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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패배 딛고 최후의 승자 된 '승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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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숱한 패배 딛고 최후의 승자 된 '승부사'

<盧 당선자> 빈농의 아들에서 대통령 되기까지

승부사 노무현.

가난한 농부의 막내 아들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노무현 당선자의 삶 전반을 아우를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옳다고 믿는 것을 이루기 위해 남들보다 많은 것을 걸고 승부했고, 때로는 남들보다 훨씬 크게 잃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16대 대선에서 그는 최후의 '승자'가 됐다.

***가난했던 어린시절**

노 당선자는 1946년 9월 1일 경남 김해군 진영읍에서 과수원을 하는 아버지 노판석(76년 별세)씨와 어머니 이순례(98년 별세)씨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둘째 형인 건평씨(60.농업)는 노 당선자의 태몽에 대해 어머니로부터 "백말이 말뚝에 매어있는데 할아버지가 고삐를 주면서 타고 가라 했다. 엄청나게 큰 말이 발굽을 내딛는 소리가 우렁찼다"고 들었다고 한다.

어린시절 그는 6살 때 천자문을 깨쳐 주변에서 '노 천재'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1953년 그는 집에서 4km쯤 떨어진 읍내의 진영 대창초등학교에 들어갔다. 1학년 때 성적은 국어 99, 산수 98, 보건 96, 음악 95, 미술 95점. 평가란에는 '교과 성적이 우수하고 특히 발표력이 있음. 대단 쾌활, 통솔력이 있어 급우 선도(先導)의 자진 노력이 있음'이라고 되어있다. 5-6학년 시절의 평가란에는 '성인답다'라는 구절도 나온다.

그는 6학년때 담임이던 신종생 교사의 권유로 전교회장 선거에 나가 5백2표 가운데 3백2표를 얻어 당선된다. "이 경험이 남 앞에 나서는 일에 자신을 갖게 한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 시절 그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가난'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결석이 잦고 자주 병치레를 했던 것도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그는 누나에게 물려받은 찌그러진 필통을 창피해 해 4학년 땐 좀 어수룩한 아이를 꼬여 그 애의 반짝반짝하는 새 필통을 자신의 고물 필통과 맞바꾸는데 성공했으나, 친구들이 "어떻게 급장이 그런 짓을 하느냐"는 비난에 필통을 돌려준 일화도 있다.

그는 자전 에세이에서 "나만 가난했던 것도 아닌데 어린 시절의 나는 유독 가난을 심각히 여기며 자랐다. 그리고 그 상처는 나의 잠재의식 속에 어떻게 해서라도 나만은 가난에서 벗어나야 겠다는 열망과 함께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동시에 심어졌던 것 같다"고 그 시절을 회고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 글짓기 요구하자 '백지동맹' 주도하기도**

노 당선자는 59년 진영 중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 진급을 앞둔 2월 학교에서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기념하는 글짓기 대회가 열렸다. 그는 이 글짓기 대회가 3.15 대통령 선거를 앞둔 불법 선거운동으로 비춰져 친구들에게 아무 것도 쓰지 말자며 백지동맹을 선동했다. 반성문을 강요받았지만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그는 당시 주임선생님이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분인지 아느냐"고 묻자 "옛날에는 독립운동을 한 훌륭한 분이었으나 지금은 독재를 하고 있습니다"고 답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1주일간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는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공납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1년간 휴학했지만 당시 부산의 대표적 상공인이었던 김지태 부산일보 사장이 운영하던 부일장학회시험에 합격, 중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부산상고 진학 후에도 김 사장이 만든 백양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았다.

부산상고에 진학한 노 당선자의 꿈은 졸업 후 은행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을 얻어 자취를 하거나 하숙을 할 형편이 안돼 부산에 시집가 살던 누나집이나 친구집을 전전하는 등 불안정한 생활은 그를 '방황'하게 했다.

