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김창국)의 이라크전 반대 의견서 파문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인권위 반전 성명서가 오는 28일 이라크전 파병 동의안 국회 처리를 앞둔 예민한 시점에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은 일제히 인권위 의견서에 대해 “국가기관으로서 부적절한 태도”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조선ㆍ중앙ㆍ동아일보도 27일 일제히 사설을 통해 “인권위가 시민단체냐”며 비난했다.
반면 반전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시민단체 및 네티즌들은 인권위 성명서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정당으론 유일하게 민주노동당이 인권위 성명서 발표에 찬성하는 논평을 냈으며, 한겨레도 이날 사설을 통해 인권위 입장에 동조했다.
이에 청와대는 유인태 정무수석 등이 반전 여론 진화에 나섰으나 쉽지 않을 전망이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26일 유 수석이 제안한 간담회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한나라ㆍ자민련 "인권위원장 문책", 민노당은 지지 성명 발표**
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은 인권위 성명서가 발표된 26일 일제히 “국가기관으로서 부적절한 태도”라고 비난했다. 특히 한나라당은 인권위원장 사과와 사퇴를 촉구했고 자민련도 이같은 ‘항명’에 대한 문책을 요구했다. 가뜩이나 28일 국회의 파병동의안 처리를 앞두고 “찬성표를 던지는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낙선운동을 벌이겠다”는 여론의 압력에 곤혹스런 상황이기 때문이다.
민주당 문석호 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내고 "정부가 이미 파병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황에서 부적절하다"며 "국민의 고귀한 인권을 보호하고 향상시켜야 한다는 취지에서는 일견 이해할만 하지만 국가기관인 인권위가 정부 내 협의와 토의과정을 통해 이런 견해가 충분히 조율되도록 하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박종희 대변인은 "사실상 대통령 뜻에 반하는 입장을 밝힌 것은 본분을 망각한 국론분열 행위"라며 "국회의 파병동의안 표결을 앞두고 업무영역을 벗어나 반전여론 확산에 앞장선 것에 대해 인권위원장은 국민 앞에 정중히 사과하고 사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민련 유운영 대변인도 "정부에 대한 일종의 항명행위로 용납할 수 없는 처사"라면서 "인권위는 국가와 국민 앞에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민주노동당은 “국가인권위의 의견서는 '본분을 망각한 국론분열 행위'가 아니라, '본분을 지킨 국가이익 행위'로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며 찬성 입장을 밝혔다.
민노당 이상현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우리는 전략적, 현실적 판단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논리로 헌법정신까지 짓밟으며 반인권 침략전쟁의 공범자로 나서겠다는 노무현 정부와 보수 양당의 '부적절'한 처사야말로 범국민반전여론에 대한 '항명행위'로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노무현 정부와 양당은 지금이라도 국가인권위가 권고한대로 이라크 전쟁을 '반전·평화·인권'의 대원칙에 입각해서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민단체ㆍ네티즌 “환영”**
시민단체와 네티즌들은 대부분 “인권위가 이제야 제자리를 찾고 있다”며 환영했다.
참여연대의 이태호 정책실장은 “파병 반대에 대한 여론 수렴 없이 파병안을 처리하려는 국가에 대해 인권을 대변하는 기구가 제동을 건 것은 환영한다”며 “인권위의 의견으로 인해 정부는 선택의 여지를 넓힐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새사회연대의 이창수 대표는 "이번 의견서는 인권위가 자기 위상을 바로 세우는 좋은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며 "모든 정부기관이 통일된 견해를 가질 필요는 없으므로 이번 인권위의 의견서가 정부 방침과 어긋난다고 해서 문제 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네티즌들도 대부분 인권위 입장에 찬성하는 의견을 개진했다. 인권위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성명서 발표 후 현재까지 2백50여개의 의견이 올라와 인권위 입장에 대한 찬반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최하나’라는 네티즌은 “인권위는 정부의 한 기관이기 앞서 국민의 또 하나의 발이고, 손이고, 가슴이며, 정부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고, 우리 어머니의 것이고, 우리 국민 모두의 것”이라며 인권위에 동조하는 의견을 밝혔다.
