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김영미(33)씨는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프리랜서 PD다. 동티모르에서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카슈미르지역, 동티모르까지. 분쟁지역만을 골라 험한 촬영을 마다않는 그에게는 언제나 '분쟁지역 전문PD'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사진: 김영미 PD 정면 사진 카불에서>
최근 이라크에 다녀온 김영미 PD를 18일 동료들과 편집작업중인 일산의 한 가정집에서 어렵사리 만났다. 다음주로 예정된 특별다큐 편집으로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워낙 인터뷰를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이었다.
이라크 주민들의 인권상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그에게는 "물론 전쟁을 우선 막아야 하겠지만 그리고 나서 후세인이 건재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냐"는 답답한 물음들이 꼬리를 물었다고 한다.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은 부시의 공격 움직임에 공포를 느끼는 동시에 후세인의 폭정에 신음하는 이라크인들인데, 그 점을 부각시키면 결국 미국의 공격 명분을 키워 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고민이라 했다.
김 PD는 그러면서도 "미국에 대한 반감이 엄청나다. 후세인이 미국에 저항하니까 어쩔 수 없이 동조해 그러는 게 결코 아니다. 미국은 91년 걸프전 때 수많은 폭탄을 떨어뜨려 자기 부모형제를 죽였다. 그리고도 또 전쟁하러 온다는데, 반감을 안 가질 수 있겠나"라고 현지의 반미 분위기를 전했다.
***후세인은 없어져야 하지만 전쟁은 안돼**
후세인에 대한 강한 반감을 얻어온 이라크행이었지만, 여전히 김 PD의 주된 관심은 전쟁과 그로 인해 파괴되는 현지 주민들의 삶이었다.
무스타파라는 사람의 가족을 촬영하고 돌아오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살아 있어달라"고 기원했던 그는 "이번에 방영될 다큐는 완결판이 아니다. 전쟁이 끝나면 나는 다시 이라크로 가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소식을 다시 전할 것이다. 그래야만 완결된 작품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다시 이라크로 갔을 때 폭격으로 도시가 엉망이 돼 길을 못 찾을까봐 큰 나무며 산 같은 지형지물을 눈여겨봤다는 김 PD는 무스타파씨 가족과 헤어지던 장면을 얘기해 주며 목이 메었다."당신들이 죽어도 나는 당신들의 존재를 기억하겠다"는 말을 다시 못 볼 수도 있는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다고 했다.
<사진: 김영미 PD 작업장면>
미궁속에 빠진 것 같아 편집작업을 하면서도 힘이 든다는 김 PD의 메시지는 그러나 분명하다.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고, 후세인이 권력을 계속 잡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모순이랄 수 있는 그 두 가지 희망을 달성해 줄 수 있는 답으로 그가 조심스럽게 꺼낸 것은 '국제사회의 지원'이었다.
"이라크 공격에 대해 심각한 갈등과 혼란에 빠져있는 지금의 국제상황은 이라크가 그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둔 것에 대한 값비싼 대가"라는 그는 "국제사회는 반전에 힘쓰는 만큼 지금이라도 이라크인들의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미 PD가 지난해 말 출국해 이라크 현지에서 제작해온 다큐멘터리는 오는 26일 밤 11시 SBS에서 방영될 예정이다. "쇼킹하고 비참한 장면으로 충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면서도 가슴에 남는 게 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그는 "전쟁도 일어나지 말아야 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답을 내리지 못해 답답하다는 그가 찍어온 영상을 보면서 다같이 그 해답을 찾아야 할 때인 듯싶다.
다음은 이날 인터뷰 전문이다.
***경제활동 자체가 없고 빈부차 커**
프레시안 :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가니스탄 관련 TV 뉴스를 보면 시위하고 싸우는 장면밖에 나오지 않아 그들의 일상이 궁금하다. 이라크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김영미 PD : 그게 사실 언론의 문제점이다. 단면만 보여준다. 내가 이라크 간다고 했을 때도 사람들이 다 그런 장면만 기대한다. 싸이렌 울리면 대피하고 비참한 장면말이다. 그러나 사실 내 관심은 그것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가 궁금했다. 전쟁 전야라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맨몸으로 앉아만 있을 건지, 나름대로의 대비책을 세우고 있는지, 해외로 도망가려 하는지와 같은 것들이 궁금했다.