1학년 5백2명 중 48등이던 성적이 2학년 4백81명준 2백13등으로 곤두박칠쳤다. 3학년이 되면서 그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해 취직 공부에 열을 올렸다. 3학년 졸업 성적은 4백62명 중 59등이었다. 그는 부산상고를 졸업할 무렵 농협 입사시험을 봤으나 떨어졌다. 당시 합격을 자신했던 그는 크게 낙담한다.

결국 노 당선자는 삼해공업이란 어망회사에 취직하지만 이 첫 직장을 한달반 만에 그만둔다. 한달 하숙비도 안될만큼 월급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둔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고시 공부에 매달렸다. 그런 중간에 '책값을 벌기위해' 울산에 있는 한국 비료 공장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으며 부상도 당했다. 고시공부를 하던 중인 68년 군에 입대, 71년 상병으로 제대했다.

제대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인 권양숙씨와 연애를 시작했다. 권양숙씨는 같은 마을 출신으로 부산에서 밤엔 계성여상, 낮엔 럭키(현 LG그룹 모회사)를 다니다 할아버지 병구완 차 진영에 와 있었던 때였다.

73년 1월 결혼하기까지 양가의 반대가 심했다. 권씨 집안에선 미래가 불확실한 고시 준비생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했고, 노 당선자 집에선 장인될 사람의 좌익 전력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연좌제로 임용이 안된다면 다른 일을 하겠다"는 그의 고집을 아무도 꺾지 못했다.

***'돈 잘 버는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노 당선자는 75년 고시에 합격해 77년 대전지법 판사로 임용됐으나 7개월 만인 78년 5월 변호사로 개업한다. "별로 모범적이지도 우수하지도 못했다"는 생각에서다.

당시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경제적 부의 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판.검사, 변호사가 되면 시골에 별장도 하나 갖고 모양나게 산다는 게 우리 부부의 꿈이었다"고 노 당선자는 회고하고 있다. 개업한 변호사 노무현은 상고출신으로 회계에 밝다는 장점을 발휘, 부산지역에서 조세전문변호사로 이름을 얻게 된다. 당시 그는 JC(청년회의소)나 라이온스 클럽 회원들과 어울렸고 술도 꽤 마셨다고 한다.

이처럼 '돈 잘 벌고 잘 노는 노변(盧變. 노 변호사 약칭)'은 81년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로 변신한다. 72년 10월 유신이 났어도 "헌법책을 새로 사서 헌법공부를 다시 해야겠구나"했고, 79년 부마항쟁 때 동료변호사들이 영장도 없이 잡혀가 고문당하고 있다는 소식에도 무감했던 그였다. '부림사건' 당시 재야변호사 김광일과 이흥록은 변론을 맡을 변호사를 구하다 노 당선자에게 송병곤(부산대 77학번)씨 등 두어명을 맡겼다.

그는 57일간 경찰에 구금돼 온갖 고문을 당한 이들을 접견한 뒤 받은 충격을 이렇게 적었다.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엔 변호사인 나조차도 믿으려 하질 않았다. 분노로 인해 머리 속이 헝클어지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했다."

이후 그는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변론에 참여했다. 이 해 노무현의 변호사 사무실에는 대학생 시절 시위 경력 때문에 판.검사 발령을 받지 못한 문재인 변호사가 합류, 당시 노.문 두 변호사는 부산 지역의 시국사건을 거의 도맡았다.

그는 86년부터 변호사 업무를 거의 중단하다시피 하고 운동에 매달렸다. 공해문제연구소, 노동법률상담소도 세웠고, 부산민주시민협의회에 참여했다. 87년 6월 항쟁 당시 그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거리에 나섰다. 그해 9월에는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가 최루탄이 맞아 숨진 사건에 뛰어들었다가 '제3자 개입'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된다. 구속 21일 만에 적부심에서 풀려나지만 11월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는다.

