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현철이가 되지 말라."
1998년 초 김대중 당시 대통령 당선자는 홍일, 홍업, 홍걸 세 아들을 일산 자택으로 불러들여 앞으로의 처신을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현철씨 문제로 곤욕을 치른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임기말을 보아온 터라 김 당선자는 아들들의 처신에 거듭 주의를 준 것으로 당시 언론들은 전했다.
그해 11월 아태평화재단 관계자들과의 만찬장에서도 김 대통령은 "대통령 아들들은 수신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재단 상임부이사장직을 맡은 홍업씨를 염두에 둔 말이다.
국회의원으로 이미 공인이 된 장남 홍일씨와 미국 유학중인 막내 홍걸씨와는 달리 '밝은 세상'이라는 정치기획사를 만들어 대선에까지 개입했으며 아태재단을 관리하던 홍업씨에게 김 대통령의 이 같은 당부는 간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4년이 흐른 지금, 김 대통령의 당시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홍업씨는 현재 각종 권력 비리의 몸통이라는 세간의 질타를 받으며 97년 현철씨가 조사를 받았던 대검청사 11층 특별조사실에 소환됐다.
***베일에 싸여 막후에서 활동**
대통령 차남 김홍업. 1949년 전남 목포 출생. 서울 마포 용강초등학교, 이대부속중학교, 대신고등학교를 다녔다. 경희대 의대에 입학했으나 2년만에 경영학과로 옮겨 72년 졸업했다. 의사공부를 감당할 집안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한다. 대학졸업 후 장교(ROTC 10기)로 복무했으며, 감사원 감사위원을 지낸 신현수씨의 딸 신선련씨와 84년 워싱턴에서 결혼해 2남을 뒀다. 부인도 경희대 동문이다.
장교 전역 후 부친의 수행비서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고 줄곧 정치권 주변에서 아버지를 도왔다.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는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치도곤도 당했고, 김 대통령의 미국 망명시절에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직접 설립하기도 했다.
한때 출판사와 한약재 수입상을 했다고 하나 구체적인 것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뚜렷한 직장생활의 기록도 없다.
김홍업씨가 아버지를 돕기 위해 주력한 부분은 정치광고와 여론조사 등 기획 파트였다. 87년 대선을 앞두고는 '평화기획'이라는 정치광고 대행사를 만들어 선거에 직접 개입했다. 그리고 95년 '평화기획'이 모태가 된 정치기획사 '밝은 세상'을 설립 운영하면서 정치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했다.
김 대통령의 청와대 입성 후에는 아태재단 부이사장이라는 공식직함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공식석상에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등 언론 노출을 극히 꺼린 것으로 알려졌다. 현 정권 들어 정치인이 모이는 자리에 홍업씨가 나타난 것은 지난 98년 권노갑 전 최고위원의 자녀 결혼씩 때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부친이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기여도를 봤을 때, 한때 홍업씨의 정치권 진출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또한 진승현씨의 로비스트 역할을 한 최택곤씨가 구명을 위해 그를 찾은 데서 알 수 있듯이 홍업씨는 정치권에서도 영향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97년 대선통해 본격적인 활동 시작**
김홍업씨의 활동상이 그나마 다소 알려진 것은 95년 '밝은 세상'을 설립 운영하면서부터다. '밝은 세상'은 당시 DJ의 정계복귀를 계기로 대선전략 수립 및 기획을 목적으로 설립한 홍보기획사로 여론조사, 홍보기획, 출판, 정치 CF 등을 제작하는 회사다. 윤흥렬 전 스포츠서울 사장 등이 참여했던 '밝은 세상'은 97년 대선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당시 '밝은 세상'은 김대중, 김종필, 박태준씨 등이 함께 출연하는 광고를 기획하는 등 선거에 깊숙이 개입했다. 당시 호평을 받았던 "DJ와 함께 춤을" 광고도 '밝은 세상' 작품이라 한다.
