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이규택 총무의 ‘빨치산 집단’ 발언이 8.8 재보선을 앞두고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정치권 공방의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양당은 23일 대정부질문을 위한 국회 본회의조차 개의를 미룬 채 이 총무의 발언을 놓고 난타전을 벌였다.
사건의 발단은 이 총무가 23일 오전 주요당직자 회의에서 “민주당은 시종일관 우리당 후보를 흠집내고 흑색선전하는, 일종의 ‘빨치산 집단’같은 느낌을 어제 받았다”고 한데서 비롯됐다.
발언 직후 서청원 대표가 손짓으로 만류하자 이 총무는 즉석에서 “다시 표현하면 파티잔(Partisan), 즉 파티(Party)의 의미로 ‘지리산 빨치산’이 아니고 ‘파티잔’이다. 발음이 좋지 않아서…”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빨치산'의 어원이 바로 '파티잔'임을 감안할 때 이 해명은 불충분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민주당은 곧바로 긴급 의원총회까지 열어 이 총무의 문책과 이회창 대통령 후보 및 서청원 대표의 사과를 요구하는 등 정치쟁점화에 나섰다.
***민주당, 분위기 반전 호재?**
민주당은 이 총무 발언을 이명박 서울시장의 히딩크 감독 접견 때 가족참석 물의, 김용균 의원의 특정지역 출신법관 선거사범 편파재판 발언, 하순봉 의원의 좋은 가문 및 명문학교 출신 대통령 발언, 김무성 의원의 대통령 유고 및 여성 비하 발언 등과 묶어 공세를 펴기로 했다.
8.8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의 오만한 일당독재 행태를 부각시켜 유권자들의 견제심리에 호소하겠다는 전략이다. 특히 재보선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가 좋지 않고 반전의 계기도 좀처럼 등장하지 않아 고심이던 민주당으로서는 이 총무의 이날 발언은 전략적 활용가치가 크지 않을 수 없다.
이낙연 대변인은 23일 논평을 통해 “한나라당이 망발을 계속하는 것은 국회를 예속화하려는 이 후보의 제왕적 행태에서 비롯되는 만큼 국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도 이 후보는 의원직을 즉각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화갑 대표는 의총에서 “이 총무가 ‘이회창 후보 5대 의혹’에 대해 조작이니 흑색선전이니 하면서 이런 표현을 썼다”면서 이 총무와 이회창 후보의 사과를 요구했다.
한 대표는 또 “한나라당의 대정부질문 태도를 보면 무정부 상태를 만들어 일당독재를 만들려 하고 있다”며 “이 후보는 절대 대통령이 돼선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균환 총무는 “제왕적 총재, 후보가 있는 한 국회가 제대로 운영될 수 없다”면서 “이 총무 발언은 이 후보에 대한 아부 발언이고 막말로 이 후보는 의원직에서 사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민주당은 의원총회와 원내대책회의를 통해 이 총무 및 이회창 후보의 사과와 이 총무 문책에 대한 요구를 한나라당이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본회의에 응할 수 없다고 결의, 국회 파행이 지속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현재 민주당은 적어도 한나라당을 대표해 서청원 대표의 사과는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고 한나라당은 이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한나라당, ‘국회 파행 책임’ 역공**
민주당이 공세의 고삐를 당기자 한나라당은 즉각적인 진화에 나섰다. 이회창 후보의 ‘입조심’ 당부에도 의원들의 과격발언이 잇따르고 있어 선거 국면에 악영향을 미칠까 우려하는 분위기가 크다.
이에따라 이 총무는 23일 한나라당 의총과 최고위원회의 후 기자간담회를 통해 “순간의 실수로 국회가 정상운영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유감으로 생각하며 정식으로 사과한다”면서 “필요할 경우 본회의가 열리면 신상발언 등을 통해 다시 사과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날 오전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 만큼 사과 대신 해명을 할 수 있으나 이 후보는 상관이 없는 만큼 사과고 해명이고 할 것이 없다”고 일축한 것에서 이 총무가 크게 후퇴한 것도 선거정국의 ‘입단속’ 차원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한나라당은 이 총무의 사과 표명으로 사태를 무마하는 한편, 민주당이 이 문제를 장기화시킬 경우 국회 파행의 책임을 물어 민주당을 역공할 것으로 알려졌다.
22일 시작된 대정부질문에서 이미 궁지에 몰리기 시작한 민주당이 국회를 공전시킬 빌미를 찾던 차에 이 총무 발언을 꼬투리 잡고 국회 파행을 장기화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이날 이 총무가 "민주당이 울고 싶은데 우리가 뺨을 때려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한 배경이다.
남경필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국회 정상화를 위해 전향적인 자세로 의연하게 대처해 나갈 것’이라며 ‘총무 사과에도 불구하고 국회를 파행시킨다면 이는 모두 민주당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이규택 총무 자질론 도마 위에**
그러나 이규택 총무가 잇따른 강성 발언과 돌출 행동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데 대해 대화와 타협을 이끌어야 할 총무직을 맡기엔 부적절한 것 아니냐는 비난이 한나라당 주변에서도 흘러 나오고 있다.
이 총무는 경기 여주 출신으로 중앙일보와 KBS를 거쳐 80년대 민추협 대외협력국장을 시작으로 정계에 입문, 범민주계로 분류된다. 13대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첫 출마, 농촌지역 정서를 극복하지 못하고 낙선의 고배를 마셨으나 4년간 지역구 관리에 열정을 쏟아 14대 총선에서는 민정당 중진인 고(故) 정동성(鄭東星) 의원을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지난 95년 민주당 분당시 당에 잔류했다가 15대 총선에서 거듭 당선돼 민주당 지역구 당선자 9명에 포함되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당선 직후 여당인 신한국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16대 총선까지 내리 3선을 했다.
지난 5월 17일 안택수 의원과 접전을 벌인 끝에 1년 임기의 한나라당 원내총무에 피선됐다.
범민주계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민주당과의 대화에 적합한 측면도 있으나, 과거 신한국당 시절 부총무를 맡을 때부터 '야당투사'로서의 강성 행동이 주변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
총무를 맡은 이후 이 총무의 돌출행동은 이번이 벌써 세번째다.
총무 피선 직후인 5월 30일 민주당의 공격에 대해 “인신공격단처럼 모략하는 것을 보니까 새천년민주당이 아니라 새천년미친당이구만, 미친년당이야”라고 말했다가 ‘미친당’이라고 정정하는 망발을 해 정가의 비난을 샀다.
또한 지난 7월 8일엔 국회 상임위원장 배정문제와 관련해 같은 당 강창희 의원과 육탄전 직전까지 가는 충돌을 빚었다.
게다가 이번엔 '빨치산' 발언 파문을 일으켜 어렵사리 지각 개원한 국회를 다시 공전시키고 있다. 특히 재보선을 앞두고 국회 대정부질문 등을 통해 정부와 민주당을 궁지에 몰아가려는 한나라당의 전략에도 차질을 빚게 만든 셈이어서 당내에서 조차 그의 자질론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높아가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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