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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미친 개’ 는 왜 요즘 짖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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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미친 개’ 는 왜 요즘 짖지 않나?

"리비아 카다피의 변신에 미국은 화답해야" - NYT 인터뷰

지난 80년대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고 불렀던 레이건은 당대 최고의 ‘불량국가’ 리비아의 카다피를 가리켜 ‘중동의 미친 개(the mad dog of the Middle East)'라고 저주했다.

카다피는 1969년 27세의 나이로 쿠데타를 일으켜 지금까지 33년간 권력을 쥐고 있는 대표적인 장기집권자이다. 카다피에 대한 평가는 ‘위대한 아랍 혁명가’에서 ‘전 세계 무장 게릴라의 후원자’, ‘팬암기 폭파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미국과 유럽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와 각종 테러 연계설로 카다피는 80년대 미국의 ‘공적 1호’였다. 미국은 유엔을 통해 리비아에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했고 지난 86년에는 카다피 암살을 목적으로 그의 사저에 공습을 가하기도 했다. 카다피는 테러와 저격, 좌익 게릴라 지원으로 격렬하게 맞섰다.

<사진: 안경낀 카다피>

그 카다피가 요즘 조용하다.
‘이슬람과 서구의 문명충돌’로까지 비화되는 최근의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였음직한 그가 변했다.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알 카에다에 대한 정보를 미국에 제공하기까지 했다.

미국의 일간 뉴욕타임스 스콧 앤더슨 기자는 리비아에서 최근 카다피를 만나고 돌아와 19일자 주말판 잡지에 장문의 기사를 썼다. 기사 제목은 ‘변신(The Makeover)'

***“카다피가 조용해진 이유를 찾아 불량국가에 적용해야”**

앤더슨 기자는 카다피가 요즘 아랍을 버리고 ‘범아프리카연합’에 몰두하고 있으며 유럽국가와의 관계회복을 거의 완료한데 이어 미국과의 관계개선 노력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카다피는 이미 지난 99년 팬암기 폭파범을 네델란드로 인도, 로커비 사건에 대한 지리한 공방에 마침표를 찍고자 하는 의지를 내비쳤다.

문제는 미국이다.
카다피의 '변신'을 유도한 것은 미국 정책의 성과이고 카다피를 끌어안아 불량국가 처리의 모범사례로 만들자는 미국 내의 목소리에도 불구, 미국은 여전히 ‘전제조건’을 내세우며 대화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카다피는 애초부터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탄압하며 최근 미국이 적으로 삼고 있는 그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앤더슨 기자는 한 외교관의 말을 빌려 “적의 적은 친구라는 옛말을 미국은 생각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카다피가 팬암기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기 전에 어떤 협상도 없다는 미국의 태도는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으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앤더슨 기자와 인터뷰한 중동 전문가들은 “카다피는 더 이상 미국에 줄 게 없다”며 “과거 테러리즘 후원국이 미국과 한편에 섰을 때 얻을 수 있는 실제 이득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다피가 조용해질 수 있었던 이유를 찾으면 전쟁과 같은 ‘번잡한 방법’ 말고 불량국가를 다룰 수 있는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기 전에는 어떠한 협상도 없으며, ‘핵 포기에 대한 대화만 할 용의가 있다’는 미국의 경직된 태도에 국제적인 우려의 여론이 일고 있는 요즘, 카다피에 대한 이야기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다음은 뉴욕타임스 기사의 주요 내용이다. (중간 제목은 편집자)


***변신(The Makeover)/NYT, 19일**

“환영합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다피는 악수를 하며 영어로 말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오른손을 자신의 가슴에 대는 아랍식 인사를 했다.

흰색 플라스틱 테이블이 놓여있는 막사 근처 나무 그늘 아래 통역사와 함께 셋이서 앉았다. 그는 황금빛 긴 옷을 걸치고 어두운색 양말과 타조 가죽으로 만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33년전 카다피는 리비아의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서구사회는 그 기간동안 그의 묘비명을 쓰고 싶어 했다. 80년대 중반 미국 정부의 눈에 카다피는 공적 1호였다. “중동의 미친 개”는 레이건이 그를 부른 유명한 말이다. 서구 정보기관에 따르면 그는 전세계 게릴라들의 재정후원자이자 수많은 테러를 저지를 사람이었다.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팬암기를 폭파시켜 2백70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도 그였다.

