회담은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기피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실질적인 성과 없이 북미간의 공방전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둘째는 2005년 8월 1단계 4차 회담부터 2006년 12월 2단계 5차 회담까지로 '6자회담 내에서 북미 양자 접촉이 병행된 시기'이다.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한사코 거부했던 미국은 6자회담 내에서 북미대화를 병행할 수 있다며 다소 유연해진 입장을 보였고, 이를 미국의 적대시정책의 변화로 간주한 북한도 협상에 적극적이었다. 한국은 중국과 함께 북미간의 입장 차이를 조율하고 중재안을 내놓는데 외교력을 집중했다. 이에 힘입어 2005년 9월에는 포괄적인 문제 해결 원칙을 담은 9.19 공동성명이 나왔다. 그러나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가 불거지면서 9.19 공동성명 이행은 지체되었고, 결국 북한은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 2005년 9.19 공동성명 발표 직후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포즈를 취했다 ⓒ연합뉴스


셋째는 2007-2008년으로, '북미회담에서의 타결과 6자회담에서의 추인 시기'이다. 이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북미대화가 6자회담과 별도로 진행되면서 주도적 위치를 점했다는 데에 있다. 2007년 1월에는 북미 대표가 독일 베를린에서 회담을 갖고 BDA 문제 해결 및 대북 중유 제공과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쇄·봉인 합의가 이뤄졌고, 한 달 후에 열린 6자회담의 2.13 합의를 통해 이를 추인했다.

또한 북한의 핵신고서 제출 문제로 난항을 겪던 2008년 4월에도 북미 대표는 싱가포르에서 만나 북한의 핵 신고서 제출과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의 조속한 이행을 골자로 하는 합의를 이뤘고, 7월 6자회담에서 이를 확인했다. 북핵 검증과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 지연으로 갈등이 고조되었던 2008년 10월에는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열린 6자회담에서 검증에 대한 최종 합의 도달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넷째는 2008년 12월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시기로 '6자회담 공전의 장기화 국면'이다. 이 사이에 6자회담은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고, 북미 고위급 대화는 2009년 12월과 2012년 2월에 있었지만 둘 모두 단발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6자회담 개최에 대한 핵심 당사국들의 입장이 뒤바뀌었다는 점에 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과 미국은 북한에게 조건 없는 6자회담 복귀를 요구했었다. 이에 대해 북한은 미국의 적대시정책을 철회를 회담 재개의 조건으로 내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후에는 대체로 북한이 6자회담 재개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에, 한국과 미국이 '비핵화 조치' 등 전제조건을 내거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6자회담은 속임수였는가, 북핵 해결에 기여했는가?

6자회담의 유용성 여부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이 회담의 개시 배경이자 핵심 목표인 북핵 문제 해결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가를 평가해야 한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정부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퇴임 직전인 2009년 1월 3일 <미국인들이 모르는 부시 행정부의 100가지 기록>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외교정책의 최대 성과로 "6자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무기 및 핵 프로그램 폐기 약속을 받아낸 것"을 뽑았다.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지목했던 부시 행정부가 6자회담을 통한 북한과의 협상을 외교적 업적으로 내세운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또 하나의 아이러니를 목도하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바마 행정부는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를 강력히 성토하면서 이란과 북한 등 적대국 지도자와의 대화를 대외 정책의 기조로 제시했다. 한반도 정책의 핵심 목표로는 "6자회담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를 약속했다. 그러나 취임 5년이 다가오고 있지만, 6자회담은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모든 책임을 오바마 행정부에게 돌릴 수는 없지만, '전략적 인내', '북한식 패턴'이라는 모호한 수사 아래에 6자회담을 가둬둔 책임은 분명히 있다.

'안보 IMF'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위기 국면에서 출범한 노무현 정부의 외교 중심에는 6자회담이 있었다. 임기 첫해인 2003년에 6자회담이 시작된 이후 회담이 열리지 않을 때에는 회담 재개를 위해, 회담이 열리면 북미 양측의 입장을 조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결과 임기 중반에는 9.19 공동성명이, 막바지인 2007년에는 2.13과 10.3 합의가 나와 북핵 해결에 커다란 모멘텀을 만드는 듯 했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의 복잡성과 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이러한 낙관론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뒤이어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부시 말기에 조성된 문제 해결의 중대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6자회담 구도에서 일본보다도 강경한 입장을 보였고, 2008년 8월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뇌관련 질환으로 쓰러지자 6자회담 등 대화보다는 '흡수통일론'에 경도되고 말았다.

그럼 박근혜 정부는 어떨까? 아직 평가하기에는 이르다. 박근혜 대통령이 6월 17일 오바마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단순히 대화를 위한 대화를 하게 되면 북한이 핵무기를 더 고도화하는 데 시간만 벌어 줄 뿐"이라고 말한 대목에서는 6자회담 회의론이 강하게 읽힌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원칙론과 북한의 실용주의가 미묘한 화학 작용을 일으키면서 남북관계가 바닥을 칠 조짐을 보이자, "남북관계 개선이 6자회담 분위기 조성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평가도 정부 내부적으로 나오고 있다고 한다.

정파적 편견을 거둬내고 6자회담을 냉정히 평가해본다면, '만족할 만한 수준의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북핵을 비롯한 한반도 정세를 관리하고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데에는 유용했다'는 평가는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1차 회담부터 3차 회담까지는 북미간의 말싸움이 6자회담을 지배했다. 4차 6자회담 결과로 탄생한 9.19 공동성명은 전환점이 되는 듯 했지만, BDA라는 장애물을 뛰어넘는데 15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뒤늦은, 그러나 실질적이고도 중대한 진전은 2007년부터 나왔다. 북한의 영변 핵시설 봉인과 폐쇄와 불능화, 영변 냉각탑 폭파, 핵 신고서 제출 등이 이뤄지면서 북핵 해결의 가능성도 커졌었다. 이러한 성과가 가능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선순환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 네오콘의 몰락과 협상파의 등장, 한미 양국의 '조건 없는 6자회담 개최'에 대한 일관된 입장, 실질적인 북미대화의 시작, 남북관계의 개선, 한국과 중국의 중재자 역할 등이 맞물렸던 것이다.

이에 반해 북한의 핵 능력 강화는 주로 6자회담이 열리지 않은 기간에 이뤄졌다. BDA 문제로 6자회담이 열리지 않은 15개월 동안, 그리고 2009년 4월 북한의 로켓 발사와 이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강경 대응이 악순환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은 빠르게 강화되었다. 회담도 열리지 않고 현재에도 북핵 능력은 '정중동(靜中動)'이다. 북한이 요란스러운 추가적인 핵실험이나 로켓 발사를 않지 않고 있지만, 불능화한 영변 핵시설 복구, 우라늄 농축 시설 확장, 실험용 경수로 공사 등 핵 능력 강화에 필요한 인프라 구축은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회담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도 꾸준히 진전을 이뤄냈던 6자회담의 전반기 5년과 아예 회담 문이 굳게 닫힌 후반기 5년을 비교해보면, '6자회담은 아직 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5년째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다고 해서 안락사를 시켜버리면, 우리의 미래는 결코 편안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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