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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7천년 이라크 고대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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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7천년 이라크 고대문명

함무라비 법전도 행방불명, ‘미군주둔 정당화 노린 방조’ 의혹도

‘문명의 요람’이라 불리는 7천년전 이라크의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재들이 폭격으로 파괴된 데 이어 이번에는 바그다드에 있는 국립박물관이 무차별적으로 약탈돼 치명적 손상을 입었다.

일부 폭도들에 의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징했던 문화유산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는 이라크인들은 미국이 군대 주둔을 정당화하기 위해 약탈사태를 방관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함무라비 법전 서판도 행방 묘연**

박물관에 들이닥친 이라크 약탈자들은 폭격으로 인한 손상에 대비해 창 없는 보관소 등에 옮겨놨던 유물까지도 마구잡이로 쓸어갔다고 미 워싱턴포스트가 13일 보도했다. 이 과정에서 수메르 토기와 아시리아 대리석 조각, 바빌로니아 조상(彫像), 정교한 설형문자가 새겨진 거대한 석판 등과 같은 이라크인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보물이 망가진 것으로 전해졌다.

<사진: 함무라비법전>

이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보복법(凍害報復法)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의 서판이다. 약탈 당시 이 법전의 서판이 박물관 내에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여전히 행방이 묘연해 약탈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폭풍과 같은 약탈이 휩쓸고 지나간 박물관 내부에는 고대 문명과 바빌로니아, 수메르, 아시리아 등 고대 왕국의 유물 17만여 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깨진 유리와 부서진 도자기 조각만 나뒹굴고 있다. 손실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박물관에 돌아온 직원들은 깨진 도기 파편들이 문가에 널브러져있는 광경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둘로 쪼개진 수메르 판(板)을 조사하던 나브할 아민 부관장은 “우리의 유산은 끝났다”면서 “그들은 왜 이런 짓을 했는가”라며 절규했다

약탈자들은 황금 사발, 황금 잔, 장례식에 쓰이는 가면 등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유물들을 모두 가져가 버렸다. 일부는 손수레를 끌고 와서 고대 왕국의 보물 뿐 아니라 고대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도 실어 내갔다.

***미군 주둔 정당화 노린 방조 의혹 제기**

중동지역 전문기자로 이번 전쟁에서도 어김없이 명성을 날렸던 영국 인디펜던트의 로버트 피스크 기자는 “문명이 조각나 버렸다”며 약탈자들이 체계적으로 유물을 약탈해 갔다고 전했다. 그는 유사이래 어떤 침략에도 파괴되지 않았던 유물들이 "이라크인을 해방시키겠다"는 미군의 전쟁으로 인해 철저히 파괴됐다고 한탄했다.

피스크 기자는 미국이 일부러 문화재 약탈 사태를 방치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했다. 유물 파괴로 이라크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힘과 동시에, 친미정권 수립과 미국에 의한 질서 확립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저의가 깔려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 제기다. 이같은 의혹은 폭도들이 국립박물관을 약탈하고 있음에도 박물관 근처의 미군들이 이를 수수방관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일부 시민들은 이에 미군에게 달려가 “왜 약탈자들을 방관하느냐. 도시를 점령했으면 질서까지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항의했다. 피스크 기자와 인터뷰한 한 여인은 “우리는 사담을 증오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부시도 증오하고 있다. 우리의 도시를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노골적인 반감을 표했다.

한 바그다드 시민은 피스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우리는 미군이 우리 유물을 지켜주기 바란다. 우리는 미군과 경찰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피스크 기자는 “해방은 이미 점령으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실제로 미군은 12일 후세인 정권하에서 일했던 경찰들에게 다시 치안을 맡기고 미군이 그들을 지휘하기로 해 문화재 약탈을 계기로 점령정책을 구체화한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낳고 있다.

***폭격으로 파괴된 고대 문명**

<사진: 유적>

이라크의 찬란한 고대문명이 파괴된 것은 비단 이번 약탈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이 3주간 퍼부었던 폭탄과 격렬한 전투로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으로 불리는 이라크 각 도시들은 이미 파괴될 대로 파괴됐다.

움카스르에서 바스라-나시리야-나자프로 이어졌던 연합군의 진격로는 ‘메소포타미아(그리스어로 강 사이의 땅 즉,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를 말함)’로 불리는 거대한 ‘유적 벨트’다. 고대 수메르왕국과 바빌론왕국의 유적은 주로 미군 선발부대인 제3보병사단의 이동경로에 집중 분포돼있었다. 바그다드 진공작전 전에 이라크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던 카르발라 이북 전선(카르발라-힌디아-힐라 지역)도 기원전 1900년께 세워진 바빌론 시대의 유적지였다.

이집트 주간지 알 아흐람은 아직 정확한 통계가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이지역 유물들의 상당수가 파괴되었다고 보도했다.

알 아흐람은 바그다드에 있는 역사적 건물들도 폭격으로 파괴돼 이라크인들 뿐만 아니라 아랍의 모든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고 전했다. 13세기에 세워져 아랍지역 과학과 약학, 수학의 고향으로 불려지는 무스탄시리아 대학도 파괴됐고 이슬람 시아파 사원으로 유명한 카드히마인도 폭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라크의 고대유물이 폭도들에게 약탈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91년 걸프전후 미국의 공작으로 남부 시아파, 북부 쿠르드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이라크 유물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폭도들의 주된 약탈대상이었고 이때 약탈된 귀한 유물들은 그후 해외로 반출됐다. 이에 유네스코는 이라크전 발발직후 미-영군에 대해 이라크 유물 약탈을 막아달라는 공개적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라크에서는 문화재 약탈이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사라진 이라크 유물이 몇년뒤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박물관에서 버젓이 전시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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