그러나 오늘날 카다피는 그의 과거를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려는 듯하다. 지금 그는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무장공격을 외치지 않고 유럽의 전 국가들과 외교·경제 관계를 다시 확립했다. 주변 아랍국들을 불안하게 하기보다 유럽연합(EU)와 같은 범(汎)아프리카 연합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는 또 이스라엘 문제에 있어 전향적 자세를 취해왔다. 시오니스트들을 바다에 처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카다피는 이제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이 평화롭게 같이 사는 하나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카다피는 그 나라를 ‘이스라에타인(Israetine)'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변화는 미국에 대한 카다피의 제안이었다. 그는 9·11 테러 공격을 최초로 비난한 아랍 지도자였고,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암묵적으로 인정했으며, 알 카에다에 대한 정보를 미국에 제공했다.

도대체 혁명의 지도자 카다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의 오랜 반(反)서구 행보에서 새로운 이익을 찾는 것일 뿐인가? 카다피는 중동에서 가장 치밀하고 비전있는 사상가인가? 아니면 단지 대중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는 광대인가?

<사진: 등돌리고 걸어가는 모습>

***카다피의 등장과 개혁**

1969년 초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카다피는 겨우 27세의 중위였다. 그러나 카다피는 갑작스럽게 정권을 잡은 것이 아니라 10년 이상의 준비가 있었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이집트 대통령 가말 나세르의 “혁명의 철학”을 읽은 10대의 카다피는 뜻을 같이하는 학교 동료와 함께 나세르식(式) 반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냉정하고 신중하게 계획하는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어한 카다피에 의해 상당부분 과장된 것이라고 한다.

카다피 통치하의 리비아처럼 급진적인 변화를 겪은 나라는 아마 없을 것이다. 1950년대 말 리비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이자 외세에 국가의 대부분을 장악당한 나라였다. 대부분의 부(富)는 11만명의 이탈리아 출신 정착민들 수중에 있었고, 서양인들에 의해 권좌에 앉은 왕은 수많은 외국 군사 기지를 유치했다. 동부 사막지대의 석유는 서방의 석유회사가 차지했다. 카다피 같은 젊은 민족주의자들에게 미래의 길은 오로지 ‘혁명’ 하나였다.

카다피는 쿠데타를 공모했던 동료들을 회상하며 “당시 우리는 리비아를 독립된 나라라고 생각조차 못했다”며 “우리는 외세로부터 우리나라를 독립시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카다피와 혁명군사위원회는 외국 군부대를 철수시키고 이탈리아 정착민들을 내 쫒았다. 1920년대 무솔리니가 저질렀던 전쟁에서 4분의 1이 넘는 리비아인들이 죽었던 것에 대한 보복으로 카다피는 이탈리아 군인들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없애버렸다. 군부는 이윤의 상당부분을 내놓으라는 리비아의 요구에 주저하던 외국 석유 회사들을 빼앗아 국유화했다.

동시에 카다피는 그의 나라를 근대화시켰다. 석유 자금으로 오지에까지 학교 병원 공공주택을 세워 리비아의 평균 국민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사회개조를 단행했다.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보수적인 회교 성직자들의 말에 따라 술과 서양음악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카다피는 여성노예를 해방시켜 오늘날 도회지 여성들은 회교도들이 쓰고 다니는 스카프를 쓸 필요가 없고 대학생 중 여성의 비율이 반을 조금 넘는다.

