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9일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측의 한미주둔군지원협정(SOFA) 개정 촉구 및 부시 대통령 직접 사과를 요구하는 서명 요구를 거부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지난 8일,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지난 2일 범대위 측 성명서에 서명한 것을 미뤄볼 때 분명 '튀는' 태도다.
'반미'가 대선 주요변수의 하나로 떠오르면서 그간 '미국과 가깝다'라는 평가를 받아온 이회창 후보는 범대위 서명에 참여하고, 반대로 '할 말은 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해 온 노무현 후보는 서명에 불참하는 '역전' 현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전' 현상이 유권자들 표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역시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노, "서명·시위 참여는 영합하는 것"**
노 후보는 이날 범대위 관계자들을 면담한 자리에서 "심정적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시민운동이 필요하다는 데는 동감하지만 (대통령 후보로서) 서명을 하거나 시위에 참석하는 것은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영합하는 것"이라면서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으로서 여러분과 똑같이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서명 거부의 이유다.
노 후보는 또 최근 반미 기류에 대해 "이같은 논의가 한미관계를 악화시키는 새로운 불안요소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국민이 많다"며 "감정 표출을 자제하고 책임있게 현실을 변화시켜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노 후보는 범대위 측에 적극적인 동조입장을 동시에 피력했다.
이번 사태 해결과 관련해 "우선 당장이라도 SOFA 운용 과정에서 주권국가로서 실효성 있는 운용이 되도록 고쳐야 하고, 차후 제도 자체의 개정을 추진해야 하며, 우리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부시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다"며 "그간 '아니오'라고 해야 할 때도 그렇지 못했던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노 후보는 또 "앞으로 대통령이 되면 이 문제에 관해 좀더 단호하게 변화된 한미관계에 맞도록 SOFA 개정 등 의존적 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변화시키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국민 자존심이 손상되지 않도록 한미 관계를 풀어갈 것이며 필요하다면 미국 대통령도 만나고 설득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범대위 측은 논평을 내고 "노 후보는 누구를 의식해서 서명을 거부하고 있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며 "말로만 소파 개정하자고 할 게 아니라 그것을 위한, 그리고 살인미군 처벌을 위한 분명한 계획과 의지를 표명해야 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보수층엔 '안정감', 지지층엔 '줏대 있는 모습' 강조 의도**
노 후보의 이같은 태도는 지난 7일 이회창 후보의 여중생 추모미사 참여, 권영길 후보의 추모집회 참여 등에 대해 "반미 감정을 선거에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 여론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미공조관계가 깨지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보수층에게 '안정감'을 주려는 것으로도 풀이된다.
또 '최근 반미 정서에 적극적으로 부합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도 깔려있다고 보여진다. 여중생 사망사건이 주요 이슈로 불거지기 전 노 후보는 TV 토론을 통해 여러 차례 "미국에 일방적으로 굽실굽실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겠다"고 발언한 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권 후보, 특히 이 후보의 서명을 "국민 감정에 영합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차별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보수층에게는 '안정감'을, 노 후보 지지층에게는 '줏대있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는 의도라고 해석될 수 있다. 한마디로 '중심잡기' 시도다.
그러나 노 후보의 이러한 자세에 대해 '지나친 정치적 계산'이란 비판도 제기된다.
이날 한나라-민주 양당 총무가 국회에서 만나 SOFA 개정을 촉구하는 국회 결의안을 추진키로 하는 등, SOFA 개정문제가 이미 범국민적 요구사항으로 떠오른 마당에 이·권 후보가 모두 참여한 범대위 서명을 거부한 것은 '차별화'만을 의식한 지나친 행동이었다는 비판론이다.
노 후보의 '중심잡기'가 성공할지, 아니면 '지나친 정치적 계산'이 역효과를 불러올지 주목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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