정치광고 뿐아니라 여론조사에서도 '밝은 세상'은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국민회의나 다른 사조직의 어떤 여론조사보다 정확하다는 내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97년 대선전이 본격화하면서 '밝은 세상'에 대한 사조직 논란이 일자 특보단의 잇따른 권고로 윤흥렬씨 등 팀원 대부분은 대선기획본부에 흡수됐다. 그 후 98년 김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팀원 상당수가 청와대에 입성했고, '밝은 세상'은 문을 닫았다.
한 언론은 '밝은 세상'에 참여했던 한 인사의 말을 인용 "밑지는 장사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회사를 처분한 뒤 돈이 꽤 남았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또한 홍업씨는 회사와 별도로 김 대통령의 각종 심부름을 수행했고 김 대통령을 대신해 군, 종교계, 학계 인사 등을 다각도로 접촉해 왔기 때문에 홍업씨가 대선 잔여금을 관리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동교동 사금고' 아태재단의 실세**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홍업씨는 베일에 싸여 있던 인물이었다. 홍업씨가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동교동 사금고'라는 별칭이 붙어 있던 아태평화재단에 대한 검찰 수사 이후 각종 비리의 몸통으로 지목되면서부터다.
아태재단은 김 대통령이 직접 이사장직을 맡아 94년 1월 설립됐다. 설립목적은 김 대통령의 외교와 대북정책을 생산하고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통령 취임 후 김 대통령은 이사장직을 사임했고, 98년 2월 이사장직을 공석으로 둔 채 홍업씨가 부이사장에 취임한다. 이때부터 지난 4월 잠정 폐쇄할 때까지 홍업씨는 아태재단의 실질적인 관리자로 알려져 왔다. 재단 실무는 사무총장과 상임이사에게 거의 일임했으나 후원금 및 운영자금 문제 등에 대해서는 직접 관여했으며 적지 않은 후원금을 유치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태재단의 실체는 '이용호 게이트'와 재단의 연루설이 포착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용호 게이트를 수사했던 차정일 특검팀은 올해 3월 수사를 마무리하면서 홍업씨의 친구 김성환씨의 차명계좌에서 거액의 수표가 출금된 사실을 추적, 그 중 대부분이 아태재단으로 흘러들어간 사실을 확인, 검찰에 사건을 넘겼다.
특검팀 자료를 토대로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김씨가 홍업씨의 돈 12억원을 차명계좌를 통해 세탁했으며, 홍업씨가 김병호 전 아태재단 실장을 통해 16억원을 세탁한 사실 등을 속속 포착했다.
그 후 검찰은 이른바 '측근 3인방'이라고 불리는 김성환, 유진걸, 이거성씨 등을 통하거나 홍업씨가 직접 기업체들로부터 자금을 수수한 사실을 확인하고 지난 19일 홍업씨를 소환, 구속절차를 앞두고 있다.
***"명예로운 대통령의 가족으로 조용히 살아가겠다"?**
홍업씨는 현재 부친의 심정을 가장 괴롭히는 당사자가 됐지만 홍업씨에 대한 김 대통령의 사랑은 각별했다고 한다. 김 대통령이 1980년 옥중에서 쓴 '김대중 옥중서신-민족의 한을 안고'에는 김 대통령이 1980년 11월 24일자로 홍업씨에게 전한 다음과 같은 편지 내용이 수록돼 있다.
"사랑하는 아들 홍업에게…어느 자식이라고 차별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나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너도 잘 알 것이다. 너는 생긴 용모나 그 선량한 마음씨나 참으로 하느님의 축복과 사랑을 받고 태어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근자에 아버지가 너와 같이 일을 해보고서 네가 사물에 대한 판단력이나 처리 능력 그리고 신중성에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한 점에서 아버지는 너의 사람됨과 자질에 대해 큰 기대를 갖고 있다."
홍업씨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렸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가 훗날 아버지에게 돌아갈 역사적 평가에 더 이상 누가 되지 않으려면 모든 혐의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지금과 같은 모습은 적절치 않다.
"명예로운 대통령의 가족으로 조용히 살아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던 자신과의 약속을 홍업씨는 지금이야말로 다시 한번 새겨보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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