바그다드는 겉으로 보기에 우리나라 80년대 중반쯤의 서울과 비슷하다. 이라크는 그렇게 못사는 나라가 아니었다. 중동의 부호국가 중 하나였다. 7천년 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뿌리가 있는 나라다. 유적도 많다. 그 메마른 중동에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흐르고 있어 축복받은 땅이라 할 수 있다. 농사도 잘 되는 나라다. 10년간의 경제 제재에도 그나마 먹고 살수 있는 것은 농사가 되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경제적인 환경은 어떠했나.
김영미 PD : 내 촬영장소는 바그다드로 제한되었다. 거기서만 보면 그다지 못산다는 느낌이 없었다. 가게에 진열된 상품들이 조잡하긴 했지만 큰 불만은 없어 보였다. 바그다드 아라사트라는 거리에서는 청바지도 8만원 쯤 되고, 여자 옷도 12만원 넘는 게 있고, 고급 레스토랑도 많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게 틀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처음에 가졌다.
그러나 사람들을 겪어보고 오래 있을수록 빈부차가 심하다는 것을 목격했다. 후세인 독재의 영향도 있겠지만 미국의 경제제재 이후 경제학자들이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경제가 기형으로 흘렀다고 한다. 월급이 1천2백원 쯤 하는 사람이 태반인 반면, 잘 사는 사람들은 또 아주 잘 살고 있다고 한다.
프레시안 : 월급이 그렇게 적으면 생활은 어떻게 하나.
김영미 PD : 한달에 한번 콩, 쌀, 녹두, 설탕, 차, 비누, 담배, 분유 등을 배급받는다. 빠듯하지만 부족하지는 않다고 한다. 버스비가 없어 집에만 있으면서도 밥은 굶지 않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그냥 밥만 먹고 사는 거다.
이라크는 직장 잡기가 굉장히 힘든 나라다. 일단 경제활동 자체가 없다. 명문 바그다드 대학을 나와도 직장이 없다. 여자들은 교사, 남자들은 공무원이나 운전수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대학교수이면서도 살기 힘들어 택시운전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공포정치를 넘어 '살상정치'**
프레시안 : 경제적으로 그렇게 극한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정치상황은 어떤지.
김영미 PD : 문제는 정치적인 억압이다. 공포정치를 넘어서 거의 '살상정치'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후세인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실종되고 죽었다. 통계를 낼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바그다드에서 사담 욕을 하면 사방에 깔린 비밀경찰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죽었는지 어쨌는지 알지도 못하고 그냥 살아지는 거다.
후세인은 대통령이 되고나서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사법처리도 없이 공개처형했다. 그 중에는 그의 친한 친구도 있었다고 한다. 후세인을 비방하는 사람을 신고하면 직장과 돈을 주는 제도가 있어서 어떻게 하면 이웃을 감시해서 힘든 자신의 생활을 바꿔볼까 하는 생각을 갖고 산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입도 뻥긋 못하고, 마이크만 들이대면 이구동성 사담을 찬양한다. 한국 군부독재때와는 비교도 안 되고 북한보다도 더 심하다고 한다.
<사진: 후세인>
프레시안 : 미국에 대한 이라크인들의 감정은 어떠한가.
김영미 PD : 물론 반감이 엄청나다. 후세인이 미국에 저항하니까 어쩔 수 없이 동조해 그러는 게 결코 아니다. 미국은 91년 걸프전 때 수많은 폭탄을 떨어뜨려 자기 부모형제를 죽였다. 그리고도 또 전쟁하러 온다는데, 반감을 안 가질 수 있겠나. 후세인은 그 감정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 : 파키스탄 아프간 등도 다녀왔었는데 미국에 대한 중동인들의 감정은 어떤가.
김영미 PD : 알려진대로 중동인들 저변에는 반미감정이 깊다. 특히 탈레반이 무너지면서 실질적으로 미국의 식민지이자 전초기지가 된 아프간 주민들의 감정은 더 나빠진 것 같더라. 하지만 불만이 있어도 그냥 묵묵히 살아가는 것 같다.
***오나가나 비밀경찰**
프레시안 : 취재 여건은 어땠나.
