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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우리를 공격했고 우리는 공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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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우리를 공격했고 우리는 공격하지 않았다"

<WP 르포> 시아파 카리마 가족에게 비친 이라크전

이라크에서 30년 가량 지속돼온 바트당의 독재로 가장 피해를 본 사람들은 이슬람 다수파인 시아파 교도들이다. 후세인 정권은 시아파 지도자들을 수 차례 숙청했고 시아파들은 소수 수니파들의 핍박을 피해 이웃 나라인 이란으로 도망가야 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발발로 인해 시아파와 수니파는 서로간의 앙금을 잠시 뒤로 한 채 서로 힘을 합쳐 알라신의 이름으로 미-영군에게 맞서 싸우고 있다.

이라크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시아파의 항전 결정은 시아파가 많이 사는 남부지역을 선점할 경우 이들의 동조로 후세인 정권을 조기에 붕괴시킬 줄 알았던 미-영군을 장기전의 늪으로 몰아넣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28일(현지시간) 아들을 전쟁터로 보낸 시아파 어머니의 힘든 삶과, 그들이 왜 항전을 선택했는가에 보도했다. 다음은 "인내하는 삶, 지금은 전쟁중(Enduring life, and Now War)"이라는 제하로 소개된 르포의 주요 내용이다.

<사진>이라크 여인들과 아이들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시아파 어머니의 눈물**

아침 미국의 폭격이 있었던 바그다드의 저녁 무렵, 여덟 아이의 어머니인 카리마는 전쟁터로 나가는 큰 아들을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카리마와 아들의 이별은 이슬람 교도들이 흔히 쓰는 말인 '신이 함께 하기를'로 점철됐다. 카리마는 낡은 빨간색 버스에 올라타는 아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을 가진 카리마의 아들이 5시간 버스를 타고 모술시에서 북쪽으로 45마일 가량 떨어진 바탈라에 가는 동안, 카리마는 집에 돌아와 검은 베일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카리마는 "어머니의 마음은 아들의 가슴에 살아 있다"며 "매 시간마다 나는 아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고 고백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 수년간의 경제제재, 후세인 독재로 인한 깊은 고통에 시달렸던 카리마에게 이라크 전쟁은 또다른 비극일 뿐이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카리마는 혼란스럽고 모순투성이인 바그다드의 현주소를 표현해 주었다. 하지만 이라크 인들은 전쟁이 2주째 접어들고 있는 상황에서도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

카리마는 수니파에 의해 지배돼온 독재정권의 가혹한 핍박을 받고 있던 시아파 교도이다. 카리마는 그녀의 아들이 군대에 입영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이번 전쟁을 소모전으로 여기며 그녀가 희망하는 소식이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뉴스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카리마의 다섯 딸들은 현실문제라기보다는 전쟁의 공포심 때문에 후세인 지지를 외치고 있다. 카리마 딸들의 후세인 지지가 우리에게 더욱 생각할 점을 던져주는 것은 그들이 미국의 침략이라고 생각하는 이번 전쟁으로부터 그들의 가정, 국가, 신념의 보호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건 정치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생존'에 관한 것인 것이다. 벽쪽으로 향한 매트에 앉아있는 카리마의 딸들은 (각각 16, 15, 13, 12, 11세) 외국인의 신기한 모습을 보며 낄낄댔다.

카리마의 인생은 비극의 연속이었지만 의연함을 지켰다. 카리마의 남편은 8년전 죽었다. 바그다드에 주재한 일본회사에서 운전사를 했던 카리마의 남편은 다른 차의 브레이크 고장으로 목숨을 잃었다. 카리마는 2년전 자신이 하인으로 일하던 곳의 주인인 레바논 출신의 의사가 이라크를 떠나면서 일자리도 잃었다.

