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경실련이 "김대중 정부하에서 시민단체들이 권력 비판 기능을 상실했었음을 자성하면서 노무현 정부와 '비판적 협력과 감시라는 본연의 긴장관계' 이상의 어떤 관계도 맺을 의사가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해 시민단체내에서 적잖은 논란이 일었었다.
그런데 이같은 내용의 성명서가 경실련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도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발표된 것임이 뒤늦게 밝혀져 논란이 예상된다.
경실련 관계자인 A씨는 24일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를 통해 "지난 17일 발표된 성명서는 상임집행위원장 등 일부 간부가 주도한 것이며, 사전에 10여명의 상근자들이 분명히 반대의사를 밝혔지만 이를 무시하고 발표했다"고 밝혔다.
그는 "성명서가 나간 직후에도 평간사협의회에서 비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과 성명서 내용 등에 문제제기했으나 이대영 사무처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이를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간부 5명, 간사 5명, 지역경실련 1곳이 반대"**
이 관계자가 그 근거로 하나의 문건을 공개했다.
성명서가 나가기 전날 내부 의견을 모아 이대영 사무처장에게 전달했다는 이 문건에 따르면, 국장 1명, 부장 4명, 간사 5명, 지역경실련 1곳 등이 성명서 문구 수정을 요구하거나 성명서 발표를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 문건에서 B간사는 "시민단체들이 김대중 정부에 포섭을 당했고, 그래서 이 정권이 망가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는 것은 누구의 판단이냐"면서 "설사 그런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해도 왜 경실련이 시민단체 대표자인양 십자가를 메고 고백하는 것처럼 발표해야 하냐"면서 성명서 발표를 반대했다.
C간사는 "이런 내용이라면 시민단체연대회의나 다른 시민단체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공동으로 준비해서 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면서 "이같은 지적은 정책협의회의 과정 중에서도 충분히 제기되었으나 제대로 반영된 것 같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또 "새 정부에서도 개혁 저항세력에 의해 DJ 정부에서 나타났던 '홍위병' 논쟁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경실련만이 겪을 문제가 아니라 시민운동 일반이 겪을 수 있는 위기"라면서 "따라서 시민운동 맏형이라고 자처하는 경실련이 우리만의 포지션을 위해 성명을 준비하고 발표하는 것보다는 시민운동 일반이 닥칠 수 있는 위기 상황에 함께 대처하도록 권고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D부장은 "김대중 정권에서 권력형 비리 발생과 두 아들 구속이 시민단체의 견제 기능 포기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상당히 '의도된 비약'이 느껴진다"면서 "결과적으로 자성이라는 순수한 의도가 왜곡되어 시민단체 전체를 싸잡아 홍위병이었다고 낙인찍는 비난효과를 또다시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E부장은 "우리가 갖고 있는 우려가 진정으로 시민운동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는 다른 단체와 다르다는 것을 언론을 통해 검증받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면서 "현재로서는 이 성명을 빨리 발표하는 것보단 시민단체연대회의에 먼저 공동 성명서를 제안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게 보다 적절하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한 지역 경실련은 "김대중 정권 5년이라는 기간동안의 전체 시민운동에 대한 평가를 이런 식으로 자의적으로 해도 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성명'이라는 형식으로 발표돼도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면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명서는 지난 17일 발표됐다.
이에 대해 상집위원장이 작성한 초안을 수정, 발표하는 작업을 담당했던 이대영 사무처장은 "상근자 몇 사람이 성명서 문구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는 전국정책협의회에서 결정된 사안으로 성명서 발표 절차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주장했다.
***"성명서 절차상으로도 문제 있었다"**
일부 상근자들은 그러나 성명서 내용뿐 아니라 절차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고 반박했다.
이 사실을 처음 공개한 A씨는 "이 문제가 상임집행위원회나 전국정책협의회에서 공식적 회의 안건을 통해 결정된 것이 아니고 전국정책협의회 회의에서 상집위원장 등이 한두번 언급한 것에 불과하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명서가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경실련의 비민주적 의사결정구조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F간사는 "전국정책협의회에서 성명을 내야할 것 같다는 말이 있었지만 성명의 내용과 시기에 대해 의견 합의를 하지도 않았고 노무현 정권과의 관계에 대해 충분한 논의도 없었다"고 밝혔다.
D부장은 "경실련 '대외입장발표 규정'에 의하면 '사안이 매우 중요하고 대내외적 파급효과가 큰 사안에 대해서는 정책협의회 의장 및 사무총장의 판단에 따라 상임집행위원장, 대의원대회 의장단, 공동대표 등과 협의토록 한다'고 되어 있으며, 이견이 있을 경우 최종 결정은 상임집행위원회에서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면서 "중요성을 감안할 때 좀더 폭넓은 합의와 토론이 전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조율책임자인 정책실장이 부재중(당시 휴가 중)이며 토요일(18일)에 운영소위가 예정되어 있다"면서 성명서 발표를 미뤄야한다고 주장했다.
