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출신의 인권운동가 조 윌딩은 알 샤브 시장 폭격이후 안전지대를 잃고 동요하는 바그다드 시민들의 모습을 3월 29일(현지시간) 미국의 정치전문 잡지 <카운터펀치>를 통해 전해 주었다.
다음은 ‘시장에 떨어진 폭탄- 안전지대는 없다(Bombs in the Marketplace-Nowhere is safe)’라는 제하로 보도된 르포의 전문이다. 편집자
오늘 아침 바그다드의 아침 하늘은 맑았다. 이것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비록 도시를 가로질러 피어 오르는 연기 때문에 확 트인 광경은 아니었지만 눈부신 아침 햇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축복이다. 그러나 동시에 맑은 날씨로 안전한 시간은 끝났다는 점에서, (전쟁의 잔인한) 살육이 시작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는 저주였다.
나는 주류 미디어들의 이라크 전쟁보도를 보지 않아서 어떻게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어제 알 샤와브 시장 폭격과 시리아에서 온 여객버스가 미국의 폭탄에 맞았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시리아 여객버스가 피격된 곳은 바그다드에서 4시간 가량 떨어졌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해 줄 말이 없다. 하지만 한 친구는 “이 사고로 5명의 부상자가 바그다드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는 것을 보았다”고 했으며 내 친구들은 “시리아 피난민들이 세 대의 버스로 다마스커스를 떠나 바그다드로 향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내 친구들은 “당시 아파치 헬기는 버스를 뒤쫓았고 버스가 인터체인지 지점에 있는 다리를 건너려고 할 때 아파치 헬기에서 미사일이 발사돼 다리가 파괴됐다”고 말했다. 친구들은 "버스들이 충돌했고, 민간인을 태우고 있는 버스 한 대는 미사일에 피격당했다"고 일러 주었다. 하지만 나는 몇 명이 죽고 부상당했는지 잘 모른다.
알 샤브 시장에서 일하는 모하메드 알 주바이디는 우리에게 “시장에는 자동차 쿠션을 파는 나의 가게가 있었다”라며 “시장이 폭격당한 후 남아 있는 것이라곤 불에 타서 알아보기 힘든 내 가게의 작은 칸막이 뿐이었다”라고 밝혔다. 모하메드 가게의 점원인 파리스 엘 바위와, 전쟁으로 학교가 폐교돼 가게에서 일을 돕던 그의 11살짜리 아들 사이프는 폭격으로 사망했다. 그들의 시체는 완전히 타서 재가 됐다.
모하메드는 어제 11시 30분이 되기 5초전 두 개의 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봤다. 그는 뿌연 하늘 때문에 폭격기는 보지 못했지만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폭격이 있은 후) 길 가운데에 그리 깊지 않은 폭탄 웅덩이가 생겼고 길 양편에 있는 건물은 모두 불에 타 잿더미가 됐다.
후샴 후세인은 교통 신호등을 가리키며 “폭탄이 떨어졌을 때 나는 약 2백미터 떨어져 있었다 ”고 말했다. 그는 “폭탄이 모하메드 가게가 위치한 건물 앞에 떨어지는 것을 봤는데 그 폭탄이 떨어지면서 생겨난 웅덩이가 작은 것으로 미뤄 봤을 때 폭탄이 그리 큰 것은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상점들 위에 있는 민간인 아파트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다”고 언급하며 “이 가게는 항상 열려 있고 시장은 매우 번잡한 곳”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45~50명의 부상자가 병원으로 이송됐다고 말했다. 그 누구도 알 샤브 시장이 미군 폭격의 타겟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모하메드는“우리 가게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종업원 5명이 죽었다”고 말했다. 식당을 찾았던 2명의 손님들도 목숨을 잃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시장 근처에 있던 이라크 시민들 중 한 남자는 불타는 차 안에 갇혀있던 한 여인도 목숨을 잃었다고 진술했다. 사파 이슬람과 그의 동생 마르완은 폭격 당시 차 안에 있다가 부상을 당했으며 당시 운전을 하던 그들의 아버지는 죽었다.
