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선. 1960년 전남 나주 생. 전남고 중퇴. 한국 외국어대 재학 중 도미. 위스콘신 주립대 경제학과 졸업. 버클리대 평화학 학사. 석ㆍ박사 학위 여부는 분명치 않음. 1997년 국민회의 김대중 대통령 후보 대외담당 보좌역. 1998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보좌역. 1999년 권노갑 민주당 상임고문 비서. 현 미래도시환경 대표 이사. 지난 4월18일 알선수재혐의로 구속 수감.
지난 7일 최규선 씨가 검찰에 소환되기 직전 녹음한 육성 테이프가 언론에 공개,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면서 '최규선 게이트'가 새 국면을 맞고 있다. 최씨는 "이 정권은 나의 모든 것, 정치에 대한 희망, 나의 친구들, 나의 인생까지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며 김대중정부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하고 있다.
최규선. 그는 과연 대통령 아들을 이용해 각종 이권에 개입한 희대의 사기꾼인가, 아니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정권에 배신당한 희생양인가?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로는 판단이 쉽지 않다. 최씨의 행적에 불분명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녹음테이프에서 최씨가 주장한 내용에 대해 관련자들은 모두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정황상 완전한 사실날조는 아닐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또 일부 내용은 최씨의 주장도 시기에 따라 내용을 달리하고 있다.
이처럼 최규선의 행적엔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그간 공개되고 확인된 사실들만으로도 그가 단순사기꾼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는 국제적인 마당발이었고, 여야를 넘나든 로비스트였다. 하지만 성공한 것보다는 실패한 프로젝트가 더 많았고, 거의 매번 주변에 잡음을 일으킨 문제아였다.
최씨의 진술과 언론보도 및 주변 인물들의 증언 등을 종합해 최규선의 부침을 추적한다.
***"1982년 DJ와 처음 만나"**
1960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최규선씨는 부친이 버스터미널을 운영했기 때문에 상당히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최씨의 아버지와 김대중 대통령은 친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구체적 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남고 재학시 서울로 상경, 검정고시를 통해 한국 외국어대 영어과에 입학했다. 이는 당시 지방의 공부 잘하는 학생들 사이에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외대 재학 중이던 1981년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 최씨는 첫 번째 연애에 반대한 부모에게 등을 떼밀려 위스콘신 주립대학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통일교 재단을 통해 유학을 가게 됐다는 언론 보도도 있었다.
유학간 지 1년만인 82년, 그는 위스콘신대 국제학생회장이 됐다. 그는 이때 DJ를 처음 만났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으로 망명온 DJ를 다른 한국 유학생 학생회장 서너명과 함께 시카고의 한 호텔에서 만나 이때부터 'DJ맨'이 됐다고 회상하고 있다.
최씨는 86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DJ를 다시 만났다고 주장했다. 대학원 진학 시험 준비를 핑계로 귀국했지만 사실은 87년 대선에 출마한 DJ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최씨는 당시 가택 연금 상태였던 DJ를 이희호 여사 등의 도움으로 경찰의 눈을 피해 수시로 만났다고 주장했다. 당시 DJ 곁에는 박지원 뉴욕 한인회장, 유종근 럿거스대 경제학과 교수가 있었고, 최씨와 유종근씨는 이때부터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88년, 최씨는 DJ 선거운동 중 종종 이용했던 서울-광주간 비행노선에서 만난 두살 연상의 스튜어디스 손미혜씨와 결혼식을 올리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의 석사 과정에 입학했으며 스칼라피노 교수의 조교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칼라피노 교수가 소속된 버클리 동아시아 연구소는 "최씨가 96년 5월 '평화와 분쟁학'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한 기록은 있으나 석.박사 학위를 받은 사실은 없다"고 밝혔다. 스칼라피노 교수도 최씨가 학부 학생이었음은 인정했지만 대학원 지도학생은 아니었다고 부인했다.
이에 대해 최씨 변호인인 강호성 변호사는 최근 "최씨가 캘리포니아 사회과학원(CSIS)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정정했다. 버클리대 동문회 관계자는 "최씨는 공부보다는 수시로 한국을 드나들며 사람 만나는 일에 몰두해 유학생 사회에 수수께끼 인물이라는 평이 파다했다"고 전했다.
***마이클 잭슨과 만남 과정도 엇갈린 진술**
최씨는 버클리대에 다니면서 미국 내 휴먼 네트워크를 구축했다고 말해왔다. 그는 스칼라피노 교수가 자신에게 스티븐 솔라즈 전 하원의원, 컬럼비아 대학 교수출신의 백악관 대변인이었던 조지 스테파노풀로스, 키신저 전 국무장관 같은 미국 유력 인사를 소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강의 수강생에게 스칼라피노 교수가 이들을 소개해줬는지는 의문이다.
