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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폭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인디펜던트 르포> 집속탄에 쓰러지는 민간인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없애겠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오히려 자신들이 열화우라늄탄과 집속탄 등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하며 숱한 이라크 민간인 사상자를 낳고 있어 국제사회의 강한 비판을 사고 있다.

영국 인디펜던트지의 종군기자 로버트 피스크는 3일(현지시간) 인디펜던트지에 최근 미국의 집속탄 사용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그 피해를 낱낱이 파헤쳤다.

다음은 "통곡하는 아이들, 부상자와 사상자: 바빌론에 쏟아진 집속탄의 희생자들"이란 제하로 소개된 글의 주요내용이다.

***"바빌론에 쏟아진 집속탄의 희생자들"**

부상자들은 등과 얼굴에 1인치 정도의 깊이로 박혀있는 선홍색 폭탄파편으로 심한 상처를 입었다. 힐라 병원의 병동에 있는 부상자들을 보면서 옛 이름이 바빌론이었던 이 도시(바그다드) 주변에서 자행된 미국의 집속탄 폭격은 제네바 협정에 위배되는 불법행위인 것이 확실하게 증명됐다.

통곡하는 아이들, 가슴과 다리에 상처를 입은 젊은 여성과 머리에 박힌 파편을 제거하기 위해 뇌수술을 받아야 하는 10명의 부상자들은 포도송이와 같이 하늘에서 떨어졌던 집속탄의 폭발에 대해 밤낮으로 얘기했다. 의사들의 말에 따르면, 집속탄 투하는 나드르, 지피, 아크라민, 마하윌, 모한데신, 하일 아스커리 등의 마을에까지 피해를 주었다.

미국의 폭격기는 정녕 현대전쟁 사상 가장 치명적인 무기를 이 지역에 투하했을까?

토요일 이래 힐라 병원에서 죽어나간 61명의 사상자들은 우리에게 답을 해줄 수 없다. 집에 앉아있다가 하얀 파편이 온 하늘을 뒤덮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생존자들도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

라헤드 하켐은 일요일 오전 10시30분 나드르에 있는 집에서 폭발음을 듣고 창밖을 봤을 때 하늘에서 폭탄이 마치 비처럼 내리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는 말을 해 주었다. 라헤드는 하늘에서 떨어진 집속탄은 검은색과 흑색의 작은 상자 같았다고 묘사했다.

카리마 미즐러는 "집속탄은 소형폭탄이 마치 줄로 연결돼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고 말하며 아마 작은 폭탄 세트를 갖고 있는 '철나비'가 하늘에서 폭탄들을 떨어뜨리는 듯 했다"고 덧붙였다.

집속탄 폭격으로 대부분 부녀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즉사했고 일부는 눈이 멀기까지 했다. 힐라 병원에서는 토요일 폭격이후 2백명이 넘는 부상자가 치료받았으며 수술중 또는 후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61명이었다고 발표했는데 사망자의 80%는 민간인이었다.

내가 입수한 자료가 신빙성이 있다면 이 지역에는 최소 40명의 이라크군이 있었는데 그들은 영안실 문밖에서 더러운 옷을 입은 채 죽어있었다. 나는 이 곳에서 카키색 요대와 전투용 재킷을 발견했다. (미-영군은) 이 곳의 마을 사람들이 민병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이 곳에는 아무런 무기나 군사시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누구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 하지만 제네바 협정은 비록 군사시설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도 집속탄의 사용은 금지돼야 하며 군사들의 충돌상황에서도 민간인의 보호는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집속탄으로 심한 부상을 입었던 10세 소녀 마리암 나스르와 그녀의 동생인 호다에 관한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마리암은 폭탄파편이 박혀있는 오른쪽 눈에 보호대를 하고 있다. 그녀는 허벅지와 복부에도 부상을 입었다. 마리암은 병실 침대 옆에 서 있는 동생 호다를 알아 보지 못했다.

호다도 심한 부상을 당했다. 호다의 어머니는 호다 머리 칼을 제치며 그녀 머리에 있는 구멍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폭탄파편으로 난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녀의 머리는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 어머니는 집안에서 폭발음을 듣고 그녀의 딸들이 문가에서 피를 흘리던 모습을 묘사해 주었다. 우리가 그들의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소녀들은 우리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라크 당국은 종군기자들에게 집속탄 폭격으로 다친 환자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어린 부상자들과 학력이 낮은 그들의 부모들은 이런 비극과 고통의 얘기를 잘 표현할 수 없었다. 또한 이라크 사람들은 나드르 마을 길가에 여전히 버려져 있는 소형폭탄의 잔해를 통해 (미국의 집속탄 폭격에 관한 참상을) 윤색할 수도 없었다.

Sky TV의 제작진 중 한 명은 나드르에서 발견한 소형폭탄의 파편을 바그다드까지 가지고 왔다. 그가 가져 온 폭탄에는 인간의 몸을 뚫을 수 있는 사악한 작은 철구(鐵球)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힐라 병원의 대표와 의사는 최근 이 도시에서 어지럽게 일어났던 군사행동에 대해 언급했다. 그들은 "미군의 아파치 헬기들은 특수부대 수송을 목적으로 카르발라로 가고 있었는데 특수부대가 이라크 민병대들의 저항으로 퇴각하게 되자 즉각적으로 집속탄 공습을 시작했다"고 입을 모았다. 비록 힐라 병원은 폭격이 행해진 마을 건너편에 있었지만 힐라 병원의 사람들은 미국의 이런 작전변화를 믿고 있었다.

미군이 티그리스 강 주변을 폭격한 후 철수하고 이라크군은 다른 지역에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봤을 때 이라크 전쟁에서 '최전방'이란 의미는 사라진 게 분명하다. 이번 전쟁에서는 미-영군만이 제공권의 우위를 보이고 있으며 이라크 전투기는 단 한대도 출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영군의 장교들은 이라크가 집속탄을 투하했다고 주장할 수조차 없다.

집속탄은 1982년 이스라엘의 서 베이루트 공격때 사용된 전례가 있다. 이스라엘군은 당시 각지에서 활동하는 미 해군을 위해 만들어진 집속탄을 파카니와 오우자이 지역에 투하해 내가 힐라 병원에서 목격한 것에 상응하는 치명적이고 극심한 상처를 민간인들에게 남겼다. 군사목표에 국한해서 사용해야 하는 집속탄을 오용했던 이스라엘에 화가 난 레이건 행정부는 당시 이스라엘로의 전폭기 출하를 유보했다가 화가 풀린 몇 주 후에서야 다시 전폭기를 (이스라엘로) 출하했다.

1980~1988년까지 계속된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이라크가 이란군과 친이란계 쿠르드인이 살고 있는 지역에 독가스 폭탄을 투하했을 때 이라크측은 불법무기를 사용했다는 비난의 목소리를 쉽게 듣지 않았다. 하지만 용서할 수 없고 국제법에도 저촉되는 이번 미군의 집속탄 폭격에 대해 이라크측은 인권침해라며 격분했다.

(후세인의 폭정으로) 인권이 유린된 이라크에서 미-영군이 조심하지 않는다면 미-영군은 그들이 항상 이라크에 대해 주장했던 전범국가라는 오명을 스스로 쓰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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