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민주당은 노무현 당이 아니다. 모든 주장을 봉쇄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가져서도 안 된다."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8일 K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의 말처럼 요즘 노 후보는 정말 힘이 없다. 민주당도 청와대도 뜻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당정분리 체제인 민주당에서 후보의 말이 강한 권위와 강제력을 갖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또 김대중 대통령이 탈당한 민주당은 원내 제2당일 뿐이다. 노 후보 스스로도 지난 4일 기자회견을 통해 과거 여당 후보가 갖는 프리미엄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노 후보는 소속 당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원내 2당 대통령후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사이 정국의 흐름은 심상치 않다. 노 후보 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 지지율은 떨어져 가는데 뜻한 대로 되는 것도 없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선거를 치를까?
***중립내각·후보회담, 울림 없는 메아리**
노 후보는 지난 4일 중립내각과 후보회담을 제의하는 '중대' 기자회견을 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다.
청와대는 "인사권은 대통령 고유의 권한"이라며 유감 표명을 했었다. 조만간 개각이 있을 것으로 보이나 중립 내각 구성 요구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몇몇 장관의 재보선 출마, 실책 등으로 인한 부분 조각일 가능성이 더 높게 점쳐진다.
한나라당은 중립 내각 구성을 위한 장관 추천 제의에 대해 "나눠먹기식 내각 구성은 반대한다"며 거절했다. 또한 부패 청산 특별 입법을 협의하기 위한 후보회담 제안도 거절했다. 법 제정은 후보들이 아니라 대표나 총무 등 실무진에서 협의할 문제라는 것이다.
급기야 노 후보는 8일 "후보회담을 고집하는 게 아니다. 대표회담이든 총무회담이든 한나라당이 역제의해 온다면 받겠다"며 한발 물러선 2차 제의도 내놓았다. 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다.
대통령 장남인 김홍일 의원 탈당 문제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노 후보는 4일 "아태재단과 김홍일 의원 문제는 대통령과 본인이 결단해야 한다"며 "국민의 뜻을 존중하는 적절한 조치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우회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김 의원은 8일 의원총회에 앞서 기자들을 만나 "탈당할 이유가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청와대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일언반구 반응이 없다.
***남궁 장관과의 재보선 공천 갈등, 노무현 敗**
노 후보의 발언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대상은 한나라당만이 아니다.
8.8 재보선 공천과 관련해, 노 후보는 '동교동 배제'의 원칙을 분명히 밝혔다. 구태정치와 인연을 끊고 '노무현 컬러'에 어울리는 새로운 인물을 내세우겠다는 전략이다.
이런 원칙은 경기도 광명 지역에 출마 의사를 밝힌 구동교동계 남궁진 문화관광부 장관과 갈등을 빚었다. 남궁 장관이 "(김대통령 아래서) 장관한 사람은 대통령 후보 해도 되고, 가까이 모신 사람은 국회의원 선거 나가면 안되느냐"며 정면에서 반발했기 때문이다.
충돌은 계속되었다. 노 후보는 지난 5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동교동 배제' 원칙을 재차 언급했다. 하지만 남궁 장관은 6일 민주당에 비공개로 후보 공천을 신청했다. 남궁 장관의 공천 신청은 '일단 한번 해보자'는 선전 포고다.
8일에는 청와대도 남궁 장관의 손을 들어 줬다. 재보선 출마를 이유로 장관직 사퇴서를 제출했고, 이날 오후 청와대는 사표를 수리했다. 출마를 허락한 것이다.
아직 당의 공천과정이 남아 있긴 하다. 하지만 장관직을 던지고, 청와대까지 허용한 마당에 당의 재보선특위가 공천을 거부할 것이라는 예상은 거의 없다. 결국 남궁 장관이 이긴 셈이다.
노 후보는 8일 K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당·정분리 상태여서 후보로서 비공식적인 의견을 전달할 뿐이어서 제 마음대로 공천하지 못하며 제 뜻대로 공천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지겠다"고 했다. '노무현 컬러'로 공천도 하지 못하면서 책임은 지겠다는 것이다.
***후보와 거꾸로 가는 민주당의 개헌 공론화**
최근 민주당 주변에서 예사롭지 않게 흘러나오는 개헌론 공론화는 당이 후보와 반대로 가는 것 아니냐는 인상마저 갖게 한다.
노 후보는 이인제 의원이 5일 '연내 개헌'을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가진 것에 대해 "연내 개헌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원집정부제 형태의 권력분산 요구에 대해서도 "현행 헌법으로 충분하다"며 개헌 반대를 확고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헌론 주장은 계속되고 있다. 이인제 의원 등 비주류만이 아니다. 당의 공식 조직인 정치개혁특위(위원장 박상천 최고위원)가 직접 나서 개헌 공론화의 총대를 메고 있다.
민주당 정치개혁특위는 8일 오후 헌법관계소위를 열어 개헌 공론화 작업에 착수했다. 분권적 대통령제로의 개헌을 위한 공청회를 내달 중 개최하고, 8월말까지 개헌안을 마련해 당에 제출,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개헌 문제를 쟁점화시키기로 했다.
박종우 헌법소위 위원장은 "당에서 정개특위의 논의결과를 받아들일 것인지와 무관하게 정기국회 전까지는 정개특위 차원의 개헌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노 후보는 8일 "일개 기구에서 나오는 것으로, 아직 당론으로 채택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곧이어 "민주당은 노무현 당이 아니므로 모든 주장을 봉쇄할 힘이 없고, 그런 힘을 가져서도 안된다"고 덧붙였다.
***노 후보, "생산적 정치를 하자"**
이처럼 노 후보는 지금 혼자다. 한때는 지지도에서 상대당 후보를 20% 이상 압도하던 집권여당 대선후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집권여당도 아닌 원내 제2당, 그것도 소속 당도 마음대로 못하는 후보로 전락했다.
게다가 지지도도 떨어져 간다. 그런데 당도 청와대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오히려 훼방을 놓는 것 아니냐는 인식마저 들게 한다. 노 후보의 한 핵심 측근은 "당과 청와대가 도와준 게 뭐 있느냐"며 노골적인 불만을 털어 놓기도 했다.
한편 노 후보는 8일 중립내각 및 후보회담 제안과 관련해 "근본적으로 내가 하고자 했던 것은 '정치를 생산적으로 바꾸자. 그리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고 그 일을 먼저 하자'는 뜻이었다"면서 "같은 취지의 정치적 주장을 계속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노 후보는 자신의 제안이 떨어진 지지율, 당내 일각에서 공공연히 제기되고 있는 후보 교체론, 서해교전 등 불리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한 국면전환용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4일 기자회견이 아직은 '울림없는 메아리'에 그치고 있지만 일회적인 차원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제2, 제3의 카드를 준비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노 후보가 준비하고 있는 다음 카드가 무엇일지, 또 이번엔 그 카드가 먹힐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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