그가 마이클 잭슨과 인연을 만들어 낸 과정도 그가 녹음 테이프에서 밝힌 것과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했던 얘기가 판이하게 다르다.
녹음 테이프에서 그는 지난 92년 5월 LA의 센트럴 시티에서 마약퇴치 운동을 위한 자선기금 모금파티가 열린 자리에서 마이클 잭슨을 처음 만났다고 말했다. 마이클 잭슨은 경호원들의 제지를 뚫고 겁 없이 다가간 그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는 것. 최씨는 어린 시절 자신을 다정하게 돌봐준 큰형 재키의 첫 부인이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마이클 잭슨은 한국인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쉽게 친해지게 됐다고 밝혔다. 최씨는 마이클 잭슨이 만난지 석달째가 되던 8월 중순께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생일파티에 초대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마이클 잭슨은 최씨에게 "미국 대통령을 포함해 누구라도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주선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반면 올초까지도 최씨와 여러 차례 만났다는 한 기업인은 "최씨가 술자리에서 흥이 나면 마이클 잭슨과 친분을 쌓게 된 얘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며 최씨가 전한 무용담을 언론에 공개했다.
"마이클 잭슨과 사귀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아들과 함께 마이클 잭슨의 집인 네버랜드를 찾아가 정문 앞에 서있었다. 아들에겐 색동옷을 입혔다. 매일 이러기를 일주일, 드디어 마이클 잭슨이 차에서 내리더니 '당신 왜 여기 서 있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나와 내 아들이 당신의 영원한 팬이다. 당신이 오가는 모습만이라도 보고 있으면 행복해질 것 같아 이렇게 서있다'고 말했다."
또 최씨는 선산을 팔아 마이클 잭슨 어머니에게 16만달러짜리 롤스로이스 차를 사줘 마이클 잭슨과 그 어머니를 감동시켰다는 일화도 보도된 바 있다.
***96년, 최형우와 스칼라피노 면담 주선 **
최씨가 김홍걸씨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94년. 홍걸씨와의 만남에 대해 최씨는 당시 DJ가 "미국에 유학중인 홍걸씨를 한번 만나보라"고 권유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청와대 측은 이를 부인했다.
어쨌든 최씨는 홍걸씨에게 그의 표현을 빌면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돈을 주고, 돈도 꿔주면서 가깝게 접근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씨 주장에 따르면, 홍걸씨는 최씨에게 배다른 형제인 김홍일 의원과 홍업씨에 대한 서운한 심정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았을 만큼 신뢰했다 한다.
최씨가 다시 귀국한 것은 96년. 그해 10월 그는 마이클 잭슨의 한국 공연을 주선했다. 최씨는 또 96년 당시 신한국당의 2인자였던 최형우 고문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내무부 장관에서 막 물러나 대권행보를 시작한 최형우 고문에게 그는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접근해 특보가 됐다.
그러나 그의 특보 활동은 중간에 말썽을 피우는 바람에 서너달 만에 끝났다. 그가 일부 기업체에 최형우 의원 특보라면서 금품 협찬을 요구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최형우 전의원의 측근은 최씨가 최 전의원과 스칼라피노 교수의 만남을 주선했던 일을 이렇게 소개했다.
"어느 날 최규선이란 사람이 찾아와 스칼라피노 교수를 잘 아는데 최 전의원과 오찬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정말 자리를 마련해 최 전의원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최씨는 수강생 신분으로 스칼라피노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얼굴을 익혔다가 이 교수가 방한 일정 중 서울 힐튼호텔에 묵기로 했다는 걸 알게 되자 먼저 국내에 들어와 바로 옆방을 예약했다. 그리고는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꾸며 스칼라피노 교수와 최 전의원간의 만남은 물론 당시 민주계 실세들과의 연쇄 만남을 주선했다."
***IMF사태 발발하자 물 만난 고기**
최형우 고문 특보에서 물러난 최씨는 97년 대선운동이 시작되자, 김대중 국민회의 대선 후보의 특보로 활동했다. 그는 97년 3월 대선 후보 선출 전당대회 때 만델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의 딸 진지 만델라를 참석시키면서 섭외능력을 인정받아 대외담당 보좌역으로 일하게 됐다.