토호와 지역분열로 쪼개진 나라에서 그러한 엄청난 사회변동은 자연히 저항을 불러왔으나 카다피는 자유로운 토론을 허용치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인민의 적”으로 간주된 사람은 투옥되고 처형되었다. 엄청난 비밀경찰망과 첩보원들이 “반동분자들”을 감시했다. 반동분자의 범위는 회교 근본주의자들과 야망을 가진 군인, 서구화된 기업가들까지 포함되었다. 쿠데타가 계속 시도되자 카다피는 군인과 공무원의 인사를 끊임없이 실시했는데 이로써 누구도 안정된 권력기반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카다피의 야망, 미국과 충돌하다**

미국 정부는 처음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닉슨 행정부때 미국은 카다피의 강한 반공주의와 리비아의 저유황 석유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카다피의 야망이 해외로 뻗기 시작했다. 그는 중동과 아프리카 국가들을 묶는 아랍연방공화국을 강력히 희망했고, 석유를 후원받으면서도 거기에 동참하지 않는 국가들이 있다면 그 나라의 체제를 변화시킬 준비를 했다. 게릴라나 암살단에 대한 재정지원을 하면서 카다피는 70년대 내내 주변 나라의 내정을 간섭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분노를 산 것은 1973년 제1차 석유파동당시 카다피의 주도적인 역할과 이스라엘 해체 요구였다. 1973년 중동전쟁때 리비아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의 안전한 은신처가 되었고 서유럽에 대한 공격기지가 되었다. 동시에 카다피는 바르샤바조약기구를 가까이해 소련제 무기를 수십억 달러어치를 구입하고,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좌익 게릴라와 북아일랜드의 IRA, 스페인 ETA, 필리핀 모로이슬람해방전선 등 전 세계의 “무장해방운동”을 지지했다. 70년대 말, 리비아에는 일본 적군파에서부터 예멘 사회주의자들까지 훈련 캠프를 차렸다. 리비아 정보당국은 미국과 유럽 등지에 있는 리비아 반대자들에 대한 암살 운동도 벌였다.

80년대가 되자 카다피의 새로운 강적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그에게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카터 대통령때 이미 축소되었던 외교관계는 레이건 시대에 들어서 심각해졌고, 레이건은 지중해 해안에 대한 리비아의 영토권을 빼앗아 카다피와의 충돌을 유도했다. 카다피가 그 미끼를 물었을 때, 미국은 두병의 리비아 군인을 사살했다. 임기 첫 해, 레이건은 미국인들 모두 리비아를 떠나라고 명령했고, 82년에는 리비아 석유에 대한 금수조치를 취했다.

처음에는 레이건의 이러한 조치가 카다피가 서구를 향해 모험주의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부추기기만 하는 듯 했다. 1984년 런던에서의 반(反) 카다피 시위 때, 리비아 대사관에서 총알이 날아와 영국 여자 경찰관을 죽였다. 다음해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는 이탈리아 유람선을 납치해 미국인을 죽였다. 이 사건의 주모자가 트리폴리에 도착했을 때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다. 미국은 그 작전에 리비아가 연루되었다고 말했다. 1986년 4월 5일 서베를린 디스코텍 폭파사건으로 터키인 한명과 미국인 두명이 죽었을 때, CIA는 이를 리비아의 소행이라고 결론 내리고 카다피의 집을 폭격했다.

<사진: 폭격맞은 카다피의 집>

그후 리비아는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 1988년 12월 21일 밤 팬암 103기가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폭파되어 2백70명의 승객이 사망했다. 3년에 걸친 조사 결과 두명의 리비아 정보국 직원이 주모자로 밝혀졌다. 리비아가 스코틀랜드 법정으로의 인도를 거부하자 미국과 영국은 유엔에서 국제 제재안을 통과시켰다. 유엔이 여행금지와 석유 정제 기술에 대한 금수조치를 취하자 리비아는 고립되었다. 카다피와 그의 불량국가는 상상치 못한 속도로 빠르게 지도상에 없는 나라처럼 돼버렸다.

