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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용기를 가질 수는 없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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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용기를 가질 수는 없는 걸까요?"

[전태일통신 49] 아미쉬의 시선

지난 10월 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랭캐스터의 한 아미쉬(현대과학과 물질문명을 철저히 거부하고 옛날식으로 농사를 지으며 자연 속에서 느리게 사는 기독교 공동체) 마을의 학교에서는 끔직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동네에 사는 찰스 로버츠(32살)라는 트럭 운전사가 교실에 침입해 11명의 여학생을 쏴서 결국 5명을 숨지게 하고 스스로 자살해버렸습니다. 아미쉬 마을에서는 도무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사건이었고 너무나도 비참하고 슬픈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외신을 통해 우리 언론에도 보도가 됐습니다. 어떤 신문들은 사건을 전하면서 "미(美), 아미쉬 마을 학교서도 총격"(조선일보), "문명 등진 아미쉬 마을에서도… 미 학교, 또 총기 난사"(한국일보)라며 미국에서 흔히 일어나는 학교 총격 사건이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일어났음을 강조했습니다. 어떤 신문은 성폭행 가능성에 대한 추측 의견을 그대로 싣기도 했습니다.
  
  아쉽게도 사람들은 아미쉬에 대해 얘기할 때 그들의 복장과 전기나 컴퓨터 같은 '문명'을 등진 '별난' 모습에만 호기심을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그들의 삶은 단순합니다. 그리고 단순한 삶을 통해 예수님에게 배운 것을 삶으로 살아가고 싶어 할 뿐입니다.
  
  우리 신문들은 그 흔한 호기심은 보였지만 총격 사건 이후에 일어난 중요한 일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주 10월 9일에 일어난 북한 핵실험 때문이었는지 아쉽게도 우리 신문들은 이 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 끔직한 일이 있었던 날 저녁, 희생 당한 아이들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총을 쏘고 자살한 찰스의 미망인과 아이 셋이 사는 집을 찾아가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며칠 후에는 찰스의 장례식에 참석해 그이의 죽음을 함께 슬퍼했습니다. 그이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 반 이상이 아미쉬 희생자 가족들이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아미쉬 공동체는 지역 은행에 찰스의 남겨진 가족을 돕기 위한 기금을 만드는 일을 돕기도 했습니다. 찰스의 아내는 희생자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여러분이 우리 가족에게 주는 사랑은 우리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회복을 돕고 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고 앞으로 '용서', '평화'라는 말을 가볍게 써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를 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해 왔고, 스스로 평화를 추구하며 산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고백하자면 저의 그런 말과 생각은 위선이었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의 용기 있는 행동을 보면서 많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스스로에게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라고 물어보기 힘들 정도로 가슴 벅찬 것입니다. 교실에 침입한 찰스가 선생님과 남자 아이들을 내보내고 여자 아이들을 향해 총을 쏘려고 할 때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가 나서서 "나를 먼저 쏘라"고 말했답니다. 다른 아이들을 살리려고 말입니다. 그 아이가 희생되고 나니까 다음으로 나이 많은 아이도 똑같이 그렇게 말하고 희생당했답니다.
  
  이 일이 벌어진 그 학교 건물은 얼마 전에 완전히 해체가 됐고 그 자리에는 풀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아미쉬 공동체는 앞으로 학교를 다시 짓겠지만 학교에 금속 감지기 같은 방범 장치는 달지 않기로 했답니다. 미국의 대부분 학교 입구에 금속 감지기가 있는 것을 생각하면 시대에 뒤떨어져도 한참 뒤떨어지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평화를 위한 진정한 용기는 제 마음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저는 얼마 전에 서울 성북동으로 이사를 해서 아내와 함께 동네 산책을 갔었습니다. 서울 성곽을 오르면 한 쪽으로는 성북동과 북정동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또 한 쪽으로는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집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집들에는 빠짐없이 침입 감지기와 감시 카메라 같은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런 집들 사이로 난 길을 걸을 때면 어디에 시선을 둘지 참 난처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장치들을 설치할 수밖에 없는 분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점점 사람들과의 거리가 멀어지고, 다른 이들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갖고 살아가는, 그래서 결국 다른 이에게 손을 먼저 내미는 진정한 용기를 잃어가는 나 자신과 이웃들을 생각하면 속에서 눈물이 납니다.
  
  어느 날 저녁 아내와 함께 시청 광장에 나가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이 북한의 핵실험을 성토하는 집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한 분이 "북한이 지금 인류의 마지막 무기인 핵폭탄으로 위협을 하고 있는 때에…"라며 빨리 대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저는 오히려 '인류의 마지막 무기는 핵탄두보다 더 딱딱하고, 핵분열보다 더 비정한 우리의 가슴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북한 사람들을 아미쉬 소녀들과 그들의 가족 같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요? 두려움 없이 평화를 확신하는 시선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그런 용기를 가질 수는 없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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