***조선.중앙.동아 VS 한겨레**
언론에서도 인권위 성명서에 대한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조선.중앙.동아일보는 27일자 사설을 통해 인권위 입장 발표를 강도 높게 비판한 반면 한겨레는 찬성 입장을 밝혔다.
조선일보는 ‘국가인권위가 시민단체인가’라는 사설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0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미국의 이라크전 지지 입장을 분명히 했고, 정부는 이라크 파병을 결정해 놓은 상태”라면서 “이런 상황에서 국가인권위가 불쑥 정부 바깥에서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시민단체적인 행동양식을 보이는 것과 다름없다”고 비난했다.
조선일보는 이어 “국가인권위의 성명은 국내외에서 반전 여론이 고조되고 이에 따라 우리 군의 파병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정부가 파병 결정 이후 국회와 국민에 대한 적극적인 설득작업을 벌이지 않고 여론의 눈치를 살피며 엉거주춤하고 있는 사이 정부 내의 균열현상까지 생겼다는 점에서 국가인권위의 부적절한 처신에는 정부도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정부를 비판했다.
동아일보도 ‘인권위가 반전성명 내는 곳인가’라는 사설을 통해 “반전 시위에도 대의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기구가 법률에 명시된 업무 영역을 뛰어넘어 이라크전 반대 활동에 참여한 것은 사려 깊지 못한 일”이라고 비난했다.
중앙일보는 ‘盧 대통령, 파병안 처리 앞장서야’라는 사설을 통해 인권위 뿐아니라 반전 여론에 밀려 ‘갈팡질팡’하고 있는 정치권, 또 파병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지 않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을 동시에 비판했다.
중앙일보는 이 사설에서 “법적으로도 국가 인권위원회는 활동범위가 국내 인권으로 한정돼 있다”면서 “인권위가 독립적이라 해도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을 초월해 있는 기관이 아니다. 인권위가 인권을 다룬다 하여 무슨 유엔기구나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가”라고 비난했다.
반면 한겨레는 이날 ‘반전 민심에 추가 파병 요구라니’라는 사설을 통해 미국측의 추가 파병 요구에 대해 비판했다. 이어 인권위 성명과 관련 “정부 등 국가기관에 의한 인권침해를 방지하는 것이 인권위의 설립 목적이므로 우리는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겨레는 이어 “파병동의안 처리를 위해 청와대가 대국민 설득에 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청와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대국민 설득이 아니라, 진정한 민의를 국가정책에 반영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청와대, 대국민 설득작업 나섰으나...**
청와대측은 인권위 반전 성명서에 대해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이날 이라크전 파병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나서는 등 적극적인 설득 작업에 나서는 등 내심 곤혹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육군 3사관학고 졸업 및 임관식에 참석해 이라크전 파병에 대해 "이러한 결정은 명분이나 논리보다는, 북핵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나감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대단히 전략적이고도 현실적인 판단에 기초한 것"이라면서 "한·미간의 신뢰가 더욱 돈독해질 때, 우리는 북핵 문제의 해결과 북·미 관계의 개선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소식지인 <청와대 브리핑>도 이날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미국과의 협력 관계 속에서 추진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고, 따라서 비전투병력의 이라크전 파병은 대단히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이라고 밝혔다. <청와대 브리핑>은 ‘반전은 정당하고 파병은 타당하다’는 제목의 네티즌의 글을 싣기도 했다.
나종일 대통령국가안보보좌관과 김희상 대통령국방보좌관은 이날 기자간담회를 열고 파병의 효과와 의미를 설명했다.
나 보좌관은 “눈치 보면서 (파병)하면 할 것은 다하고, 실속은 못 챙기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 보좌관은 “(이라크전쟁에 파견되는) 공병대와 의무대는 넓게 보면 모두 인도적인 부대이다. 이를 두고 전투부대를 보내는 것처럼 오해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한편 유인태 정무수석은 이날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대표자들에게 간담회를 제안했으나 시민단체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들은 이날 성명서를 통해 "청와대가 이라크파병문제로 시민사회단체에 간담회를 제안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28일 이라크전 파병동의안을 국회본회의 상정 움직임은 청와대가 진정하게 국민여론을 수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에 대한 강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며 "전쟁반대와 파병반대라는 우리의 입장은 대화와 설득, 타협으로 번복될 일이 아니기에 정무수석과의 간담회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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