김영미 PD : 속깊은 얘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마이크만 들이대면 나오는 대답이 똑같다. 심지어는 인터뷰 요원들을 배치해서 어제 이 집에서 인터뷰한 사람이 다음날 다른 집 아들이라고 하며 다시 인터뷰하는 식이었다. 취재를 통해서 뭔가 얻어내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모든 저널리스트한테 열흘짜리 비자만 허용이 되어 시간도 짧았다. 한달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비자를 얻었는데, 바그다드에서만 취재가 허용되고 프레스 카드 기다리고 가이드 배정되고 하는데 거의 5일 정도를 허비해서 실제 촬영기간은 3~4일에 불과했다. 다행히 기사회생으로 비자연장을 받아서 좀 더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아프간의 카불에서는 내가 원하면 뭐든 찍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라크에서는 굉장히 많은 비밀경찰이 나를 지켰다. 내가 묵었던 호텔이 사실은 경찰서의 다른 이름이었다. 호텔 종업원들도 모두 공무원이었다. 그 상황에서 자유로운 촬영이 어렵더라.
인터뷰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마이크를 귀 뒤에 꽂고 이라크 여자들처럼 머리에 검정색 목도리를 써 마이크를 숨기고 녹음했다. 뭔가 진실이 나올 것 같으면 바로 녹음 버튼을 눌렀다.
프레스센터에 등록하거 가면 나한테 "정치적인 장면을 찍지 마라. 추방당할 수 있다"고 겁을 줬다. 그런데 막상 그들과 같이 다니다 보니 사실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그들이었다. 입만 열면 "사담, 위대한 이라크"였다. 오히려 내가 "정치적으로 하지 말라"고 설득할 지경이었다.
***무스타파 가족**
프레시안 : 이번 다큐에서 특히 인상적인 장면이랄까 취재의 초점이 있었다면.
김영미 PD : 특별한 초점은 없다. 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 바그다드 시민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 비밀경찰이 늘 붙어 다니는 상황에서 연출도 불가능했다. 아프간에서 쌍둥이 둘이 얼어 죽는 장면을 찍었었는데 사실 그건 그곳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라크는 그렇게 비참한 상황은 아닌 것이 일상이었다. 물론 한편으로 사담 후세인 때문에 실종되고 죽어간 사람들의 가족들이 가진 한(恨)도 그들의 일상이었다.
다큐멘터리는 비참하고 쇼킹한 얘기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들을 다들 갖는다. 그런데 내 생각은 다르다. 진짜 다큐멘터리는 그런 장면이 안나오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것이다.
프레시안 : 그럼 이번 다큐에서는 무엇이 가슴을 울리나.
김영미 PD : 무스타파라는 아주 평범한 사람의 가족들을 찍었다. 돌아올 때 카메라를 든 채로 그 집 아이들과 포옹하면서 헤어졌다. 그때 내 마음은 '다음에 내가 올 때까지 살아있어라. 우리 살아서 만나자'였다.
이 사람들이 세상에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 한 장 남지 않고, 그들이 가족이었다는 사실조차 폭탄 한방에 박살이 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폭탄이 떨어지면 그들이 이 지구상에 갑자기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이라크 사람들 전체가 다.
'당신들이 죽어 없어진다고 해도 최소한 나는 당신들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하겠다. 하지만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까지 제발 살아 있어달라'고 속으로 울면서 기도했다. 폭탄이 떨어져 폐허가 되면 무스타파네 집을 찾지 못할까 싶어 큰 거리, 큰 나무 같은 것을 눈여겨 봐뒀다. 전쟁 끝나면 찾아가고 싶어서. 내 프로그램을 위해서보다 그들의 무사함을 확인하고 알리고 싶다.
<사진: 미국 전쟁 준비 그림>
프레시안 : 지난번 탈레반 여성 관련 다큐멘터리에서는 성적으로 억압받는 탈레반 여성들이 부각되었었다. 이라크의 상황은 어떠했나.
김영미 PD : 탈레반과는 꽤 달랐다. 이라크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남자들보다 목소리도 높고 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개방적이었고, 부르카를 안 쓰고 머리에 염색을 하고 다니는 여자들도 많았다. 공부에 대한 의지도 강했다. 전반적으로 이라크 사람들의 매너도 괜찮았다. 순진하면서도 대륙적인 기질이 느껴졌다.
