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가 1997년 한총련 투쟁국장으로 활동하다 숨진 김준배씨를 민주화운동자로 인정한 것을 계기로 시민사회단체들이 국가보안법 철폐와 한총련 이적규정 철회를 대대적으로 제기하고 나섰다.
시민사회단체들은 국가기관으로는 처음으로 국가보안법의 개정 내지는 폐지를 요구한 위원회의 발표에 일제히 환영 의사를 밝혔으며 나아가 ▲사건의 수사지휘검사였던 정윤기 검사(현 영월지청장) 등 검·경 책임자 문책 ▲ 한총련 이적규정 철회 및 합법화 ▲국가보안법의 전면 철폐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국민연대, 책임자 형사처벌 요구 방침**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이하 국민연대) 및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한 유가족 대책위'는 10일 오전 종로성당에서 김준배씨 사건의 은폐책임 등을 물어 당시 수사검사인 정윤기 검사 등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정 검사는 위원회의 발표에 대해 "김준배의 행위는 민주화 운동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민주헌정질서를 침해한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 시민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킨 상태다.
국민연대는 기자회견을 통해 '위원회가 김준배에 구타를 가한 이영진 경찰관 1인에 대해서만 고발하고 당시 무리한 검거작전을 지휘한 경찰 수뇌부 및 사건의 진상을 은폐한 정윤기 검사에 대한 고소고발은 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김준배 의문사 사건의 사망책임 및 은폐책임에 대해서는 불철저한 점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국민연대 이은경 사무처장은 "당시 관련자들이 이제라도 반성하고 사과하면 용서하겠다는 뜻을 유족들이 비쳤음에도 정윤기 검사가 반발하고 나섬에 따라 더 이상의 반성 촉구는 무의미하다"면서 "정윤기 검사의 파면과 처벌을 직접적으로 요구하고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이 사무처장은 또 "위원회가 뜨거운 문제를 피해가지 않은 점은 격려할 만한 일이지만 검경 수뇌부에 책임을 묻지 못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라고 밝혔다.
국민연대는 이에 따라 16, 17일 영월지청을 항의방문할 방침이며 빠르면 다음 주 내로 민변을 통해 정윤기 검사 등 검경 책임자들을 형사고발할 예정이다.
***국폐모,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전면화 방침**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시민모임'(이하 국폐모)도 10일 성명을 내고 "진실을 규명하고 정의를 세우려는 의지를 보인 의문사 진상규명위에 박수를 보낸다"며 "우리 시대에 피해갈 수 없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입장 표명을 한 것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국폐모는 그러나 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국가보안법은 폐지만이 유일한 해법이지 개정되거나 대체입법되어 또 다른 인권악법으로 남는 것은 우리나라의 수치"라며 국보법의 개정이나 대체입법이 아닌 전면적인 철폐를 주장했다.
국폐모는 또 정 검사의 발언은 '시대착오적 망발'이라며 "그가 의문사진상규명위의 동행명령장 발부에 응하지 않은 것은 폭거가 아닐 수 없다"고 비판했다.
국폐모 관계자는 "향후 시민사회단체들과 연계,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집회 등을 통해 국가보안법의 반인권성을 지속적으로 알려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범사회인 대책위, 한총련 이적규정 철회 요구방침**
한편 상지대 강만길 총장과 함세웅 신부 등 각계 인사 6백여명으로 구성된 '한총련 합법활동보장 범사회인 대책위원회'(이하 범사회인 대책위)는 12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과 사회단체 대표, 한총련 대의원 등과 함께 서울지검을 항의 방문, 한총련 이적규정 철회와 합법화를 촉구할 방침이다.
범사회인 대책위는 이재정, 이창복 의원 등 한총련 합법화에 동참하는 의원들을 중심으로 국회 차원의 대책마련을 모색하는 한편 강만길 총장과 서원대 김정기 총장 등의 주도로 한총련 합법화를 위한 교수선언 작업도 추진중이다.
범사회인 대책위는 이어 이달 말 유엔 인권이사회에 한총련 이적규정의 부당성에 대해 제소하기로 하고 현재 공소장의 영문번역작업을 마친 상태며 국내에서 벌이고 있는 서명과는 별도로 해외 인권 단체들의 한총련 합법화촉구 서명작업을 위해 영문 인터넷 사이트 개설작업도 진행 중이다.
한편 한총련은 최근 소환장을 받은 대의원 1백여명이 19일 서울지검에 공개 출두해 한총련에 대한 이적규정 철회와 합법화를 요구하고 20일에는 연세대에서 종교, 인권단체 및 송영길, 임종석 의원등이 참석한 가운데 '한총련 합법화를 위한 문화제'를 개최할 예정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한총련 이적성 논란 있다"**
시민사회단체들의 이같은 움직임은 9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한총련 이적성 논란 및 국가보안법 존폐문제가 결부돼 있는 김준배씨 사망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면서 촉발됐다.
위원회 한상범 위원장은 심의 발표를 통해 "헌법재판소는 90년 국보법 제7조에 대해 법적용을 엄격하게 할 것을 요구하는 한정적 합헌성을 인정했다"며 "국가안보를 내세워 정권안보를 위해 오·남용되는 국보법은 개정 내지 폐지돼야 한다"고 밝혔다.
한 위원장은 이어 "구시대 청산 미진으로 인한 형식적 법질서와 실질적 정의가 충돌하는 경우 최선의 선택은 실질적 정의구현"이라며 "민주화는 이를 가로막는 구시대의 법적, 제도적 모순을 청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위원회는 또 "검찰 스스로도 (김준배씨가 활동했던) 제5기 한총련과 강령 및 활동이 크게 다르지 않은 제4기 한총련에 대해 이적단체로 규정한 사례가 없고, 현재 한총련이 문제가 됐던 강령을 수정하는 상황인 만큼 한총련의 이적성은 명백한 것이 아니라 논란이 있다"며 한총련의 이적규정에도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위원회는 이밖에 김준배씨의 사망원인을 "추락 및 이후 폭행이 경합된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김씨가 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아파트 3층 높이에서 떨어진 뒤 당시 검거경찰관인 이영진씨가 쓰러진 김씨를 발로 밟고 몽둥이로 폭행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이영진씨를 특가법상 독직폭행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고 당시 사건을 축소 수사한 검찰, 경찰 공무원들에 대한 자체 감찰을 권고했다.
한편 민주화보상심의위가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을 받아 김씨를 민주화운동자로 인정, 명예회복을 할 것인가 역시 이 사건의 향배에 있어 주목되는 부분이다. 한총련의 이적성 논란과 국가보안법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부족한 시점에서 김씨를 민주화운동자로 인정할 경우 다시한번 논쟁에 휩쓸릴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화보상심의위의 9명의 위원중 4명이 사퇴하거나 유고로 5명만으로 심의를 담당하고 있는데다 위원들의 임기가 내달 초까지여서 김씨 사건에 대한 심의는 2기 위원회가 구성되는 8월 이후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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