이라크의 가정은 미국의 공습이 시작된 이후 어머니, 아버지, 아이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화요일(25일) 저녁 시장과 같은 구역내에 있는 발키스 여자 중학교 근처에도 폭탄이 강타했다. 학교는 심하게 파괴됐고 시민들은 이 곳이 미국의 타겟이라고 생각했다. 폭탄은 74번 구역 옆에 있는 벽을 뚫고 들어가 각각 0.5센티미터의 파편을 튀겼는데 이는 마치 수 많은 총알구멍처럼 벽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작은 구멍은 직경 약 2인치 정도였다.
TV는 완전히 폭파됐고 창문의 쇳대는 녹아 있었으며 침대의 매트리스는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무니브 아비드 하미드는 폭격으로부터 아내와 아이들을 몸으로 막았다. 그의 부인 사하르 타하는 가슴에 부상을 입었지만 안-나만 외과 병원에서 현재 퇴원한 상태이다. 6살박이 아들 카이세르 무니브는 두 다리가 모두 부러졌다. 무니브는 다른 가족들을 밑에 층으로 대피시킨 덕에 나머지는 모두 무사했다.
무니브는 강인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담당의사는 “무니브가 강하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무니브의 어머니는 우리에게 몸동작으로 무니브의 가슴을 가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무니브의 온 몸은 폭탄 파편으로 가득했다. 의사는 무니브가 복부에 복합적인 부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의사는 “무니브의 장, 간, 다리, 발로부터 폭탄 파편을 제거했지만 아직도 그의 몸에는 파편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무니브의 다리를 감싸고 있는 붕대는 누런색으로 다소 불결해 보였다. 그는 여전히 두 다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험과 함께 회저병과 싸우고 있다. 무니브는 “나는 자동차 수리공인데 앞으로 일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하며 “내 생각에 나는 앞으로 일을 못할 것같다”고 체념했다. 무니브가 했던 말은 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바그다드에서 다른 시민들이 외쳤던 “이게 민주주의인가? 이게 자유인가?”라는 절규의 메아리처럼 들렸다.
우리는 월요일(24일) 점심때 가옥 다섯 채를 무너뜨렸던 폭격이 있었던 아다미야의 티 파티에 초대받았다. 사람들은 모두 일을 안 하고 학교에도 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대부분 집에 있다가 6명이 목숨을 잃는 참변을 당했다. 아무도 폭격이 시작될 때까지 폭격기 소리를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아마 폭탄이 바다 건너에서 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멀리서 발사된 폭탄이 은신처였던 그들의 집을 무너뜨린게 너무 의아했다.
13번 구역 바로 위에서 떨어진 폭탄은 할머니 코울라 쉐클리, 아버지 아메드 무니에르, 그리고 딸 마하 왈리드의 생명을 앗아갔고 나머지 세 명은 부상을 당했다. 또 다른 세 명은 길거리에서 횡사했다. 11번 구역에서는 65세의 노파 와드하 무클리프와 그녀의 남편인 아비드가 건물에 눌리고 파편에 피부를 찢기는 부상을 당했으며 15번 구역에서는 10살짜리 함사 아메드와 그녀의 어머니가 부상을 입었다.
이제 이런 것(폭격)들은 일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미군의 군사적 타겟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들이 얼마나 많은 군사적 목표물을 파괴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번 전쟁을 보는 내 시각이 다소 편파적일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매일 가옥과 사람들을 난도질하고 있는 미군의 폭격은, 이번 전쟁의 일부에 불과할지는 모르지만 가장 극적인 측면이라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내 친구 자이드는 전기는 들어오지 않고 간헐적으로 나오는 수도로 3일동안 지내고 있다. 내 친구 마지드는 "내 집에는 가끔 전력이 공급될 뿐이고 윗 층의 모든 창문은 부서졌다"고 말했다. 그는 그의 집이 공항에서 매우 가까워 미군이 공항에 내려 바그다드로 진격할 때 그의 집을 통해 올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바그다드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여겨지는 디알라로 떠났다. 디알라는 며칠 전 농장이 폭격됐던 곳이다.
집도 안전하지 않고 농장도 안전하지 않고 시장도 안전하지 않다. (공습이 계속되는 한 바그다드에서) 그 어떤 곳도, 그 어떤 곳도 안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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