카리마는 지난 1월에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 차고에 수도와 전기를 임시로 설치해 살고 있다. 그녀의 첫째 아들은 1년 6개월전 입대했고, 둘째 아들은 자동차 절도죄로 5개월간 감옥에 있어야 했다. 카리마는 "아홉살박이 막내 아들은 아직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카리마는 낡은 복도와 누더기로 덮인 가구가 있는 쓰러져 가는 건물 꼭대기의 방에 입주하고자 하고 있다. 하지만 그 곳도 월세가 18달러여서 그녀가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카리마의 친구들과 친척들은 바그다드를 많이 떠났다. 카리마의 올케는 자식들만 차에 태운 채 모든 것을 집에 놔두고 시리아로 탈출했다. 카리마는 "누구든지 할 수 있으면(경제력이 있으면) 이라크를 탈출하고 그렇지 않으면 집에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극심한 가격 인플레도 카리마가 감당해야 할 걸림돌이다. 달걀 24개짜리 한 묶음은 50센트에서 1달러40센트로 올랐고 전쟁에 대비한 비상식량, 감자는 2파운드 가격이 일주일간 세 배나 상승했다.

카리마는 좁은 방 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 괴로움도 겪고 있다. 전쟁이 터지기 하루 전부터 학교가 폐쇄되어 카리마의 대가족들은 방 세 개에서 숨막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카리마는 "폭격 때문에 겁에 질려 밖에 나가기가 두렵다"고 말했다. 카리마는 폭발로 인한 공포가 그들의 낡은 집으로 엄습할 때 그녀의 가족들은 어둠 속에서 계단통에 모여든 다른 가족들과 만났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우리는 폭탄이 떨어진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다"라며 "그곳에서 우리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고 오로지 긴장감만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카리마의 가족들은 전쟁보도에 있어 객관성을 갖고 있는 아랍어 라디오 방송 몬테카를로를 청취했다. 카리마의 가족들은 큰 아들이 있는 이라크 북부지역의 전쟁상황 뉴스에 조용하게 귀를 기울였다.

전쟁이 시작될 때 카리마의 큰 아들은 집에 있었다. 이라크 군인들은 매달 1주일동안 휴가를 얻어 집에서 쉬게 되는데 카리마의 큰 아들은 1주일 휴가기간 중에도 배관공으로 일했다. 카리마는 "큰 아들은 전쟁에 나갈 때 잠깐 동안 주저했다"고 밝혔는데 카리마의 딸은 "오빠는 두려워 하지 않았어요"라고 반박했다. 카리마는 딸의 말을 부정하며 "물론 내 큰 아들은 두려워하고 걱정했다. 하지만 알라 신은 존재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전쟁에 대비해 병력을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 내려진 후세인의 사면조치를 통해 지난해 10월 감옥에서 풀려났던 카리마의 둘째 아들도 총을 들었다. 그는 바그다드 시내에서 소련제 소총 칼라슈니코프를 들고 미군과의 시가전에 대비하고 있다.

카리마의 가족들은 자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념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이 주장하는 (이라크)해방이란 말에 카리마의 가족들은 고개를 흔든다. 쉽게 결판날 것 같지 않은 (이라크)해방이란 말은 도리어 그들을 분노케 하고 있었다.

카리마는 "미국은 강하다"며 "하지만 알라 신이 지겨주는 우리는 더 강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우리는 우리만의 권리를 갖고 있다. 그들은 우리를 공격했고 우리는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무기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알라 신이 있다"고 주장했다.

카리마의 가족들에겐 후세인이 이라크가 아니고, 이라크가 후세인도 아니다. 그들에게 이라크는 모하메드의 가족들이 묻혀 있는 '신성한 도시' 나자프, 카르발라가 있는 곳이다.

카리마의 딸은 "외국사람들이 평화롭게 바그다드를 방문하면 우리는 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적으로서 바그다드에 오면 우리는 나가서 돌을 던지며 맞서 싸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카리마는 끝으로 "신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생명과 힘은 없다. 신도 그렇게 되기를 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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