***정계입문, 청문회 스타, 잇단 낙선**

한편 이같은 '투쟁'은 부산에서 노무현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88년 13대 총선을 앞둔 3월 통일민주당 김영삼(YS) 총재로부터 정계입문 제의를 받는다. 재야인사 영입케이스로 김광일 전 의원 등과 함께 발탁된 것이다.

노 당선자는 당시 민정당 실세인 허삼수 후보가 출마한 부산동구 공천을 요구했다. 다른 정치인들은 모두 피했지만 그는 정면으로 부딪쳐 국회의원 배지를 따냈다. '가자. 사람사는 세상을 위하여'. 당시 그가 내세운 선거 구호였다.

88년 5공 청문회는 그를 대중들에게 인식시킨 결정적 계기가 됐다. 88년 11월, 50%의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온 국민의 귀와 눈이 집중됐던 청문회에서 그는 장세동 전 안기부장,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등을 상대로 특유의 공격적이면서 논리적인 질문으로 '청문회 스타'가 됐다. 그는 "내가 청문회에서 돋보인 것은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서가 아니라 증인들의 기를 꺾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90년 1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씨의 3당 합당으로 노 당선자의 정치역정도 큰 변화를 겪게된다. 그는 민자당에 합류를 거부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92년 3월 14대 총선에 '꼬마 민주당' 후보로 부산에 출마, 허삼수씨와 재대결을 벌였지만 참담히 패했다. 95년 6월에는 부산시장 선거에 나섰으나 역시 지역주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어 95년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야당이 분열하자 민주당에 잔류한 그는 이듬해 4월 총선에서 '3김 청산과 세대교체'의 기치를 내걸고 서울 종로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같은 해 11월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상임대표: 김원기)를 발족했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했다.

97년 대선을 맞아 통추는 '3김 청산과 세대교체'를 내건 이인제 후보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노 당선자는 "3당 합당에 따라간 이인제씨는 3김 청산과 세대교체의 주역이 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는 김원기, 김정길씨 등과 함께 11월 '정권교체'를 위해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 부총재가 됐다.

그는 이어 99년 7월 치러진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출마, 6년만에 다시 국회의원이 됐지만 2000년 4월 부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모두들 만류했지만 "지역주의에 정면 도전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결과는 참담했지만 이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태동의 계기가 됐다.

노 당선자는 2001년 해양수산부 장관에서 물러난 뒤 본격적으로 대선 후보 경선 준비에 나섰다. 돈도 조직도 변변찮은 그를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 정치사상 최초로 도입된 국민참여경선제에서 '노무현 바람'으로 '이인제 대세론'을 무너뜨렸다.

***12월 19일까지 가슴 졸이던 승부**

집권 여당 후보였지만 12월 19일 오후 6시 방송 3사 출구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전까지 누구도 노 당선자의 승리를 자신하지 못했다.

4월 27일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후 8개월 동안 노 당선자는 88년 정치입문 이후 가장 힘겨운 날들을 보냈다.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의 연이은 참패 이후 이인제 의원을 비롯한 '反 노무현' 진영 의원들의 '후보사퇴' 요구에 시달렸다. 8월 이래로 김원길 안동선 김원길 의원 등 21명의 의원이 당시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와의 '후보단일화' 등을 요구하며 탈당하기도 했다.

벼랑 끝까지 몰렸던 노 당선자는 11월초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요구를 수용한다. 모두들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그는 모든 것을 던졌고, '단일후보'라는 월척을 낚았다.

그러나 정 대표는 선거운동 마감시간이 2시간도 남지 않은 18일 밤 10시 30분, 노 당선자의 명동 유세 발언 등을 문제 삼으며 돌연 '공조 파기'를 선언, 그의 당선 가능성엔 먹구름이 끼었다.

노 당선자는 12월 19일 오전 부인 권양숙 여사 등 가족과 함께 혜화동 종로구민 생활관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투표를 하고 "저로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가 없다"며 "국민의 심판만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대화와 타협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갈 것"이라는 게 이날 10시 30분 당선이 확정 판정이 난 뒤 밝힌 그의 첫 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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