G간사는 "앞으로 조직의 운동방향과 포지션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를 상임집행위원회 등 공식적인 의사결정 구조에서 논의하지 않고 시급히 발표하는 것은 내용상으로나 절차상으로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작년 '시민운동 선언' 때도 내부 이견 반영 안 돼**
경실련이 상근자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명서를 발표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지난해 1월21일 '경실련 2002년 시민운동 선언'이 일부 상근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된 대표적 사례라 했다.
경실련은 당시 "2000년말 임원진이 개편되면서 그간 경실련 내부 의결기구인 상임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전.현직 임원, 지역경실련이 참가한 가운데 수차례 토론을 거쳐 합의된 내용을 기자회견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의약분업, 언론개혁운동,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 운동 등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고 있는 이 성명서 발표에 대해 상당수 상근자들은 반대했었다. 당시 일부 간사들 사이에선 "기자회견장 앞에서 반대 의사를 밝혀야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고 당시 상근자 중 한 사람이 전했다.
이밖에도 상집위원장과 이석연 전 사무총장이 줄곧 시민단체 내부 비판에 앞장서 온 것에 대해서도 경실련 간사들 사이에 불만이 존재한다.
사실상 2000년 4.13 총선 당시 총선시민연대 활동과 언론개혁운동에 대한 비판인 '시민운동단체의 선거 및 정치참여 반대, 시민단체의 상설연대기구화 반대' 같은 이들의 주장은 일부 언론과 한나라당에 의해 '정부의 홍위병'이라며 시민단체를 비판하는 근거로 이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평간사들은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
지난 17일 발표한 경실련 성명서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만 비중있게 다뤘다.
동아일보는 18일자 1면에 '경실련 새정부 비판 주력'이란 제목으로 성명서 내용을 소개했다. 20일에는 "경실련의 자성, 노사모의 존속"이란 제목의 사설을 통해 경실련 성명서를 근거로 노사모 존속 결정을 비난했다.
조선일보도 경실련의 성명서를 "盧 정권과 허니문 없다"라는 기사로 보도한 데 이어 20일자 '대통령과 시민운동'이란 사설을 싣기도 했다.
A씨는 "간부들이 경실련 성명서가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이라는 점을 모를 만큼 순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일부 핵심 간부들과의 이같은 입장 차이는 이미 2-3년전부터 지속되어온 문제로 평간사들은 거의 자포자기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상집위원장이 직접 성명서 초안을 작성해 정책실장에게 연락해 성명서가 나가도록 한다든지, 사안에 대해 어떤 방향의 성명서를 작성하라고 요구한다든지 하는 사례는 종종 있어 왔다"면서 "현재 경실련의 최대 결정권한은 상집위원장에게 있고 그와 측근 몇몇이 결정한 사안이 경실련 전체의 결정인 것처럼 곡해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17일 발표된 성명서에 대해 H간사는 "향후 조직의 운동방향과 포지션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를 상임집행위원회의 등 공식적인 의사결정 구조에서 논의하지 않고 시급히 발표하는 것은 내용상으로나 절차상으로나 부적절하다"면서 "이 성명을 굳이 발표하고 싶다면, 상집위원장 개인 입장의 글로 기고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실무자 일처리 깔끔하지 못해"**
이런 주장에 대해 상임집행위원장은 25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내부 의견 수렴 과정을 정책실장이 주재하는데 이번 성명서는 정책실장이 아파서 휴가중인 가운데 사무처장이 실무를 담당하는 과정에서 사무총장 의견도 제대로 반영이 안 되는 등 충분한 의견 수렴이 안 됐다"면서 "그러나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반영이 안 되고 어느 한쪽이 밀어붙인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서 위원장은 "다른 단체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토론한 적은 없으나 경실련은 이번에 성명을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성명을 냈다"면서 "일처리가 깔끔하게 이뤄지지 않은 측면은 있지만 성명서 내용 자체에 크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성명서가 나간 것은 애국충정에서 시민운동이 이런 입장을 가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전제하면서 "생각 이상으로 반향이 커서 기대하지 못한 효과를 가져왔고 오히려 그러다 보니까 다른 단체에 미안해진 것 같다. 그러나 일부 네티즌들이 지적하듯이 다른 단체를 매도하려는 등의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다.
서경석 상집위원장은 지난 89년부터 95년까지 경실련 초대 사무총장을 지냈다. 이후 서 위원장은 민주당에 입당, 96년 총선에 영등포 갑 후보로 출마했었다. 그는 지난 2000년 11월 회원총회 및 대의원대회를 통해 상임집행위원장으로 추대, 경실련에 복귀했다. 그의 복귀를 당시 대의원이나 지역 경실련은 반대하기도 했다.
상임집행위원장은 임기는 1년이나 1번에 한해 연임 가능하다. 지난해 사무실을 이전하는 문제로 매년 11월에 있었던 회원총회 및 대의원대회가 열리지 못했으며, 조만간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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