그러나 무엇이 리비아를 이렇게 갑자기 조용하게 했을까? 그 답은 이라크, 북한과 같이 미국이 다루기 힘들어하는 체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이고, 전쟁 같은 번잡한 방법이 아닌 다른 해결책을 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리비아 전문가들은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리비아의 변화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은 카다피 자신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그는 “인류의 역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같은 속도로 나아가지 않는다. 가끔은 느린 걸음으로, 가끔은 빠른 걸음으로 간다. 언제나 매우 유동적이다. 과거는 한 국가의 정체성이 중시되는 민족주의의 시대였고 지금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지금은 지구화의 시대이고 새로운 많은 요소들이 세상에 나타나고 있다”는 추상적인 대답을 했다.

***아프리카연합과 로커비 사건**

최근 리비아의 정치 선전물에는 사막의 지하를 관통해 물길을 대는 사업인 ‘인간이 만든 위대한 강' 프로젝트와 카다피가 열정을 쏟고 있는 아프리카 연합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트리폴리 공항 초입의 광고판에는 “리비아는 아프리카 연합으로 간다”고 말하는 카다피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지폐의 뒷면에도 ‘인간이 만든 위대한 강’의 조감도가 그려져 있다. 모든 정치선전물에서 카다피는 위대한 우상이라기보다는 끈기있는 선생님으로 그려지고 있다.

알리라는 이름의 젊은 컴퓨터 기술자는 국제 제재로 인한 90년대의 빈곤에도 불구하고 리비아는 아프리카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고, 미국을 비롯한 어떤 나라보다 평등한 부의 분배가 이뤄진다는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20년간 리비아에서 사업한 한 이탈리아 기업가는 “카다피는 리비아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나는 카다피가 완벽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리비아인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리비아인들은 그가 멍청한 짓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다피가 서구에 대해 취하는 태도 때문에 그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완벽히 잊혀지고 파괴된 리비아를 그는 변화시켰다”고 설명했다.

<사진: 만델라와 카다피>

리비아는 아프리카 연합으로 가고 있다.

카다피는 아프리카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것을 정치·경제적 진화의 ‘논리적 단계’라고 말했다. 민족주의 시대에서 지역 통합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다피에게는 분명 개인적인 동기가 있다. 유엔 제재라는 고난의 시절에 리비아에 원조를 준 것은 아랍 형제국이 아닌 아프리카 우방국이었다는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30년동안 범 아랍국의 지도자가 되고자 했던 카다피의 노력은 늘 좌절되었으나, 범 아프리카의 지도자로 될 가능성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더반에서 열린 아프리카연합 창립회의가 있기 수개월 전부터 카다피는 남아공 대통령 타보 음베키가 아프리카연합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드러내놓고 방해했다.

카다피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데 제1의 장애물은 ‘로커비’라는 한마디 말로 요약된다. 카다피는 한숨을 쉬며 “로커비 사건은 옛날 일이다. 우리는 일괄적인 해결책을 찾았어야 했다. 로커비 사건을 들먹이며 재론하는 것은 우리 누구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불평했다.

카다피가 보기에 그 문제는 리비아가 두 명의 리비아인을 재판에 인도했을 때 끝난 것이었다. 1999년 네델란드 법정은 한 명은 유죄, 한 명은 무죄라고 판결했다. 이로써 유엔 제재는 중단되었으나, 미국은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폭파 용의자 인도는 로커비 사건 이후 미국이 리비아에 제시한 네 가지 전제조건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요구사항 중 가장 첨예한 문제는 폭파의 책임이 리비아에 있다고 공식 발표하는 것인데, 미국은 이 점에 있어서 협상은 없다고 말한다. 미 국무부의 한 관리는 “우리의 네 가지 전제조건은 어떤 대화를 시작하건 그 전에 충족되어져야 하는 것이다”며 “어떤 흥정도 없다”고 말한다.

***“미국은 리비아를 모범사례로 만들어야”**

그러나 리비아와의 관계 개선 움직임은 미국에서 점차 커지고 있고 행정부의 비타협적 태도에 대한 조급함도 늘고 있다. 언론인이자 아랍 전문가인 밀튼 비오스트는 "나는 리비아가 지난 십년간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며 “그것은 미국 정부의 훌륭한 정책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그 성공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리비아가 로커비 사건에 대해 유가족 보상을 한다면 “책임을 인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들이 그 문제에 대해 벌거벗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했다.

