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어려움들을 '뚝심'으로 돌파해 낸 '노무현식 정치'가 유권자들의 최종 선택을 받음에 따라 이번 대선과정에서 배신과 변절을 일삼은 일부 정치인들의 자연 도태도 머지않은 분위기다.
어려울 때일수록 '인간의 본모습'과 '그릇의 크기'가 드러난다고나 할까? 2002대선, 격전의 1년 동안 숨가쁜 고비마다 자신의 추한 본모습을 드러낸 정치인들이 많다.
정치적 신의를 돌출행동으로 저버린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 무늬만 50대일 뿐 낡은 정치의 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한 자민련 이인제 총재권한대행, 386 세대의 리더에서 일순간에 끝모를 나락으로 추락한 김민석 전 의원 등은 이번 대선 결과 정치적 입지를 상실한 대표적 정치인이다.
이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뭘까?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서 남보다 앞장서 제 무덤을 팠다는 점 아닐까?
또한 대선이라는 격전의 현장에서 자신의 이해득실에 따라 아군과 적군을 따로 두지 않았던 일부 정치인들의 '철새' 행각도 이번 대선을 돌아보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정치적 신의'를 저버린 통합21 정몽준 대표**
자신의 말대로 "국민과의 약속인 단일화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선거 막바지에 혼란을 끼친"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는 퇴출 1순위로 꼽힌다.
정 대표는 월드컵 열기를 등에 업고 급부상, 노-정 단일화에 패배한 이후에도 차세대 정치 지도자로서의 이미지 각인 만큼은 성공하는 듯 싶었다. 정 대표는 그러나 투표일 두시간 전 느닷없이 선거공조를 파기하는 패착을 둠으로써 스스로 무덤을 팠다.
정 대표는 20일 대국민 사과성명을 통해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사과하고 "향후 정치적 진로는 국민과 당원들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일단 여론의 동정에 호소해 두고 차후 기회가 되면 정치행보를 본격화하겠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독단적인 지지철회 선언 직후 핵심 참모진마저 집단 탈당으로 등을 돌린 상황에서 정 대표가 해체 일보직전에 처한 통합21을 추슬러 재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또한 선거공조 파기의 말 못할 내막이 무엇이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후보가 당선된 현실은 정 대표에 대한 유권자들의 냉혹한 심판의 의미도 담겨있다.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라도 '신의를 저버린 정치인'으로 각인된 오늘의 정 대표를 국민들이 기억에서 지워줄 리 만무해 보인다.
***네거티브 정치의 전형, 자민련 이인제 총재권한대행**
정치적 야심을 접어야 할 운명에 처하기는 자민련 이인제 총재권한대행도 정 대표와 크게 다르지 않다.
97년의 경선불복과 탈당은 논외로 치더라도 '이인제 대세론'이 '노풍' 앞에 무참히 꺾이던 지난 3월의 민주당 국민경선 때부터 이 대행의 정치행보는 그야말로 네거티브 일색이었다.
민주당 경선 당시, '노풍'이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아 이 대행이 처음 꺼낸 카드는 '음모론'이었다. 그러나 동교동계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대세론'을 누려온 탓에 이 대행이 들고나선 '보이지 않는 손' 주장은 약발이 먹힐 리 없었다.
다급해진 이 대행은 이번에는 상대 후보 장인의 이력을 들춰 인신공격과 색깔론을 결합시킨 신종 무기를 선보였다. 결과는 자신이 가한 공격보다 몇 곱절이나 강한 역풍으로 되돌아왔다. 결국 만신창이가 된 이 대행의 선택은 경선 중도 포기였다.
이 대행은 이후 노무현 후보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일부 측근들을 통해 당을 흔들며 '이인제 대안론'이 떠오르기를 호시탐탐 노렸다. 밖으로는 '4자연대'니 '중부권 신당'이니 하며 당내 분란을 부채질했다. 결국 패자의 도덕률까지 저버리며 탈당, 자민련 입당의 수순을 밟았다.
자민련 입당 후에도 이 대행은 김종필 총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회창 후보를 지지해 결과적으로 또 한번 낭패를 봤다.
신한국당 출신으로 민주당을 거쳐 자민련에 도착했고, 자민련에 앉아 한나라당에 러브 콜을 보냈다. 그런데 한나라당이 졌다. 이제 그가 가야 할 곳은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386세대' 리더에서 변절의 정치인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정치인 1순위로 꼽혔던 김민석 전 의원도 이번 대선에서 희비가 크게 엇갈렸다.
6.13 지방선거에서 현 이명박 시장과 서울시장 자리를 놓고 겨룰 때만 하더라도 김 전 의원의 인기는 상한가였다. 선거에서는 비록 패했으나 '젊고 똑똑한' 김 전 의원에게 쏟아지던 찬사와 격려는 이른바 '386 세대'의 리더 자리를 더욱 확고부동하게 했다.
그러나 당 안팎의 단일화론을 등에 업고 돌연 단독 탈당을 감행, 김 전 의원은 높았던 인기만큼이나 끝없는 추락을 경험해야 했다. 임종석 의원 등 후배 의원들로부터 쏟아지는 비난은 둘째 치더라도 김 전 의원의 탈당은 단순한 정치적 변절을 넘어 '동세대에 대한 배신'이라는 평가까지 받아야 했다.
더욱이 자신이 배팅한 정몽준 대표의 몰락으로 김 전 의원 역시 이번 대선을 거치며 실리도 명분도 모두 잃어버린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배신과 변절 일삼은 '철새' 정치인들**
한편 전용학 김원길 의원 등은 이번 대선에서 철새 정치의 전형을 보여준 인사들이다. 민주당 대변인을 역임하며 대 이회창 공격의 선봉에 섰다가 갑자기 한나라당으로 돌아선 전용학 의원, 후보단일화를 소리높여 외치다 막상 단일화가 성사되자 한나라당으로 배를 갈아탄 김원길 의원은 정치적 계산이 너무 빨라(?) 도리어 낭패를 보게 된 경우다.
이들과 동일한 궤적을 그리며 민주당을 탈당, 적진에 백기투항한 원유철 박상규 이근진 김윤식 강성구 의원도 얄팍한 이해득실에 따라 변절을 일삼은 대표적 정치인으로 꼽힌다.
또한 한나라당의 충청권 공략에 아낌없이 몸을 던져 희생양을 자처한 김용환 강창희 이완구 이재선 이양희 함석재 의원도 철새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민주당→정몽준 캠프→자민련으로 현란하게 몸을 옮긴 안동선 의원, 기세좋게 자민련을 탈당했으나 '철새 도래지'라던 한나라당마저 그의 입당 만큼은 불허,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한 오장섭 의원도 2004년 총선에서 유권자들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내심 정몽준 대표를 의중에 두고 후보단일화를 외치며 탈당했다가 슬그머니 복당한 이른바 '후단협' 의원들의 좌충우돌 행각도 저열한 정치수준의 단면이었다.
특히 민주당 경선관리위원장으로 '노풍'에 편승해 인기를 누렸다가 스스로 "국민경선은 사기극"이라는 주장을 편 김영배 의원의 웃지 못할 촌극은 더 이상 정치권에서 되풀이 되서는 안 될 대목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하지만 그래도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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