***답답한 심정만 가득**
프레시안 : 이라크 문제가 어떻게 해결돼야 한다고 생각했나.
김영미 PD : 나도 물론 기본적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내가 찍은 무스타파네 가족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동네에 기와집에서 잘 사는 사람이 있고, 좀 떨어진 곳에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사는 가난한 집이 있는데 그 집 밑에 보물이 있다고 해 보자. 잘사는 집 주인이 그 보물을 갖고 싶어서 '동네를 대표해서 주정뱅이를 없애러 간다'고 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잘 사는 사람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은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서 거기에 합류한다. 술 주정뱅이는 술취했으니까 무조건 싸우려고만 한다. 문제는 그 술주정뱅이가 부인과 아이들을 때리고 행패를 부리는 동안 동네 사람들이 남의 집 일이라고 침묵했다는 것이다.
전쟁을 하면 이라크 주민들만 피해를 보고, 그렇다고 후세인을 그냥 놔두면 계속 압제에 시달리게 되는 상황이다. 이라크 문제에 대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동안 국제사회가 침묵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답이 없다. 나도 프로그램 만들면서 답답하기만 했다. '결론은 이거다. 이렇게 해야한다'며 내놓을 것이 없다. 부시도 부시지만 사담도 정말 나쁜 사람이다. 없어져야 할 사람이다. 나는 '사담이 살아있다면 이라크에 다시는 안 간다'고 이를 갈고 나왔다. 문제는 미국이 이런 말을 악용할 수 있다. 그래서 힘들었고 다큐 편집을 하고 있는 지금도 힘들다.
***호텔 종업원의 행방불명**
프레시안 : 특별히 기억나거나 힘들었던 일은.
김영미 PD : 다 힘들었다. 좌우지간 비밀경찰이 참 인상적이었다. 내가 호텔에 있을 때 거기서 유일하게 영어가 통해서 친해졌던 젊은이가 있었다.(이라크는 나이가 젊어질수록 교육을 못 받은 세대라서 영어를 못한다고) 어느날 그에게 커피를 시켰는데 그 사람이 내 방에 들어와 갑자기 TV 볼륨을 키웠다. 그 사람도 공무원이라서 사담 선전하려고 저러나 생각했는데(이라크 TV에서는 사담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갑자기 내 귀에다 대고 '미스 김 나 전쟁 정말 무서워. 어머니 모시고 쿠르드족 거주지라도 가고 싶어' 하며 울었다. 공무원이라서 외국으로 가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그의 목소리만이라도 녹음하려고 했는데, 그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공개처형 당한다고. 그런데 그 친구가 이틀 후에 없어졌다. 우리 대화가 도청돼 끌려갔거나 아니면 그의 희망대로 탈출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제발 탈출했길 바란다. 그 일이 생각난다.
<사진: 김영미 PD 작업 장면>
***"이라크인들의 인권을 한번만 생각하자"**
프레시안 : 요즘 TV를 보면 CNN 때문에라도 전쟁나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듯한 언론에 대한 생각은.
김영미 PD : 9.11 테러 후에 전 세계 저널리즘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부시의 호전적 행동에 나팔을 불어준 것은 사실 미국계 언론들이었다. 언론 때문에 전쟁이 날 수도 있을 지경이다. 저널리스트들의 역사적 책임의식이 없어져 버렸다는 느낌이다. 사담 후세인도 마찬가지다. 바그다드에서 벌어지는 언론통제도 엄청나다. 양쪽에서 다 기자정신을 죽이고 있다. 자료화면 받기 바쁜 한국 언론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프레시안 : 어떤 저널리스트를 꿈꾸는가.
김영미 PD : 있는 그대로의 얘기, 평범한 사람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나를 찾아오는 기자들도 요즘 뉴스꺼리가 될 만 하니까 찾아온다는 것을 안다. 그러한 기자들이건 독자, 시청자들이건 내 프로그램이나 기사를 보면서 한번쯤은 이라크 사람들의 인권에 대해서 생각했으면 하는 것이 진짜 내 바람이다. 전쟁도 일어나지 말아야 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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