중동연구소 데이빗 맥도 이에 동의하며 “나는 우리가 지금 리비아를 부시 독트린의 모범사례로 만들 수 있는 호기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과거 테러리즘을 후원했던 나라가 이제는 벗어나, 그런 행위를 포기하고 미국과 한편에 섰을 때 얻을 수 있는 실제 이득을 보여주자”고 말했다.

<사진: 카다피와 카스트로>

유럽은 리비아의 복귀 절차를 이미 완료했다. 1999년, 리비아는 1백70명의 목숨을 앗아간 1989년 UTA 항공기 폭파사고에 대한 보상금을 프랑스에 지불하였다. 그 사건은 리비아의 정보기관과 연계된 것이었는데, 3천3백만 달러의 보상금을 받으면서 프랑스는 어떤 유죄시인도 요구하지 않았다. 리비아는 또 1984년 살해된 영국 여성 경찰관에 대해 영국과 협상했다. 이로써 영국·프랑스와의 모든 외교관계가 재개되었고, 이탈리아와 리비아는 경제적·문화적 연결망을 구축중이다.

유럽과의 관계 개선에 하나의 원동력이 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경제다. 리비아에는 엄청난 석유가 남아있고, 석유가 부족한 유럽과의 관계 개선에 강한 유인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일은 카다피가 이슬람 극단주의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다피는 오히려 1986년, 극단주의자들의 은신처라는 이유로 48개의 회교 연구소를 폐쇄시켰다. 2000년 그는 반대하는 반체제 인물들을 색출, 12명을 처형하거나 투옥했다. 극단주의자들 역시 카다피에게 호의를 보인 적이 없었다. 수년간 그를 저격하려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극단주의자들이었다고 전해진다. 트리폴리에 있는 유럽 출신 외교관은 “세계가 아주 위험한 곳으로 변했다”며 “우리가 지금 카다피를 보면 ‘적의 적은 친구’라는 오랜 격언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미국인들은 이것을 생각지 못한다”고 말했다.

***“카다피가 미국에게 줄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리비아에 대한 화해를 촉구하는 사람들도 문제의 진정한 핵심을 벗어나고 있기도 하다. 로커비 사건이 해결된 후라 하더라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이 남아 있다.

미 국무부의 한 관리는 “리비아가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의 가장 커다란 우려사항이다. 또 인권문제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악의 축을 넘어서”라는 연설에서 존 볼튼 국무차관은 리비아가 무기를 원하는 ‘불량국가’라며 적성국가 목록에 올렸다. 지난 6개월간 CIA 분석가들은 리비아가 생화학무기를 개발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리비아 문제에 관한 한 분석가는 “나는 카다피가 주눅들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며 “지금 미 행정부의 관심사는 온통 이라크지만 강경파들이 다음으로 건드릴 나라 2-3순위에 리비아가 있다”고 말했다. 그 분석가가 가장 충격을 받은 일은 카다피가 갑자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는 “나는 그가 미국에게 줄 것이 많지 않다고 확신한다”며 “좋다.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 반대자다. 그러나 많은 다른 아랍국가들도 그렇다. 석유? 미국은 리비아 석유 없이도 20년간 잘 살아왔다. 그에 반해 미국이 용서하는 분위기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던 과거에도 카다피는 많은 것을 해왔다”고 말했다.

이러한 평가는 국무부 관리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관리는 리비아에 대한 미국의 조치가 무엇이 될 것인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카다피가 미국과의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할 일이 너무 많음을 인정했다. 그는 “카다피는 최근 수많은 긍정적인 조치를 취해왔다. 그러나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여전히 많다”고 말했다.

어떻게 기억되고 싶냐는 나의 질문에 카다피는 뻔한 대답으로 말문을 열었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이기적이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도와주기 위해 나 자신을 버렸던 사람이라고 느끼길 바란다.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길 바란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조용한 웃음을 흘리며 “그리고 나도 내가 실제로 그랬기를 정말로 원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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