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각이 단행됐다. 정·재계에 적지않은 후폭풍을 남기고 있지만 홍업씨 수사도 마무리됐다. 고성이 난무한 끝에 원구성도 어쨌든 이뤄졌다. 8.8 재보선과 12월 대선에 앞서 취해질 모든 사전작업은 끝난 셈이다.
그러나 이같은 일련의 양상은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진행돼 향후 노 후보의 입지를 한층 위축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부패방지제도 마련 및 거국중립내각 제안이 사실상 기각되면서 노 후보가 노린 분위기 쇄신 전략은 급속하게 영향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관측에서다.
더욱이 재보선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권이 주고받을 공방의 쟁점이 권력비리 문제로 공고화되면서 노 후보의 '탈 DJ' 행보는 힘을 받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한나라당은 '부패정권 심판론'을 이어가기 위해 국정조사 및 특검제 도입을, 민주당은 이에 대한 역공으로 '이회창 4대 의혹' 등을 첫 번째 공격 무기로 꺼내들었다.
***한나라당, 권력비리 공세 강화 방침**
한나라당은 홍업씨 사건의 법적 마무리와는 무관하게 이 사건을 현 정부의 총체적 부패상으로 규정, 국정조사와 TV 청문회, 특검제 도입을 대대적으로 요구할 방침이다. 당내 일각에서는 이 사건을 정치자금 및 아태재단 의혹으로 부풀리며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서청원 대표는 11일 주요당직자회의 자리에서 "대통령 아들 비리의 축소·은폐의혹을 국회에서 강도 높게 다뤄야 한다"며 "이번 국회에서 권력비리 국정조사와 공적자금 국정조사, 특검 등도 처리해야 한다"고 강력한 공격의지를 천명했다.
남경필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검찰은 홍업씨가 관리해 온 무려 1백억원도 넘는다는 DJ 비자금에 대해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면서 '만약 검찰 수사가 계속 지지부진한다면 국정조사와 청문회를 강력히 추진할 수밖에 없다'고 으름장을 놨다.
홍준표 의원은 10일 "홍업씨가 베란다에 돈을 보관했다는 수사발표는 '돈 냄새가 나서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던 DJ 비자금 의혹을 떠올리게 한다"며 정치자금에 대한 수사를 촉구했다. 홍 의원은 또 "홍업씨가 아태재단을 통해 돈을 모은 만큼 아버지인 김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것"이라며 "이 부분에 대한 조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은 또 7.11 개각을 '무기력한 개각'이라며 중립성 확보를 위한 의지가 없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특히 그동안 교체를 요구해 온 국정원장, 행자부장관 등의 유임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향후 공세의 포커스를 홍업씨에게 '떡값'을 제공한 것을 알려진 임동원 특보, 신건 국정원장 쪽으로 맞출 태세다.
남경필 대변인이 주요당직자 회의에서 신건 국정원장과 임동원 전 국정원장의 해임 및 검찰 조사를 촉구한 데 이어 김영선 수석부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국정원이 DJ 일가에 빌붙어 추악한 검은 거래를 했다면 명백한 국기문란사건"이라며 "임동원, 신건씨를 그냥 놔두고선 무너진 국기를 다시 바로 세울 수 없다"며 즉각적인 해임을 요구했다.
***민주당, '이회창 4대 의혹'으로 역공**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권력비리 공세를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으로 보고 이회창 후보의 비리의혹을 제기, 맞대응 자세를 취할 것으로 전망된다. ▲안기부예산 1천2백억원 횡령 의혹 ▲국세청 동원 2백30억 세금횡령 의혹 ▲이 후보 두 아들 병역면제 은폐 의혹 ▲이 후보측의 최규선씨 돈 20만 달러 수수 의혹 등 이른바 '이회창 4대 의혹' 특검도 함께 하자는 맞불 작전이다.
이와 관련 장전형 부대변인은 "한나라당이 홍업씨 사건을 물고 늘어지고 있으나 한나라당과 이 후보는 부정부패와 비리에 대해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 주장했다. 장 부대변인은 또 "검찰이 한나라당의 정치적 눈치가 두려워 수사에 진전이 없다면 특검과 국정조사를 통해 의혹을 해결할 수밖에 없다"며 "특히 최규선씨 20만 달러 수수 사건에 대해선 최씨로부터 돈이 전달됐는지, 이 후보가 받지 않았다면 제3의 인물에게 전달됐는지 등을 특검을 통해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낙연 대변인은 "한나라당은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의 예산 1천억원 이상을 총선자금으로 빼돌려 수십명이나 나눠쓴 정당"이라며 "한나라당은 적어도 국정원 관련 부분 등에 대해선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김현미 부대변인은 "이 후보의 장남 정연씨의 병역비리 은폐 문제는 더 이상 슬그머니 넘어갈 수 없으며 국정조사와 특검 수사를 통해 진상을 밝혀야 한다"며 "조사결과 사실로 드러날 경우 이 후보는 국민앞에 약속했듯이 후보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노무현, 분위기 반전 카드 있나?**
이같은 양당의 대립 구도는 정작 대선 경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노무현 후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게 대체적 관측이다.
노 후보는 권력비리 공방이 중심쟁점이 되면 민주당에 불리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검찰 수사에 시비를 걸지 못하도록 한나라당으로 하여금 법무장관을 추천케 하자고 제안한 것이고, 특검제·청문회 공방에서 반부패 입법 논쟁으로 정국의 중심을 옮기자는 취지에서 후보 회담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장관 추천, 후보 회담 제의는 한나라당이 거부했다. 그리고 7.11 개각에 대한 노 후보의 반응은 "논평을 하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청와대가 노 후보의 의중과는 상반되는 조치를 취했다는 항의 표시다.
결국 4일 발표한 노 후보의 '특단의 조치'는 사실상 어떤 측면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정국은 노 후보가 예상한 대로 '대통령 아들 비리' 대 '이회창 4대 의혹'의 대결이라는 극한 공방으로 치닫고 있다. 적어도 8.8 재보선까지는 노 후보의 분위기 반전 전략이 활로를 찾기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한나라당은 '대통령 아들 비리'를 민주당은 '이회창 4대 의혹'을 무기로 꺼내든다는 것은 DJ 대 이회창의 대결구도로 정국이 흘러간다는 의미다. '부패정권 심판, 정권교체론'을 펴는 한나라당의 구상대로 가는 것이다.
여기서 노무현-이회창 대립구도는 형성되지 않는다. 노 후보와 민주당의 '탈DJ'도 쉽지 않다. 구시대 비리 상징으로서의 DJ를 넘어 미래지향형 생산적 정치를 상징하는 노무현으로의 위치 정립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당내 반(反)노무현 세력과의 관계도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재보선 후 정계개편을 노리는 '개헌연대' 세력도 급부상하고 있어 대선정국 속에서 노 후보의 위치는 적지않게 흔들릴 것으로 관측된다.
이제 노무현의 '탈DJ'는 어디로 가나.
일각에서는 분위기 반전을 위해서는 노 후보가 좀더 강한 카드를 제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대선 후보로서의 사활이 걸린 8.8 재보선을 앞두고 정국 분위기 반전을 위해 노 후보가 취할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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