최규선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IMF사태 때였다. 그는 97년 12월말 김대중후보가 대통령당선자가 된 직후 마이클 잭슨을 통해 세계적 펀드매니저인 퀀텀펀드의 조지 소로스 회장의 입국과 알 왈리드 사우디 왕자로부터 국내 투자를 유치하는 등 IMF위기때 긴요한 수완을 발휘했다.
당시 그는 시티은행의 최대주주인 알 왈리드 왕자를 통해 시티은행의 제일은행 인수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언론들과 만나 "해외투자 유치의 관건은 정리해고인만큼 정리해고제를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고 훈수를 두기까지 했다.
당시 최규선이 보인 활약은 김대통령당선자 진영에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듯 싶다. 당시 대통령당선자 특보였던 유종근 전북지사는 98년 1월초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규선을 다음과 같이 극찬하기도 했다.
"최규선 총재보좌역이 마이클 잭슨과 절친한 사이입니다. 알 왈리드는 잭슨과 비즈니스 파트너이고요. 지난해 12월 잭슨이 방한했을 때 알 왈리드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한번 왔으면 좋겠다. 그게 어려우면 내가 가겠다'는 그런 내용이죠. 그 뒤 소로스에게 편지를 한 것입니다. 최 보좌역은 저와는 호형호제할 정도로 가깝게 지냅니다."
그는 또 98년 1월초에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지의 캐서린 그레이엄 명예회장으로부터 "김 차기대통령의 당선은 민주주의를 향한 끈기와 노력, 집념의 승리"라는 축하편지를 받아 김당선자에게 전달, 신임을 두텁게 하기도 했다.
얼마 전 작고한 그레이엄 회장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꼽히는 언론계의 초거물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공으로 최씨는 당선자 비서 5인 중 1명이 됐다고 주장한다. 당시 당선자 비서 5인방은 이강래, 박금옥, 장성민, 고재방, 그리고 최규선이었다.
***"가신들의 텃세로 밀려났다"?**
그러나 비서 5인방 중 최씨는 유일하게 청와대 입성에 실패했다. 당시 그는 김대통령 당선자의 언질로 내심 청와대 정황실장 자리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의 낙마 이유와 관련해 최씨는 자신이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자, 시건방지다는 이유로 동교동계로 대별되는 가신들의 텃세와 음해에 밀려 밀려나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선자와 면담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이뤄도 DJ는 나를 가장 먼저 방으로 불어들이곤 했다. 이런 우대로 나는 점차 모난 돌로 주변사람들에게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최씨는 자신이 낙마하게 된 결정적 이유를 극비리에 진행하던 마이클 잭슨의 북한 어린이 돕기 공연 소식을 기자에게 유출, 일간지에 보도된 사건에서 찾았다. 최씨는 그 공연에 북한의 김정일을 초청하려 했으며 이에 대한 발표는 취임식장에서 당선자가 직접 언급해 효과를 극대화하기로 돼 있었던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이 있은 직후 김중권 비서실장은 그를 불러 "이번 청와대 비서실 스타팅 멤버에서 당신은 빠져야겠다"는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씨가 청와대 비서실 멤버에서 제외된 이유에 대해 여권 관계자는 "언행에 신뢰성이 없고 경력도 불분명한데다, 이권 개입설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98년 6월 최씨는 외자유치 커미션과 관련된 문제로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당 총재 보좌역 자리도 내놓게 됐다. 최씨는 특히 삼성자동차의 투자문제로 이건회 회장의 전용기를 타고 삼성임원들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로 간 것이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알 왈리드와의 협상은 잘 진행되었지만, 개혁대상인 삼성그룹을 지원하는 일은 DJ정부의 재벌정책과 어긋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실제 이유는 미국에서의 마이클 잭슨 사기사건**
그러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즈음 최씨의 미국내 사기행각이 청와대에 알려졌고, 이것이 그를 권력 핵심부로부터 멀어지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98년초 최씨에게 사기를 당한 재미동포가 청와대로 진정서를 보냈다. 재미동포 수 그리슨(62.여)씨는 90년대 초 LA 외환은행 올림픽 지점 차장으로 근무할 당시 최씨로부터 30여만달러를 사기당했다. 최씨는 마이클 잭슨 내한 공연을 유치한다는 명목으로 국내 종교재단으로부터 수백만달러를 받아 올림픽 지점에 맡겨놓고 이를 근거로 30여만달러를 빌려갔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 공연이 무산되고 종교재단은 소송을 통해 은행계좌를 동결한 뒤 예치금을 회수했으며 그리슨씨는 자신의 집을 팔아 최씨에게 지급보증한 30여만 달러를 갚았다.
