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라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언어를 통제하는 일은 웬만큼 통제를 가해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통치자가 입법으로 호령해도 다스리기가 힘들다.
흔히 북한 사람들은 주체성이 강해서 외래어를 배격하고 우리말의 순수성을 지켜 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방송 관계 일을 하다 탈북한 인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북한에서도 50~56년대에는 교육깨나 받았다는 사람들이 말끝마다 러시아말을 섞어서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나운서들도 방송할 때 서울 말씨에 가까운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을 자주 썼다고 한다.
그러다가 60년대 중반 김일성 주석이 러시아어 사용을 ‘되먹지 못한 짓’이라고 금지시키고, 아나운서들의 나긋나긋한 말씨도 역겹다고 이북 억양의 말을 쓰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일상생활과 방송에서 러시아말과 어휘, 나긋나긋한 말씨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방송 3사의 각종 오락 프로그램 진행자와 출연자들이 부적절한 언어를 마구 사용하여 청소년 프로그램에서조차 청소년들이 알아듣기 어렵고, 듣기 민망할 정도로 은어와 속어가 남발되어 연세 많은 어른들과 시청할 때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청소년 자신들도 그 말뜻을 잘 몰라 친구들에게 물어 볼 때가 많다는 것이다.
방송위원회 방송언어특별위원회가 방송 3사의 가족시청 시간대와 심야시간대의 오락 프로그램 언어사용 실태를 조사한 결과 특히 진행자, 보조진행자와 초대 손님 사이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에 의하여 반말이나 비속어, 은어, 유행어 등이 더 자주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인터넷 채팅을 하며 사용하는 각종 은어와 비어들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언어오염도는 극에 달하고 있다.
특히 ‘방가방가(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안뇽(안녕하세요)’, ‘어솨요(어서오세요)’ 등 우리말 맞춤법이 파괴된 언어들이 인터넷 세대의 일상생활에 남발되면서 이들의 표준어와 언어 구사능력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학에서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는 한 강사는 최근 수강생이 제출한 리포트를 채점하면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각 문장의 서술어를 발음나는 대로 적거나 자모음을 엉뚱하게 바꿔 쓰는 등 대학생으로 보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보면 리포트 끄트머리에 ‘열라 공부해찌만 죄대로 모쩌 죄송함다(열심히 공부했지만 제대로 못써서 죄송합니다)’고 쓴 글을 보고 도저히 애교로 봐 주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마포구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인터넷 언어 사용을 자제하는 캠페인을 벌이는 등 "어린이들에게 비정상적인 언어사용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학교 차원의 대책에 나섰다고 한다. 학생들이 일기 같은 사적인 글은 물론이고 시험 답안지에까지 인터넷 통신언어를 사용하는 등 그 병폐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얼마 전 인터넷 조사업체인 나라리서치가 네티즌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통신상의 은어에 익숙한 사람들의 경우 우리말 맞춤법에 큰 곤란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 자료에 의하면 ‘통신언어 사용에 따른 문제가 무엇인가?’라고 물은 결과 56.2%(1천20명)가“표준어 맞춤법에 익숙하지 않게 됐다”고 응답했고, 42.6%(7백73명)는 “문서 작성시 나도 모르게 통신언어를 사용하게 된다”고 답하는 등 무분별한 통신언어의 사용으로 인하여 네티즌들이 바른 우리말 사용에 곤란은 느끼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만시지탄이지만 얼마 전 문화관광부에선 한글날 국경일 제정, 국어기본법 제정 등을 골자로 하는 ‘국어발전종합계획 시안’을 발표했다. 국어기본법에는 주요 공공기관의 한글 오용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비롯하여 ‘한글지킴이’라고 할 수 있는 국립국어교육원, 국어연구자, 국어교육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방안이 꼭 담겨져야 할 것이다.
‘한글지킴이’를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올바른 한글지키기의 성패가 결정될 것이다. 1945년 광복 때부터 국가건설계획과 함께 한글의 장기적, 체계적 육성방안이 마련되었어야 했다. 적어도 ‘탈(脫)일본화’, 과학ㆍ학문ㆍ예술언어 분야의 한글 정립, 일상생활용 한글의 정비가 이루어졌어야 마땅했다.
방송과 통신이 우리말을 심하게 오염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많지만, 오늘도 ‘우리말지킴이’인 개그맨 정재환씨는 수많은 시청자들에게 ‘짜장면’의 표준말을 ‘자장면’이라고 계속 알리고 있다.
***필자 소개**
필자 김유주씨는 고려대 정외과 졸업후 동아일보 자회사였던 동아방송 재직중 해고된 동아투위 출신 언론인으로, 그후 한국방송광고공사, 한국언론연구원, 평화방송을 거쳐 SBS 라디오국장을 지냈다. 현재는 방송위원회 심의위원과 한국신문방송인클럽 수석부회장, EBS 시청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재직하며 매주 방송심의 일을 하고 있다. 저서에는 그동안 써온 방송논편을 모아 펴낸 <그거 말 되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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