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당선자측이 오랜 침묵 끝에 2억달러 대북송금 문제는 여야가 합의해 정치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검찰수사와 관련자 처벌 등을 재차 요구하며 강경 입장을 고수해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정치적 해결. 검찰수사 반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3일 2억달러 대북송금 지원 파문에 대해 "진상은 밝혀져야 하지만 외교적 파장과 국익을 고려해 진상규명의 주체와 절차, 범위 등은 국회가 판단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노 당선자는 이날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 내정자와 인수위 주요 관계자들이 참석한 일일회의에서 대북송금 지원 파문에 대해 이같이 입장을 정리했다고 이낙연 당선자 대변인이 전했다.
이 대변인은 노 당선자의 발언에 대해 “국회에서 이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되고 있는 만큼 시일을 오래 끌지 않고 빨리 해결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면서 “이를 위해 국회와도 대화를 하게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대변인은 또 "2일 문희상 비서실장 내정자의 언급도 노 당선자의 뜻과 다르지 않다"면서 "사실을 밝혀야 한다는 대전제에서 국회에서의 초당적 합의를 통한 해결을 말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앞서 문희상 청와대비서실장 내정자는 2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사무실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대북 송금 처리문제에 대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여야가 초당적으로 합의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내정자는 "대북 송금이 이뤄졌고, 김대중 대통령의 간접시인도 나온 만큼 실체적 진실은 상당부분 밝혀진 셈이어서 검찰이 판단해야할 선은 넘어섰다"고 말해 사실상 검찰 수사를 반대했다.
그는 검찰 수사 대신 정치적 해결을 주장하는 이유에 대해 "검찰조사를 하려면 형사처벌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데 이 사건은 형사처벌을 물을 게 없다"며 "외환관리법이나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등 검찰수사 결과는 부수적인 것인 반면 민감한 남북관계의 파장은 너무 크다"고 말했다.
문 실장은 이어 "노 당선자는 사실을 밝힌다고 약속했고 국민적 의혹은 해소돼야 한다는 원칙에 변함이 없다"면서 "야당의 동의를 구하기 위한 대화에 나부터 적극 나설 것이며, 노 당선자역시 야당 설득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면서 야당의 초당적 협조를 요청했다.
그는 또 "독일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많은 돈이 서독에서 동독으로 넘어갔지만 국민합의를 거쳤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안 되었다"면서 "우리도 국회합의기구 등을 통해 통일.외교.안보.국방문제에 대해선 여야와 정파, 계파를 초월해 국익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같이 슬기롭게 풀어내는 새정치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하며, 이번 문제를 풀어나가는 게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계륜도 정치적 해결 주장**
노 당선자의 또다른 측근인 신계륜 당선자 인사특보도 3일 KBS 라디오 방송에 출연, 대북 송금 파문에 대해 "진실은 밝히되 민족의 이익이 되는 쪽으로 해결돼야 한다"면서 '정치적 해결'을 강조했다.
그는 "감사원 발표도 정확히 나오지 않았고, 앞질러 말하기는 어렵다"면서 "검찰 수사를 할 수도 있지만 검찰 수사만이 진실을 밝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노 당선자 측근들의 잇따른 정치해결 주장이 제기됨에 따라, 정치권에서는 문희상 비서실장내정자가 지난달 15일 '대북 송금 문제'에 대해 "현 정권서 털고 지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처음 제기하며 "통치권적 결단은 사법처리 대상이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던 것은 청와대측과 사전조율을 거친 결과가 아니냐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일각에서는 대북 송금설이 사실로 드러난 뒤 북한이 보인 강력한 반발이 당선자 입장을 변화시킨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문희상 내정자는 2일 간담회에서 "북한 아태위원회 리종혁 부위원장이 대북 송금의 정상회담 연계에 대해 펄펄 뛰고 있지 않느냐"고 말해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나라당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편 한나라당은 노 당선자측의 '정치적 해결' 제안을 일축하고 당 차원의 진상조사는 물론 검찰수사와 특검, 국정조사 등을 통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추진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거듭 밝혔다.
서청원 대표는 미국방문을 위한 출국전 기자들과 만나 "지난해 정기국회에서 이 문제를 더 엄중하게 규명하지 못한 것이 통한스러울 뿐"이라며 "현금을 주고 남북정상회담을 산 것이나, 대선 뒤 설연휴 직전 슬그머니 감사원 발표를 통해 시인한 것은 좌시할 수 없는 국민기만의 범죄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는 "국기문란 범죄 혐의가 드러나면 김 대통령은 퇴진을 포함, 직접 책임을 져야하고, 신임 대통령 취임식장에 참석해 명예롭게 퇴진하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된다"면서 초강경 입장을 취했다.
박희태 대표권한 대행은 "이번 사건엔 범죄적 수법이 개입된 만큼 정치권에선 해결할 수단이 없다"며 "검찰이 일정 시한 내에 수사에 착수하지 않으면 특별검사제.국정조사 등 모든 법적.제도적 권한을 행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 대행은 그러나 한나라당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대북송금 진상 조사와 고건 총리내정자 인준을 연계시키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을 회피했다.
한나라당은 4일 의원총회를 열고 국정조사 및 특검제 관철 방안을 논의하는 한편 당내에 '민주당 정권 대북 뒷거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해 독자적인 진상조사 작업을 벌일 방침이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반발**
민주당내에서도 과연 국민의 냉랭한 여론을 고려할 때 정치적 해결이 가능하냐는 반론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내 대표적 개혁파 중진인 조순형 의원은 2일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 내정자가 "정치적 합의로 대북 4천억원 지원의혹을 처리해야 한다"고 밝힌 데 대해 "납득할 수 없는 발언"이라고 공개리에 비판했다.
조 의원은 "노무현 당선자가 국민적 의혹사건에 대해 특검을 받는다는 각오로 철저히 수사하라고 지시했는데 그 사이 무슨 사정변경이 생겼다고 번복하는지 모르겠다"며 "만약 노 당선자의 의중이 반영됐다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감사원이 감사도 제대로 안하고 현대상선의 자료를 그대로 발표하다시피 했는데 사실관계가 과연 규명됐다고 보느냐"고 반문하고 "검찰이 철저히 수사, 진상을 규명한 다음 통치행위 여부에 대해 판단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통치행위도 독재정권때나 있던 용어지, 21세기 법치국가에서는 없는 일"이라며 "헌법재판소도 지난 92년 금융실명제 긴급명령에 대한 재판때 고도의 정치적 행위도 사법심사의 대상이라고 판시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
조 의원은 "남북관계는 노 정권 5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만큼 길게봐야 한다"며 "뒷거래 의혹을 밝혀 남북관계가 확고한 도덕적 기반 위에서 국민적 합의를 얻어야만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일각의 강한 반발 기류를 볼 때 대북송금 의혹은 앞으로 노무현 당선자의 정권 출범때까지 계속해 뜨거운 감자로서 노 당선자를 압박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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