또 최씨는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며 로스앤젤레스를 오가면서 "나는 대통령과 인척 관계"라며 마이클 잭슨 공연 한국 유치 등의 명목으로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지역 동포들의 돈을 끌어 모은 뒤 잠적한 적도 있다. 이 사실은 당시 한인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98년 9월 최씨는 마이클 잭슨 내한 공연 추진 과정에 이벤트 업체측으로부터 거액의 경비를 끌어다 쓰고도 공연이 무산돼 사기 혐의로 경찰청 특수수사과의 조사를 받았다. 그는 경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이 검찰에서 기각돼 무혐의로 풀려났다. 당시 경찰에서 이 사건 수사를 맡았던 것은 최성규 전 총경이었으며, 이후 두 사람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최씨는 검찰에서 무혐의 결정이 내려지게 된 데에는 박주선 당시 청와대 법무비서관과 김홍걸씨의 도움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김홍걸을 내세운 일확천금의 꿈**
최씨는 무혐의로 풀려난 뒤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최씨는 그러나 좌절을 몰랐다.
최씨는 99년 귀국해 당시 한 병원에 입원해 있던 민주당 실세 권노갑 민주당 고문을 병문안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시작으로, 일본까지 찾아가 권 고문을 만남으로써 특보로 기용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 대해 최씨는 이재만 대통령 수행비서의 충고로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던 권노갑 전 고문을 만났고 권 고문이 자신에게 "우산이 돼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재만 비서는 이 주장을 부인하고 있다. 또 권 전 고문의 측근은 최씨가 권 전 고문의 아들(권정빈)을 지극 정성으로 챙겨주면서 접근해 들어가 권 전 고문이 아들로부터 "규선이 형은 참 좋은 사람"이라는 천거를 받아 특보로 기용됐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 최씨는 권 고문 비서관에 승용차를 선물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최씨의 권 전고문 특보 직함도 대통령 특보 등을 자처하고 다니다가 문제가 돼 단기간에 그쳤다.
99년부터 벤처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자 최규선은 2000년초 김홍걸씨를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크게 한 판을 벌이려 했다. 그는 2000년 2월 알 왈리드 사우디왕자로부터 10억달러(1조3천억원)를 끌어들여, 왈리드 왕자를 회장으로 하고 자신이 사장을 맡으며 김홍걸씨를 애널리스트로 하는 벤처투자회사를 만들려는 계획을 구체화했다. 당시 정점에 달했던 '묻지마 투자' 열기만 계속되면 한번에 수천,수조원을 벌 수도 있다는 일확천금의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시도는 그해 6월 청와대 가족회의에서 맏형인 김홍일의원의 반대로 무산됐다. "대통령 아들이 무슨 놈의 기업체 설립이냐"는 이유에서였다. 이 일을 계기로 김홍일의원과 김홍걸씨 사이는 크게 벌어졌다.
김홍걸씨는 김홍일의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해 7월 최규선씨와 함께 포스코 유상부 회장을 만나 벤처 창업에 대한 도움을 받는 등 독자노선을 걷던 와중에, 올 들어 '최규선 게이트'가 터지면서 동반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붕어빵 안에는 왜 앙꼬가 없는가'**
최씨는 지금도 자신의 꿈은 '정치'라고 말하고 있다. 최씨는 그러나 일련의 좌절을 경험하면서 민주당을 통한 정계입문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그는 연초까지만 해도 차기 집권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한나라당을 상대로 한 일련의 접근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최씨는 2001년 여름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의 해외담당 특보 자리를 노리고 윤여준 의원에게 접근했다. 그는 이 전총재의 방미활동을 돕겠다며 자진해서 나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전총재의 방미활동을 도왔던 스티븐 솔라즈 전 미 하원의원은 최근 최씨가 이 전총재의 방미활동에 대한 도움을 요청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최씨는 최근 홍사덕 의원 캠프에 합류한 김희완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통해 홍의원의 서울시장 후보 경선을 돕기 위해 솔라즈 전 의원을 국내에 초청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전 운전기사인 천호영씨가 최씨의 비리를 지난 3월28일 경실련 홈페이지에 공개하면서'최규선 게이트'가 시작됐고 최씨의 화려했던 정치편력도 막을 내리게 됐다.
'붕어빵 안에는 왜 앙꼬가 없는가.' 최씨가 최근 집필하려던 자서전의 책제목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씨의 삶이야말로 이 책 제목과 같이 허황된 무지개를 쫓던 백일몽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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